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주사위 게임(4)
분명 탄약 사나이는 신 따위에게 매달리지 않는다는 명언을 남겼던 이택규 전 사장.
그러나 요 몇 달 사이에 없던 종교라도 생긴 모양이었다.
눈을 감고 간절히 어딘가의 신에게 신실한 기도를 올리는 모습. 정말이지 요란하기 짝이 없을 정도였다.
“제발, 제발, 딱 한 번만 먹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앞으로 헌금도 잘 내고, 봉사도 잘 다니고….”
착한 사람이 되겠다며 굳은 결심을 입 밖으로 내뱉는 이택규 전 사장의 모습.
헌금은 잘 모르겠지만, 앞으로 봉사는 어지간히 많이 할 성싶다.
물론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봉사가 아니라… 그가 한때 몸담았던 탄약그룹에 대한 봉사겠지만.
“다 된 겁니까? 그 기도문 암송은?”
“에헤이! 천사 양반. 거, 부정 타게 자꾸 초를 치고 그러쇼!”
성난 황소처럼 콧김을 내뿜는 이택규 전 사장.
마침내, 결심을 끝낸 모양이었다.
바지춤에서 주섬주섬 끄집어낸 하얀 종이 한 장. 테이블 위에 쿵 소리를 내며 그가 그것을 거칠게도 올려 두었다.
“야, 딜러야! 여기 칩 600개 가지고 와라! 오늘 기도빨이 기가 멕힌다야!”
중국 현지 업체에 지급해야 할, 추정가액 60억 원 상당의 어음.
멈출 줄 모르고 부풀어 오른 욕망의 폭주. 내가 바라던… 마지막 퍼즐 조각이 지금 이 순간 맞추어졌다.
“행님아, 그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봐라. 한 큐에 다 걸지 말고 좀 나눠가가….”
“시껌마! 이번 걸로 이제까지 꼴았던 것 싹 다 만회할껴. 그리고.”
들릴 듯 말 듯, 애써 목소리를 낮추어 내 쪽을 가리키는 이택규 전 사장.
한쪽 팔로 올가미처럼 백덕규의 어깨를 거머쥔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확신으로 가득 찬 억지였다.
“네가 말했잖냐. 저 새끼 호구라고.”
“호구… 이기는 하제. 점마가.”
“그래. 이제까지 저 천사 가면 놈아가 낸 숫자, 죄 1, 2, 3 이딴 하빠리들 말고는 없었다고. 그러니까!”
거친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내뱉은 그의 모습.
겉에 걸친 뿔 달린 산양 가면은 잠시 들썩거렸다. 앞으로 일어날 파멸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한 채로.
“무조건 이길 수 있어야. 반드시.”
“아니, 그…!”
마지막까지 말리는 백덕규를 뒤로한 채, 광기에 사로잡힌 채로 주사위가 담긴 컵을 든 이택규 전 사장.
술에 취한 망나니가 무딘 칼춤을 추듯, 하늘 위로 뻗은 그의 손이 요란한 춤사위를 그리기 시작했다.
“간다! 간다! 제발 쫌 가즈아! 크하아아압!”
* * * *
테이블 위에 내동댕이쳐진 주사위의 움직임 또한 요란한 몸짓만큼이나 격렬하기 짝이 없었다.
데구르르, 녹색 천 위를 거칠게 구르며 제자리를 찾아가는 세 개의 주사위.
뭉툭한 모서리 끝에 걸친 균형점은 보는 사람이 약이라도 바싹 오르게 할 모양인지, 극과 극의 숫자를 두고 꼭 샅바 싸움을 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툭, 단말마가 끊어지듯 제 위치에 멈춰 선 주사위.
상아를 깎아 만든 주사위 위, 루비를 박아 넣은 눈에는 행운의 여신이 마지막 자비를 베풀어 주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5! 5! 그리고… 6! 산양 가면 고객님의 주사위 수 합은 16입니다!”
16이라는 숫자와 함께 찾아온 적막감.
이제껏 아홉 판의 주사위 게임에서 나온 것 가운데, 역대 최고로 높은 숫자.
자신이 만들어낸 숫자가 믿기지 않은 것일까? 핏발 선 목의 떨림만이 가득한 이택규 전 사장.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울 때가 되어서야, 갑자기 터져 나온 환호성.
“우아아아아아! 16! 덕규야 봤냐? 16이라고, 16!”
