86화주사위 게임(3)
교도소 안에서는 세상과 다른 배움이 있었다.
그 어디에서도 가르쳐 주지 않는, 생존 투쟁을 위한 잡기.
때로는 그것이 불법이라 할지라도, 또는 불법과 합법 그 어딘가에 숨어있을지라도 그건 중요치 않았다. 그곳은 세상과 유리된… 동떨어진 섬이었으니까.
“1! 3! 2! 천사 가면 고객님께서 나오신 숫자의 총합은 6…입니다!”
조금은 높낮이를 조심하는 듯한 카지노 딜러의 목소리. 대놓고 낮은 숫자가 나왔으니 신경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눈치를 보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런 눈치가 무색하리만큼 가면 아래 남들 몰래 올라가는 내 입꼬리.
‘의도한 대로… 나왔다.’
헛된 희망.
일부러 만들어 낸 작은 숫자는 그 뜨거움으로 이택규 전 사장의 눈앞에 아지랑이를 만들었다.
“오… 오오! 그, 그렇제! 행님아, 편하게 6만 넘으면 된다 아이가!”
“흐흐흐. 딱 기다려 봐라잉. 내 학교 다닐 적에 동네 하우스 좀 댕겨 봤다 이거야.”
그저 눈속임에 불과한, 실체 따위 찾아볼 수 없는 아지랑이.
그러나 일렁이는 유혹은 그의 혼을 쏙 빼놓기에 충분한 모양이었다.
산양 가면을 쓴 이택규 전 사장의 발굽이 단단한 반석처럼 보이는 신기루에 올려졌으니까.
“자, 던집니다! 흡!”
벌겋게 달아오른 목의 피부색.
데구르르, 굴러가던 주사위가 멈추자 꿀렁거리던 상대편 두 사람의 목젖이 이내 멈추었다.
세상이 떠나가도록 크게 울리는, 거센 환호성과 함께.
* * * *
제단 위에 올라가 태양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신관처럼, 지하 카지노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를 보며 괴성을 토하는 이가 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제물로 바쳐 간절히 원하는 것을 소망한 그가 본 것은 환희의 빛 그 자체였다.
“으아아아아! 9! 9로 먹었어! 9!”
“행님아! 진짜 행님은 운을 타고난 사나이데이! 참말로 인생은 이래 살아야 된다 아이가!”
미소로 한껏 부푼 두 뺨이 얼굴 가죽을 뚫고 나오려는 그 순간, 산양 가면을 쓴 제사장은 양팔로 제단 앞에 놓인 제물을 한껏 끌어안았다.
열 개짜리 붉은색 칩 열 줄.
도합 한화 10억 원 상당의 금액을.
“아이고! 아이고! 감사합니다! 이거 판떼기가 컸는데, 송구하게도 저희가 먹어야 쓰것네요.”
호들갑을 떨어대는 이택규 전 사장. 당장이라도 이 칩을 현찰로 바꾸고 싶을 터.
그러나… 그는 이제 입천장에 낚싯바늘이 단단히 꿰인 물고기나 다름없는 상태다.
그의 마음속, 서서히 타오르기 시작한 욕망의 불씨는, 이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거대한 화염이 되어 스스로를 집어삼킬 것이기에.
“축하드립니다. 오늘 행운의 여신께 입맞춤 받으신 분들이 여럿 계시네요.”
“크흠… 그럼 저희는 이만.”
엉거주춤 고개를 숙여 떠나려는 모양새를 취한 이택규 전 사장.
그런 그의 인사를 듣는 둥 마는 둥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은 나는, 손을 들어 딜러를 불렀다.
“600개 더. 붉은색 칩으로.”
멈칫, 소금 기둥이라도 된 듯 제자리에 멈춰 선 이택규 전 사장,
가면 아래 감춘 그의 표정은,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바깥으로 나서는 문손잡이를 움켜쥔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600…개. 저 씨뻘건 게 600개면 얼마다냐, 그, 계산해보면.”
“하이고, 행님아. 아까 딴 거이 너무 좋아가 계산도 안 되나 보네. 대강 60억 원! 자, 이제 밥 묵으러 가제이.”
이쯤에서 만족하고 주사위 게임룸을 떠나려는 백덕규.
이택규 전 사장의 양어깨를 잡고 보채는 그의 몸짓에서는, 마지막 한 줄기의 이성이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요행은 끝이니 이만 만족함을 알고 물러나라고.
“잠깐만, 가만있어 봐.”
물론… 달콤한 유혹에 매료당한 자에게는 들릴 리 없는 말이지만.
“그, 우리 천사님. 혹시 더 하실 생각이십니까요?”
마침내… 걸려들었다.
