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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의 핵몽둥이-89화 (89/300)

89화배신을 배신하는(2)

가로등 불빛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칠흑 같은 어둠만이 짙게 깔린 그믐달 밤.

균열 난 시멘트 바닥을 박차는 거친 발걸음 소리.

광저우 IT 산업단지 인근 항구. 중절모를 푹 눌러쓴 중년의 사내 하나가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골목길 사이사이를 황급히 뛰어다니고 있었다.

“헉, 헉, 헉… 아이고, 나 죽네. 이런 미친, 또라이 회장놈 같으니…! 이거 생각할수록 개똥 같네, 진짜!”

불평불만을 내뱉다가도 혹여나 누군가 목소리를 들을세라 황급히 자신의 입을 틀어막는, 어음 사기꾼이 된 이택규 전 사장.

도망자 신세인 그는 현지 업체 사장들에게 잡히는 순간, 곧바로 인체의 신비전에 나와도 이상할 것이 없을 터였다.

“옘병… 뭐? 말만 잘 들어 먹는다면, 어음 쪼가리가 내 모가지를 조를 일이 없을 거라고?”

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지난 몇 주간 이중간첩 노릇을 톡톡히 해왔던 이택규 전 사장.

째깍거리는 시한폭탄의 초침처럼, 점점 다가오는 어음 지급일. 조급해진 마음에 국제전화를 건 그가 건네었던 물음.

‘저… 위대하신 탄약그룹의 지도자이신 한서준 회장님. 혹시 그때 가져가셨던 어음 관련해서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싶습니다만….’

‘아아, 그거.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충실한 이택규 첩보 요원을 토사구팽할 정도로 내가 그렇게 잔혹한 사람은 못 됩니다.’

말 같잖은 개소리 집어치우고 어음이나 빨리 달라는 외침을 목구멍 끝에서 간신히 막아내었던 이택규 전 사장.

이윽고, 인내심을 꾹꾹 눌러 두었던 그의 귓가에 황망한 내용의 대답이 들려왔다.

‘동남아 쪽으로 가는 배편을 마련해 두었으니 그거 타고 가시면 됩니다.’

‘아니, 회장님! 동남아라니요? 그거 광저우 현지 업체들한테 어음 대금을 못 지급하면 분명 폭동이…!’

‘일어나겠죠. 아주 거세고 가열 찬 폭동이.’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는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

곧이어, 마지막 지시가 내려왔다. 따르기는 싫지만, 도저히 따르지 않을 수는 없는 지시가.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이택규 씨, 광저우 IT 산업단지에서 도망치세요. 저쪽 사람들의 약을… 아주 바싹 올려놓은 채로.’

풍덩, 부두 앞 바닷가 한가운데 뛰어든 이택규 전 사장.

그는 자신을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만든 회장을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부우우웅!

그렇게 한참을 물속에서 추위에 벌벌 떨고 있던 찰나, 그의 앞으로 다가온 고무보트 한 척.

마스크를 쓴 신원미상의 남성이 말을 건넸다.

“뿔 달린 산양?”

“예. 천사님 지시받고 왔수다.”

“얼른 올라타시오. 탄약그룹 화물선으로 데려다주겠소.”

해병대 장교 시절 숱하게 올라탔던 고무보트. 그 위에서 오들오들 떨며 광저우 쪽을 바라보는 이택규 전 사장.

그 순간, 어스름한 전깃불 사이로 솟아오르는 불꽃 하나. 분노 섞인 고함과 함께 타오르는 익숙한 그곳을 보며, 그가 무어라 홀로 중얼거렸다.

“니기미, 개떡 같은 놈. 결국엔 죄 제 놈 뜻대로 되기만 하고. 에휴, 에라 모르겠다.”

* * * *

SA-철화 테크윈 본사.

차에서 내린 채, 엘리베이터를 향하는 서윤지는 시종일관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와 함께, 그녀는 자신의 엄지손톱을 물어뜯으며 뒤따라오는 비서에게서 보고를 받았다.

“수리해 둔 반도체 생산용 기계 장치 절반 이상이 파손되었습니다. 아마… 복구에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듯합니다.”