백덕규를 얼싸안은 채, 마치 당장이라도 승리한 듯이 울부짖는 그의 모습.
당장이라도 도합 1,200개의 붉은색 칩을 모두 가져갈 것만 같은 이택규 전 사장의 품에서, 백덕규는 거친 숨을 토해내며 입을 열었다.
“켁켁… 하이고, 행님아. 차라리 내 심장을 떼어다 팔지 그러소.”
“얌마! 저거 다 먹으면 120억 원이야! 원금 까도 60억 원 이득!”
온 카지노를 떠들썩하게 만들 정도의 고함.
저 광란의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토끼 가면을 쓴 채로 살며시 내 옆으로 다가와 귓속말을 건네는 유세나 보좌관.
“회장님, 이제 정말 어쩌실 거예요. 생각보다 높은 숫자가 나온 걸요….”
“걱정이라도 해 주는 겁니까?”
“하아, 어떻게 안 할 수가 있겠어요. 아무리 회장님께서 주사위를 잘하신다 한들… 실수 한 번에 물거품이 되는 건데.”
불안한 듯, 내 소맷자락을 잡은 채로 염려의 말을 건네는 유세나 보좌관.
긴장이 역력한 것인지, 그녀의 입술에는 새빨갛던 립스틱 색이 옅어졌을 정도였다.
“괜찮습니다. 걱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잡혀 있던 소맷자락을 털어내며 입 밖으로 내뱉은 확신.
미처 거두지 못한 유세나 보좌관의 손이 요구하는 물음에 내가 대답했다.
“지금부터… 눈으로 보여드리죠. 이길 수 있다는 것을 가볍게 입증하고 오겠습니다.”
뚜벅거리는 구둣발 소리와 함께,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선 나.
아직도 환호성에 젖어 있는 뿔 달린 산양과 뱀은 나를 보고는, 당장 승리라도 한 것처럼 으스대기 시작했다.
“하이고, 우리 천사님아. 도박판에서 헌법보다 높은 게 낙장불입인 것은 알고는 있쥬?”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산양 가면님께 지금 마지막 기회를 드리도록 하지요.”
“마지막… 기회?”
무슨 말을 하는지 당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의 이택규 전 사장.
내 손 위에 올려진, 주사위 세 개를 담은 컵.
마치 또 다른 손이라도 되는 것마냥, 자유자재로 컵을 빙빙 돌리며 내가 입을 열었다.
내가 가진 모든 확신을 주사위에 한가득 담은 채로.
“이제부터 나는 6, 6, 6 퍼펙트를 만들 겁니다. 이 컵에 담긴 주사위가 테이블 위로 쏟아지는 순간.”
피식.
6, 6, 6. 도합 18의 퍼펙트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내 말에 코웃음 치는 이택규 전 사장.
이제껏 낮은 숫자의 악운만을 보여 주었던 나였기에, 그는 내 호언장담이 그저 허세에 불과하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하! 퍼펙트? 아, 그래, 그래. 그래서 그 순간, 뭐 어쩌겠다는 것이여?”
“당신이 쓰고 있는 뿔 달린 산양 가면, 그건 더 이상 하늘에 맞닿은 산꼭대기를 향해 솟아오름을 의미하지 않을 것입니다.”
뿔 달린 산양은 아직 모를 것이다.
한발 한발 바위벽을 타고 오른 산꼭대기에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제단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제단 위, 칼을 든 천사는 곧바로 펄떡이는 심장을 꺼내어 앞으로의 미래를 기리는 제물로 삼을 것까지, 전부.
“그저 제물. 속죄를 위한 한낱 피 묻은 제물이 될 터.”
다른 쪽 손으로 테이블을 쓸어 만지는 나.
마호가니 나무의 촉감이 그대로 손바닥에 전달됨과 동시에, 가면을 사이에 둔 두 사람의 눈동자가 한데 마주쳤다.
“이제 선택하시지요. 이 게임, 계속하시겠습니까?”
“이 양반이 아까 뭘 잘못 잡쉈나 보네잉. 야, 딜러야! 너 방금 음료수에 무신 세제라도 탔다냐? 여그 천사님 왜 이러신디야?”
아예 거칠 것이 없다는 양, 자신이 가진 모든 칩을 무너뜨리면서까지 테이블 중앙으로 밀어 넣는 이택규 전 사장.