굵은 낚싯바늘이 제 입에 물린 것도 모른 채, 꼬리를 흔들기 시작한 이택규 전 사장.
이제 힘을 느슨하게 풀고, 천천히 쥐었다 펴기를 반복할 시간이다.
자신이 수면 위로 끌려오는 것도 모르게끔 서서히.
“밤은 길고, 즐거움은 계속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혹시 얼마나 더?”
“글쎄요. 뭐라 확답은 못 드리겠습니다만. 적어도.”
마침 딜러가 가지고 온 붉은색 칩 600개.
열 개씩 쌓인 60줄짜리 칩의 장막. 벌게진 눈의 이택규 전 사장은
그저 내 손가락 끝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맨 위에 놓인 칩을 만지작거리며 유혹하는 손길을.
“여기 있는 칩들 전부를 다 쓸 때까지. 그때까지는 계속 즐길 것 같군요.”
꿀꺽, 적막감이 흐르는 방 안. 목구멍 너머로 탐욕이 넘어가는 소리가 침묵을 깼다.
600개의 붉은색 칩을 모조리 먹어 치울 수 있다는 허상.
뿔 달린 산양은 다시 한번 허상에 발굽을 들이밀기로 마음먹었다. 이전에 느꼈던, 짜릿한 달콤함을 잊지 못한 채로.
“허허허, 이게 참 나이 먹으면 괜히 소화도 안 되고 속만 부대낀단 말이여.”
“행, 행님아? 지, 지금… 뭐 하자는 거고?”
“어허, 밤은 길고 즐거움은 계속되는 법이라신다야. 우리도 그니께… 그니께 말이여.”
털썩, 다시 의자에 앉은 이택규 전 사장. 손짓으로 딜러를 불러 환전 요청을 취소한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쬐금만, 쬐금만 더, 요 행운의 밤을 즐겨 보자고잉.”
* * * *
연이은 주사위 게임판.
벌써 여덟 바퀴째 돌아버린 판이 끝날 때쯤, 나는 문득 양평 낚시터에서 매운탕을 끓이던 김원철 아저씨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회장님아. 요 물고기라는 놈하고는 힘 싸움할 때, 꼭 아낙네들하고 연애한다 생각하고 해야 하는 겨.’
‘아니, 매운탕 끓이다 말고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아이, 참. 잘 들어봐봐. 다가가면 밀어내고, 밀어내면 다가가고. 밀당을 기가 맥히게 해야 한다, 이거 걸랑.’
밀당을 너무 잘해서 끝내 이혼 엔딩을 맞이하고 말아버린 김원철 아저씨.
아저씨의 개똥철학은 가스버너 아래로 매운탕 국물이 흘러넘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으아아아! 간다, 간다, 간다!”
일단은 그 말을 가슴 깊이 새긴 효과가 나타나긴 한 모양이었다.
떨리는 손을 주체하지 못하고, 곧바로 테이블 위에 주사위를 내던지는 이택규 전 사장.
지난 여덟 번의 게임에서, 나는 앞서 잃어 주었던 5억 원을 회수했다. 거기에 추가로 이택규 전 사장의 원금 5억 원까지도 전부 손안에 쥐게 된 상황.
“4! 6! 2! 산양 가면 고객님의 주사위 수 합은… 12입니다!”
“아흐… 쫌만 더 높았으면 참말로다가 안정적으로 좋았을 텐디.”
첫판 이후, 밀당 과정에서 나는 크게 잃지도 크게 따지도 않았다.
그저 가랑비에 옷 젖듯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이택규 전 사장의 약을 올리며 녹여낸 판돈.
그리고 마침내… 지지부진하던 힘겨루기에 전환점을 찍을 때가 다가왔다.
마치 춤을 추듯 유연한 몸짓으로 주사위를 섞는 유세나 보좌관. 나는 눈짓으로 그녀에게 판돈을 크게 올리라 지시했다.
“자꾸 게임이 루즈해지는 것 같은데, 멋진 신사분들께서 괜찮으시다면 베팅 금액을 조금 높여 볼까요?”
“아, 바라던 바요! 크흐… 역시 예쁘신 분이 뭘 좀 잘 아신다니까.”
퀭한 눈을 한 이택규 전 사장.
내가 설계해 둔 늪에 빠진 그는, 연이은 작은 패배로 인내심에 한계가 온 모양이었다.
어렴풋이 계산해본 결과, 그가 지금까지 본 순이익은 2억 원가량.
나는 유세나 보좌관만 볼 수 있도록 손가락 다섯 개를 조심스레 펴 올렸다.
“…5억씩 가는 것으로 할게요. 감당하실 수 있으시죠?”
“에헤이, 나를 뭘로 보고! 5억, 그까짓 거 바로 갑시다! 콜!”
