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배신을 배신하는(1)
서울, 탄약그룹 본사 꼭대기 층.
다시 돌아온 한국, 휴가 아닌 휴가를 마치고 다시 시작한 업무에서 처음으로 들은 말은 김원철 아저씨의 모 영화 대사 성대모사였다.
“예림이! 그 패 봐봐! 혹시 장이야?”
졸지에 여자 타짜가 되어 버린 유세나 보좌관을 놀리느라 정신이 없는 김원철 아저씨.
안 그래도 광저우에서 고통 아닌 고통을 받고 온 그녀는, 평소와 달리 아저씨의 놀림에 감정적으로 반응했다.
“하… 일단 제 이름은 예림이가 아니고요. 가서 화투도 친 적 없습니다. 비서실장님.”
“어따, 이거 선수끼리 살벌하게 왜 이러셔? 혹시 오늘 내 손모가지… 오함마로 뭉개지거나 그러는 건 아니지?”
“…설비팀 연락해서 진짜 가지고 오라고 할까요?”
싸움 구경은 재미있기로는 한 손으로 꼽을 것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일단은 업무를 해야 하니까.
나는 서랍에서 빨간 상자 하나를 꺼내어 영화배우 지망생 김원철 아저씨에게 건네었다.
“일단 싸우시는 것도 뭐라도 드시면서 하시죠.”
“뭣이여, 이건? 냄새가 보통 것이 아닌데.”
“육포요. 중국 육포. 올 때 사달라고 하셨잖습니까.”
“오! 나 육포 너무 사랑하지. 이혼한 마누라보다 훨씬 더.”
입안에 먹을 것이 들어가고서야 비로소 찾아온 집무실의 평화.
자기 할 일을 하러 떠난 유세나 보좌관을 보내고, 나는 김원철 아저씨와 함께 육포를 씹으며 보고 시간을 가졌다.
“그래서, 국방부 신무기 사업 건에 대해서 보고하실 게 있다고요?”
“일단, 전체 와꾸는 이쁘게 나왔어. SA-철화 테크윈 쪽하고 비교해도 전혀 꿀리진 않아. 문제는.”
입안에 질겅거리는 육포를 먹어 치운 후, 곧바로 내게 보고서 요약본을 보여 주는 김원철 아저씨.
철화 반도체 인수 후, 문제가 되었던 생산 설비 분야 쪽은 이제 충분히 보완된 상황.
이런저런 부분들을 모두 비교한 결과, 사업을 진행하는 데에 있어 아무런 걸림돌조차 없게 되었다.
그저 평탄한, 나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까지도 너무나도 평탄하기만 한 길이 놓여 있을 뿐.
“그쪽도 우리랑 비교했을 때 꿀릴 게 없다는 거지.”
“획기적인 차이점은 없으니, 그럴 법도 하지요.”
“결국, 한 끗 차이로 결정될 것 같걸랑. 유세나 보좌관이 좋아하는 화투처럼.”
그저 나를 따라 주사위만 몇 번 던져보았을 뿐인데, 졸지에 타짜 타이틀을 얻게 된 유세나 보좌관.
나는 앞에서 낄낄거리는 대머리 초등학생에게 잠시 신경을 끄고 홀로 생각에 잠겼다.
변별력이 없는 시험.
그러나 주관식 논술형인 시험.
결국, 이번 사업… 아주 눈에 띄는 차이점이 없는 한, 출제자와 채점자의 손가락 놀림에 따라 당락이 결정될 판이다.
“국방부 쪽 높으신 영감님들 손가락질에 따라 희비가 확 달라지게 생겼네요.”
“그런 셈이지. 이젠 어느 정도 로비 없이는 택도 없어야.”
“로비라….”
“왜? 좀 마음에 안 드나?”
별로 선호하는 수단은 아니긴 하지만, 필요하다면 사용할 수밖에.
때마침, 적절한 빨대 하나도 있다.
지난번, 사우디 쿠데타 당시 급격히 내 쪽으로 태세 전환을 이루던 국방차관.
당시 예상 매출액 90조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방산 수출액에, 그는 지금도 내게 호의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상황.
“일단, 국방차관 쪽 통해서 국방부 내부 동향을 좀 살펴보세요. 파벌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의사결정권자는 어느 쪽인지 등등.”
“오케바리. 접수 완료.”
“기술 쪽이야 미셸 푸코 사장이 충분히 잘 해내고 있으니 더 신경 쓸 것도 없겠네요. 일단 이쪽 방향으로 가는 걸로 합시다.”