가슴팍을 주먹 망치로 쾅쾅 치며, 그가 마지막 유언을 덧붙였다.
“쫄리면 곱게 뒤지시구랴. 나는 무조건으로다가 빠꾸 없이 직진 뿐이니.”
그리고 나는… 이제 그 유언장을 집행할 뿐이다.
“이 선택은 당신이 한 겁니다. 이 말, 절대 잊지 말고 반드시 기억하고 계십시오.”
* * * *
“처음은… 아주 가볍게 세 번.”
잘 정돈된 주사위를 흔드는 경쾌한 느낌.
곧바로 반대 방향으로 손목을 돌린 나는 팔에 힘을 가득 주어 강한 반동을 주었다.
“그리고 빠르게 다섯 번!”
타닥타닥, 마치 모닥불 타오르는 소리처럼, 컵 안에서 자기들끼리 부딪히며 회전하는 세 개의 주사위.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는 이 거친 움직임에 온 신경을 기울였다.
무작위적인 확률에 의존하는 것이 아닌, 철저히 손끝에서 느껴지는 계산된 감각을 느끼며.
“위아래로 두 번 흔든 후… 바로 지금!”
거친 움직임과는 전혀 반대로, 마치 꽃잎이 연못 위로 사뿐히 내려앉는 듯한 주사위의 움직임.
톡, 톡, 상아 재질 특유의 가벼운 튕김이 두어 차례 있고 난 후, 마침내 붉은 루비 여섯 개가 박힌 주사위 면이 하늘을 향해 외치고 있었다.
가장 높은 수, 세 개의 주사위 모두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다고.
“아아….”
흔치 않은 결과에 잠시 말을 잃은 카지노 딜러.
멍하니 테이블만을 바라보던 그는, 내가 턱 끝으로 작게 주의를 주고 나서야 비로소 맥 빠진 목소리로 결과를 외치기 시작했다.
“허어… 결, 결과 발표하겠습니다. 이번 주사위 게임 최종 결과는 6! 6! 그리고… 6! 천사 가면 고객님의 주사위 수 합은 18, 퍼펙트입니다!”
최종 선언을 내린 딜러의 목소리.
언제 다가온 것인지, 내 옆에는 유세나 보좌관의 얼떨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퍼펙트가 나왔어. 회장님, 도대체 이걸 어떻게….”
“내가 말했지 않습니까. 걱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얼이 빠진 것은 유세나 보좌관만이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던 이택규 전 사장.
오금에 힘이 풀리기라도 한 모양인지, 그는 아예 바닥에 두 무릎을 꿇고는 이내 땅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건… 이건, 말도 안 돼. 이럴 수는, 이럴 수는 없어….”
수염 자국이 짙은 그의 턱으로 흘러내리는 투명한 액체. 식은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그것은 뚝뚝 소리를 내며 카펫을 조금씩 적시기 시작했다.
마치 과한 탐욕이 그의 모든 것을 빨아 마시듯이.
“이제 선택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실 시간입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미 사라져 버린 백덕규.
도저히 답이 없는 상황에서, 그는 빠른 손절을 결정한 듯했다.
마침 잘되었다.
외부인도 없기에 더는 눈치 볼 것도 없는 순간.
딜러를 방 밖으로 보낸 나는, 곧바로 바닥에 꿇어앉은 이택규 전 사장의 앞에 다가가 입을 열었다.
한 손에는 펄럭이는 새하얀 어음 용지를 쥔 채로.
“SA-철화 테크윈의 어음 60억 원. 다른 말로는 이택규, 당신의 목줄.”
“천, 천사님…? 당신 도대체 누구여?”
멍하니 입을 벌리고는 간신히 고개를 드는 이택규 전 사장.
내가 누구냐고 묻는 말에 나는 그저 천사 가면을 벗어던지는 것으로 대답해 주었다.
제단 위, 심장이 뽑힌 채로 단말마를 내뱉는 뿔 달린 산양.
꺼져가는 생명의 불씨가 순간적으로 타오르는 것처럼, 가면 아래 그의 눈동자가 갑작스레 커지기 시작했다.
“오래간만입니다. 이택규 전 사장. 이역만리 타국에서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한, 한서준… 회장!”
숫제 팔다리를 벌벌 떠는 그의 앞에 쪼그려 앉은 나는 어음 용지를 흔들며 말했다.
지옥으로 가는 열차에 올라탄 그가, 당장이라도 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안에 대해서.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