귀는 이택규 전 사장의 말을 듣고 있지만, 시선만큼은 나를 향한 유세나 보좌관.
나는 오른쪽 무릎을 새끼손가락으로 긁기 시작했다. 아슬아슬하게 이기라는, 기존에 줄을 맞춰 두었던 신호였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천천히 다섯 번, 빠르게 세 번을 돌리고는, 하늘 위에서 내리찍듯 강하게 주사위를 내던지는 유세나 보좌관.
얼마 지나지 않아, 황홀한 결과가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곡선을 따라 눈앞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5! 5! 4! 토끼 가면 고객님의 주사위 수 합은… 14입니다!”
“으아아아아! 옘병! 꼭 저 토끼 언니하고 같이 붙으면 아주 피박만 쓴다니까!”
머리를 감싸고 괴로워하는 이택규 전 사장.
뿔 달린 산양은 어딘가 잘못된 곳에 발을 디딘 모양이었다. 힘차게 발굽을 대어 뛰어오르던 절벽 틈 사이는, 어느새 묘한 안개만이 약 올리듯 남아 있는 상황.
몽롱한, 뿌연 안개는 어디선가 천사의 모습을 하고 흔들리는 그의 앞에 나타나 말을 건네었다.
“저런, 벌써 판돈을 전부 날리셨나 봅니다. 아니, 대충 보니 손실이 제법 되시네요. 대략 3억 원 정도?”
“…….”
“아직 손이 근질근질한지라 다음 게임에서 기대가 컸는데… 정말 아쉽게 되었습니다.”
짤락, 무심한 손짓으로 산처럼 쌓인 칩을 만지작거리는 나.
나는 맨 위에 놓인 붉은색 칩 하나를 들고는 딜러를 불러 말했다.
“딜러? 저분들께 나가는 길을 안내해 주셨으면 합니다. 잃고 가시는 길이기도 하니, 여기.”
적선하듯 내던진 칩 하나.
세상 가장 모욕적인 목소리를 연기한 나는, 마치 조롱하듯 최대한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단어를 골랐다.
“부디 식사라도 맛있는 것으로 즐기시길. 이제 좀처럼 드시기 힘들 테니.”
손안에 붉은색 칩 하나를 꼭 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이택규 전 사장.
이제… 밀고 당기기를 끝내고, 마지막 힘을 잔뜩 줄 차례다.
탐욕에 지배당한 사람을 낚는 낚싯대를 꽉 쥐고 수면 아래를 응시하는 그 순간, 뿔 달린 산양 가면 아래에서 무언가 결심한 듯한 목소리가 조금씩 새어 나왔다.
“…판돈. 그거 꼭 현금만 가지고 해야 하는 것이유?”
“행님아! 지금 무신 생각을 하는 거고? 설마… 설마 어음 가지고 장난칠 생각은 아니제? 그렇제?”
“60억 원짜리니까, 깡 하면 수수료 까고서도 50억은 나온다.”
“미친 소리 하지 마라! 그러다 잃으면 서윤지 그 싸가지 없는 년한테 뭐라 말한 낀데!”
광기로 가득 찬 이택규 전 사장의 눈동자.
그런 그의 모습을 본 백덕규는 숫제 바짓가랑이까지 잡으려 들기 시작했다.
“하아, 덕규야. 너 지금 내 말 잘 들어라. 한 번만 말한다.”
백덕규를 향해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간 이택규 전 사장.
오늘 그의 입에서 나온 이 명언은, 내게 있어 향후 절대 무리수를 두지 않게 만드는, 마법의 호소력을 가진 그런 문장이었다.
“따서 갚으면 돼.”
“미친….”
“처음에 5억 가지고 10억을 만들었다. 근데 지금은? 마이나쓰 3억이여, 3억!”
가면을 조금 위로 올리고는, 작게 드러난 틈 사이로 담배를 입에 문 이택규 전 사장.
여러 개비를 연달아 피우고 나니, 그제야 조금 진정이 된 모양이었다.
엄지손가락 끝으로 내 쪽을 가리킨 그가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거기에… 이번 판 주자가 저 천사 가면이여. 더럽게 못 하는 놈이라니까?”
“그거야 그렇긴 한데…!”
“그러니까 이번 판으로 인생 역전한다. 너한테 돈 달라 말 안 할 테니까 입 닥치고 내가 하는 거 보고나 있어라잉!”
신경질적으로 눌러 끈 담배꽁초.
마침내… 뿔 달린 산양이 스스로의 걸음으로 제단 위에 올랐다.
자신이 휘두른 칼이 제 심장을 향해 찔러지리라는 상상은 감히 하지도 못한 채로.
“자! 어여 주사위 주소! 이번 판은 내가 선을 잡아야 쓰겄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