그렇게 마무리된 보고.
조금 피로감이 몰려와서인지, 소파에 깊게 몸을 묻은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육포로 향했다.
광저우 카지노가 있던 호텔에서 사 온, 윤기 나는 붉은색 육포로.
“맛있긴 맛있네요.”
“끝내준다니까. 이거. 먹을수록 기가 멕힌다야.”
“한 박스 더 있으니 원 없이 드셔도 좋습니다. 어차피 다 이택규 전 사장 돈으로 산 것이니까요.”
“아, 맞다. 이택규 그 양반, 그래서 어떻게 된 겨?”
피식, 그날 있었던 일을 생각하니 새어 나오는 웃음.
내가 아무 말 없이 부처님 같은 미소만 얼굴 위에 띄우고 있자, 김원철 아저씨는 궁금증으로 몸이 달아오른 모양이었다.
“개 목걸이 하나 큼지막한 걸로 채워 놓았다. 뭐 그렇게 생각하면 되는 거지?”
“어디 개 목걸이뿐이겠습니까. 좀 더 미래지향적인 IT 산업 관점으로 접근해 보시죠.”
낄낄거리는 웃음으로 어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보라며 강력하게 요구하는 김원철 아저씨.
씹고 있던 육포가 목구멍으로 넘어간 후, 나는 천천히 그때 있었던 비하인드 스토리를 조금씩 꺼내기 시작했다.
멋모르고 바위산을 오르던 뿔 달린 산양을 어떻게 길들였는지에 대해서.
“행동 통제용 칩 하나를 박아 놓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절대 거스를 수 없는 첨단 기술로 만든.”
* * * *
광저우 카지노.
테이블 한가운데 붉은색 칩과 함께 놓인 어음 용지를 집어 들었던 나.
당장이라도 눈앞의 배신자를 단죄할 천사 가면을 벗어던진 나는, 맨얼굴로 이택규 전 사장의 앞에 어음 용지를 흔들었다.
“오래간만입니다. 이택규 전 사장. 이역만리 타국에서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한, 한서준… 회장!”
그는 어지간히도 당황한 모양이었다.
새하얗게 변한 머릿속을 겉으로 드러내기라도 하듯, 멍한 표정으로 입가에 흐르는 침방울.
꿇고 있던 무릎은 머리의 통제에서 한참 벗어나기라도 한 건지, 사시나무처럼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아니, 그… 회장. 아니지… 회장님께서 여긴 어째서….”
“내가 굳이 여기까지 왜 왔겠습니까? 배신자 처단하러 온 게 아니라면 말이지.”
배신자와 처단.
내 입에서 그 두 단어가 나오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땅으로 처박는 이택규 전 사장.
태세 전환도 참 빠르다 싶은 것이, 어느새 그는 머리 위로 두 손을 기도하듯 곱게 모아 파리 흉내를 내듯 싹싹 빌고 있었다.
“제가, 제가 잠시 미쳐서 말입니다. 제발 회장님, 옛정을 생각하셔서 딱 한 번만 기회를 주시면…!”
“일단 고개부터 들죠. 내 눈 똑바로 보고 말합시다.”
간신히 머리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는 이택규 전 사장.
죽고 싶지 않은 뿔 달린 산양. 나는 어린아이 손목만큼 굵은 밧줄을 그의 목에 걸었다.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습니까?”
“회장…님? 그게, 그러니까… 아!”
그동안 쌓아두었던 눈치는 어디 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곧바로 기합이 잔뜩 들어간 우렁찬 목소리로 내게 차렷 자세를 취하는 그의 모습.
“한 번만 기회를 주신다면! 한 번만 살려 주신다면! 사나이 이택규, 오로지 회장님만을 위해 이 한 몸 불사르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지요.”
백색의 어음 용지를 반으로 접어 양복 재킷 주머니 안으로 집어넣은 나.
방금 전까지 주사위를 던지던 테이블 끄트머리에 걸터앉은 나는, 이택규 전 사장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광저우에서 있었던 일. 전부 다 털어놓을 것. 그리고 앞으로 SA-철화 테크윈이 광저우에서 어떤 행보를 보일 건지를 보고할 것.”
눈을 질끈 감은 채로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는 배신자.
마지못해 모든 것을 수락한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나는 주사위 룸 바깥으로 유유히 걸어 나갔다.
마지막 당부의 말을 남긴 채로.
“그 두 가지만 제대로 한다면, 이 어음 쪼가리가 당신의 목을 조를 일은 아마 없을 겁니다.”