“외국에서 싸구려 기기라도 사 가지고 와! 어디 고물상에서 굴러다니는 것도 상관없다고 말했잖아!”

쿵!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주먹 망치로 옆면 거울을 내려찍는 서윤지.

가늘게 금이 간 거울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보였다.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이내 묵묵히 제 할 일을 마저 해나가는 서윤지의 비서.

“…공장 출입구부터 자재 창고까지 이어진 통로 또한 화재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하! 화재? 그건 또 뭐야?”

“폭동를 빙자한… 현지 업체 측이 지역 폭력조직을 써서 분풀이로 저지른 듯합니다. 어음 대금을 지급받지 못해서….”

분명 자신 앞에서 개처럼 기어 다니며 어음을 받아 냈던 이택규 전 사장.

순간 서윤지의 눈동자에 켜진 불꽃 한 쌍.

그 능글맞은 모습을 떠올리니 화가 치밀어 오른 모양이었다. 깊게 숨을 토해낸 그녀는 관자놀이를 매만진 채로 비서에게 명령했다.

“이택규 그 개새끼. 당장 찾아와. 최대한 살려서 오되, 그렇지 않으면 목이라도 따 오라고 해!”

“예. 대표님. 정보팀에 그렇게 지시하도록 하겠습니다.”

충혈된 눈으로 집무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서윤지.

타오르는 속을 찬물로 진정시킨 그녀의 눈에 책상 위에 놓인 보고서가 보였다.

<국방부 신무기 개발 사업 입찰 계획안>이라고 적힌 보고서. 그녀는 이번 광저우 사건으로 인해 더는 쓸모가 없어진 보고서를 두 손으로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이딴 쓰레기 같은 것…! 이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잖아!”

하늘 위에서 눈꽃이 내리듯 바닥에 나뒹구는 흰 종잇조각.

설원을 걷는 것처럼 종잇조각을 발로 짓밟던 서윤지는 모든 분을 토해내고는 창가 앞에 섰다.

“후우… 이제 남은 수는 국방부 영감탱이들을 구워삶는 것 외에는 없겠어.”

그 어떤 방해 공작에도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국방부 신무기 개발 사업.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철화그룹과 SA그룹 사이에서 서윤지라는 개인의 입지를 다지는 것.

습관처럼 손톱을 깨물던 그녀는 전화기를 들어 이번 프로젝트의 총책임자를 연결했다.

“나야. 잘 들어. 이번 건, SA 측에서 절대 깊게 알지 못하게 해야 해.”

“그게… 본사 보고 체계라는 것이 있는지라, 아무래도 곤란할 성싶습니다만….”

“이봐, 당신한테 먹이 주는 손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곤란함이 가득 담긴 만류.

그에 비례한 서윤지의 격노에 총책임자는 결국, 그녀가 원하는 해결방안을 물으며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허면,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하, 이 멍청한 새끼! 사고 난 것은 최대한 은폐하고, 공장은 잘 돌아가는 것처럼 꾸미든지 하란 말이야!”

분명 차후에 불거질 수밖에 없는 문제. 필히 총알받이가 될 운명인 총책임자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어지는 서윤지의 협박에, 자신은 이 수렁에서 도무지 발을 뺄 수 없다는 것을 느끼며.

“이번 일. 제대로 못 해낸다면, 나도 죽고 당신도 같이 죽어! 아니, 당신도 꼭 같이 죽게끔 만들 거야. 알겠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끊긴 전화.

급한 불을 끈 서윤지는 습관처럼 서랍을 열어 담배 한 개비를 꺼내었다.

독한 궐련을 입가에 문 채로, 몽롱한 회색빛 연기를 내뿜던 그녀는 치마 주머니에서 무언가 금속제 물건 하나를 꺼냈다.

반짝이는 황금으로 만든, 원형의 펜던트 하나.

“영감이나 애새끼나 결국 이렇게 가 버렸고… 나도 긴장이 풀리면 아차 하는 순간 따라가겠지?”

딸각, 손톱으로 펜던트 입구를 열자 보이는 사진 한 장.

손때 묻은 그 사진 속에는 그녀에게 있어 애증 어린 두 사람이 들어가 있었다.