* * * *
인천국제공항.
입국장 앞에는 사진기를 든 기자들이 한데 모여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행색으로 보나, 외모로 보나 아이돌을 기다리는 연예부 기자와는 거리가 먼 그들.
“왜 이렇게 안 나오는 거지? 선배, 세관이나 출입국 관리본부에 뭐 빨대 같은 거 있나?”
“기다려 봐 임마. 어디 뭐 또 마약 검사라도 하나 보지. 워낙에 또… 어마어마한 여자잖냐. 어! 나온다, 나온다!”
스르륵, 자동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들리는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
검은색의 큰 선글라스를 낀 서윤지는 순식간에 기자들에게 둘러싸였다.
“서 대표님! 간통 및 마약 혐의와 관련해서 전관 변호인단을 선임하신 이유가 뭡니까?”
“SA그룹 임재호 부회장과의 이혼설이 돌고 있는데요, 이것과 관련해서 따로 하실 말씀은 없으신지요!”
터져 나오는 카메라 플래시.
한쪽 손을 들어 빛줄기를 막던 서윤지는 이내 어정쩡한 높이의 팔을 높이 들어 올렸다.
갓 구운 빵처럼 방금 막 만들어낸 가짜 미소를 입에 건 채로.
“어머! 여보, 오셨어요?”
곧바로 반대로 돌아가는 기자들의 목.
그 끝에는 아내를 마중 나온 남편 역할은 연기하는 임재호 부회장의 모습이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지. 어서 가자고.”
간통과 불륜, 이혼이라는 주홍글씨가 낙인처럼 따라다니는 것과는 전혀 상반된 그들의 모습.
주위를 둘러싸고 연신 질문을 던져대는 기자들을 따돌린 후, 차량에 탑승한 그들의 가면이 벗겨지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후, 내가 이딴 싸구려 짓을 해야 하는 이유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군. 그것도 몸뚱이나 함부로 놀리는, 매춘부 같은 년을 위해서.”
“몰라서 물어? 내 이익 절반. 당신 이익 절반. 설마 이제야 역겨운 사랑 타령이나 하면서 신파극 찍을 생각인 건 아니겠지?”
고강도의 광저우 일정 탓에 피곤한 모양인지, 가시 섞인 남편의 말에 똑같이 응수하는 서윤지.
빠드득, 굳은 표정으로 이를 갈던 임재호 부회장은 주먹을 쥐고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주둥아리 함부로 놀리지 말고, 무혐의 처분이나 똑바로 받아 내. 네년을 위해서가 아니라, SA그룹을 위해서.”
“전관 변호인단 꾸렸으니 걱정할 것은 하나도 없어. 그딴 시답잖은 것보다는 광저우 건이 더 중요하지 않나?”
새로 칠한 네일아트가 그려진 양손을 기지개 켜듯 쭉 펴는 서윤지.
그녀는 광저우에서 얻어낸 성과가 나름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비록 빈 껍데기뿐인 반도체 회사. 하지만, 국방부 신무기 개발 사업이라는 목표에 부합하는 일회용품의 개념으로 접근한다면 손익이 딱 맞아떨어졌다.
“제법 견실한 회사야. 당신이 걱정할 필요는 하나도 없는.”
“…차후에 확인토록 하지. 신무기 개발 사업 입찰이 끝난 후에.”
“그러시던가. 아무튼, 이번 일에 당신과 SA 그룹 전체의 위상도 걸렸으니, 지원사격을 아낄 생각일랑 하지도 말고.”
룸미러 너머로 비치는 남편 아닌 남편의 모습을 보고 빙그레 웃음 짓는 서윤지.
SA 그룹 본사에는 일절 쓸모없는, 오히려 적자만 눈덩이처럼 만들어 낼 광저우 반도체 회사.
그러나… 서윤지는 알고 있었다.
임재호 부회장이 이 회사에 대해 깊게 파고들 때쯤은, 이미 그녀가 원하는 모든 과실을 다 따간 후라는 것을.
-지이이이잉!
“어, 나야. 괜찮으니까 말해. 중국? 광저우? 잠깐, 지금… 뭐라 했지?”
하지만, 만족스러움이 가득 묻어난 그녀의 몸짓은 이내 걸려 온 전화 한 통화로 인해 굳어지고 말았다.
마치 뒤돌아서면 안 될 곳을 향해 돌아버린, 석고상이 된 여인처럼.
“그게 무슨 소리야! 공장 가동이 중지라니! 거기다 이택규 그 새끼는 왜 사라진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