이미 세상을 떠난 고(故) 서국철 철화그룹 회장. 그리고… 그와 함께 다정한 모습으로 옆에 선 배다른 남동생 서윤석 군.

“언니 년들도 어지간히 독해. 영감 죽인 걸로도 모자라서 애새끼까지 보내려 하고.”

최근 묘연한 자동차 사고로 인해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남동생.

철화그룹의 왕관을 이어받을 이가 침대 위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 지금, 상속을 둘러싼 분쟁은 장기전으로 접어든 상황.

고(故) 서국철 회장의 유품인 펜던트를 꽉 쥔 서윤지의 입가에 웃음이 덧씌워졌다.

“상황은… 좋다. 계속 오래도록 싸우면 종국엔 내가 이길 수 있어.”

필터 끝까지 타버린 담배꽁초.

서윤지는 따로 재떨이를 찾지 않았다.

그저 무심하게, 펜던트 사진 위 덧씌워진 유리 위에 벌건 꽁초를 지져 끄는 그녀.

욕망을 뛰어넘은 광기는 이젠 서윤지의 몸속에서 내보내려야 내보낼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번 국방부 신무기 건으로 입지를 다지면… SA그룹이 들고 있는 철화그룹 지주사 지분. 내 손에 들어올 기회가 반드시 찾아올 테니까.”

결의를 마친 서윤지.

불같이 격노하던 모습은 어디로 간 것인지, 그녀는 콧노래를 부르며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어머! 장관님 오래간만이에요. 너무 인사를 드문드문 드렸던 것 같아서 어쩌죠?”

구불구불한 전화기 선을 손가락으로 꼬며, 교태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여는 그녀.

책상 위에 놓인 손거울을 보며, 입술에 붉은 립스틱을 칠함과 동시에 서윤지가 눈웃음을 지었다.

“이번 주 주말쯤에 한 번 뵈어요. 꼭… 드리고 싶은 말씀도 있고. 드리고 싶은 것도 있고.”

* * * *

용산 국방부 청사 근처의 모 일식집.

정원 너머 별실에 따로 마련된 다다미방에서 나는 국방차관이 따라준 술을 들이켰다.

“좋네요. 향도 진하고 맛도 깊고.”

“허허허. 암만 이 술이 좋아 봐야, 나하고 우리 한 회장님 사이만 하겠습니까?”

은은하게 들려오는 샤미센 소리를 배경 삼아 다시금 술잔을 나누는 나와 국방차관.

지난 사우디 쿠데타 및 한화 90조 원 규모의 방산 분야 수출 이후, 그는 전적으로 나와 우호 관계를 맺어가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저도 차관님 같은 분께서 이 나라를 위해 승승장구하시기만을 바라고 있지요.”

“음? 이거, 이거. 한 회장님이 이렇게 립서비스하시는 분이 아닌데.”

무르익은 술자리에서 넌지시 던져보는 떡밥 하나.

차관 자리까지 허투루 올라간 것이 아님을 증명하듯, 눈썰미 좋은 그는 내 의중을 어느 정도 알아챈 모양이었다.

청자 도자기 주전자를 기울여 내 술잔을 채우는 국방차관.

“내 직접 도움을 드리고는 싶은데… 이것 참, 아직 직급과 능력이 일천하여 난망한 상황이에요.”

“큰 사업이니까요. 국방부 내부에서 알력 다툼이 있다는 것쯤은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허어, 단순히 국방부 내부 계파 투쟁 문제라면야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내가 한 손을 들자, 곧바로 멈춰버린 샤미센 연주.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껏 알아챈 악단들이 미닫이문 밖을 나서자, 그제야 국방차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거 우리 회장님께 도움이 못 되어 송구합니다.”

“저는 차관님이 가지고 계신 권한 이상의 성과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니 편히 말씀해보시죠.”

악공들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져, 귀에 들리지 않을 정도까지 말을 아끼는 국방차관.

안쪽 정원의 물받이용 대나무 통이 한번 앞뒤로 오가고 나서야, 차분하게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

“저와 장관과의 기존 관계에 굴러들어온 돌 하나가 균형추를 부수고 있습니다. 아마… 철화그룹 쪽 입김이 닿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굴러들어온 돌이라… 도대체 누굽니까, 그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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