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곳간을 노리는 쥐새끼들(2)
국립과학수사연구원.
흡사 냉동고에 가까운 시료 보관실에는 새하얀 가운을 입은 법의학자 두 명이 서 있었다.
평소, 다른 업무를 할 때보다 한층 더 진지한 모습.
손에 딱 들러붙는 라텍스 장갑을 낀 그들은, 서국철 회장의 사망과 관련한 증거물들을 조사하고 있었다.
“지금 이거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지? 여기 의무기록 이상하게 빠진 거?”
“뻔할 뻔 자 아니겠냐. 약리 반응 이렇게 나온 게 정상적일 리가? 백 퍼센트 상극끼리 일부러 섞었어. 아니면 의사가 머저리거나.”
탁, 탁. 책받침에 끼워진 의무기록지를 손가락으로 두들기듯 쳐대는 법의학자.
콧잔등 아래로 내려가는 검은색 뿔테 안경을 올려 쓰며, 그가 하던 이야기를 마저 이어갔다.
“근데 철화 의료원 내과 과장씩이나 달고 있는 양반이 머저리겠냐 이 말이야. 그럼 답은 뻔하지. 그 적통 딸년 둘.”
“크흐, 진짜 증권가 찌라시가 맞았네. 하여간, 독한 년들이여. 그놈의 돈이 뭐라고.”
“그놈의 돈이 조 단위로 가지면 뭐가 다르긴 한가 보지. 아무튼… 이제 슬슬 끝내자고.”
관련된 모든 자료를 정리한 두 사람.
밝혀진 진실과 내려진 결론을 주장하는 서명을 마친 그들은 인턴 직원에게 던지듯 서류를 건네주었다.
“헤이, 신삥.”
“예. 팀장님.”
“이거 바로 2층에 청와대 민정수석실 행정관 갖다 드려. 높으신 양반이니 안 찍히게 조심하고.”
가만히 선 채, 망설임과 함께 서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인턴 직원. 그는 대답 대신 조심스럽게 물음 하나를 덧붙였다.
“그… 민정수석실 말입니까? 위에 본부장님 결재는 안 맡으셔도 되는 건가요?”
“하이고, 이 친구. 이건 본부장님이 자기 거치지 말라고 하셨걸랑. 왜냐면.”
손가락을 들어 천장을 향한 법의학자.
자신이 서명한 이 문서가 앞으로 불러일으킬 파장을 의식한 그는, 재미있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어어기 위쪽 높은 곳에서 다이렉트로 시킨 일이걸랑. 파란 지붕 집 계신 높으신 분께서.”
* * * *
-우지끈!
굳게 닫혀 있던 철제 현관문이 떡대 좋은 검찰 수사관의 빠루질로 부서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펄펄 날리는 먼지구름을 뚫고 순식간에 철화그룹 본가 저택으로 난입한 사람들.
가죽 잠바를 입고 은팔찌를 든 그들은 보무도 우렁차게 서윤아·서윤미 자매에게 다가가 외쳤다.
“보자, 일단 왜 왔는지는 아실 테니까 패스. 묵비권은 행사할 수 있고, 변호사 선임이야 돈도 많으신 분들이니 알아서들 하실 거고.”
“당신 뭐야! 이런 미친 인간 같으니… 당장 이거 안 놔!”
찰싹, 들고 있던 효자손으로 수사관의 얼굴을 때려 갈기는 첫째 서윤아.
별다른 타격조차 없었다는 듯, 수사관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녀의 팔 한쪽을 뒤로 꺾었다.
“존속 살해에 특수 폭행 추가. 어지간하면 적당히 좀 합시다?”
“너 이 새끼! 네가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지? 절대 가만 안 둘 거야!”
“하이고. 거, 옆에 동생분은 상황 돌아가는 거 다 파악 끝내신 모양인데. 우리 좀 조용히 갑시다요. 응?”
이 난리 통에도 도도한 모습을 유지하는 둘째 서윤미.
수갑 찬 손목이 시린 모양인지, 양손을 꼭 맞잡은 그녀는 제 언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위쪽 똥파리 한 마리가 붙었나 보네. 핏줄도 천한 서윤지 그년이 꼴에 머리 좀 썼나 봐.”
“뭐? 잠깐만! 그게 지금 무슨 소리야!”
“목소리 낮춰, 언니.”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을 수용하기 힘든 것인지, 마구잡이로 고함치는 서윤아.
그런 언니에게 크게 기대할 것이 없다 여긴 모양이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제 언니에게 다가가 속삭이는 서윤미.
“언니는 그냥 입 닫고 있어. 나머지는 내가 싹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어… 어?”
“이거 윗대가리들 작업질 치는 거라고. 가서 괜한 말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면 될 거야.”
언니에게 할 말을 모두 끝낸 그녀.
황량한 들판처럼 변해버린 본가의 풍경을 눈에 담으며, 서윤미가 수사관에게 고개를 돌렸다.
머릿속으로는 수십여 가지 경우의 수를 홀로 가늠하면서.
“뭐 해? 안 가고? 검찰 수사관들은 원래 그렇게 굼뜬가?”
“…재벌가 딸내미들은 원래 다 이러는 건지 원. 뭐, 좋습니다. 슬슬 가 봅시다.”
* * * *
-철화그룹 상속 전쟁이 수면 위로 올라온 가운데, 서윤미, 서윤아 사장에 대한 검찰의 구속영장이 청구되었다는 소식입니다.
-검찰은 이들을 존속 살해죄를 포함한 다섯 개의 범죄 혐의로 기소할 것이라 밝혔습니다. 현장 연결하겠습니다. 최예나 기자?
-네! 최예나 기자입니다. 저는 지금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앞에….
삑, 귀여운 오리를 닮은 기자 한 명이 나오자마자 TV를 꺼버린 김원철 아저씨.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스타일의 기자이건만. 그런 것 따위야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듯, 아저씨는 곧바로 보고를 시작했다.
“거, 괜히 아이돌 걸그룹 닮은 기자 보고 헤벌쭉하지 말고, 이참에 현실 여자친구를 사귀라니까.”
“아시지 않습니까? 업무량 조절 없이는 탄약그룹하고 결혼할 운명이라는 것.”
지금과 같은 회장 독주 체제에서는 사실상 내가 곧 탄약그룹이다. 마치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말했던 것처럼.
목도한 위기를 넘기고 탄약그룹의 체질을 통째로 바꾸기 전까지는 강제 워커홀릭이 되어야만 하는 상황.
김원철 아저씨 또한 이 사실을 잘 아는 건지, 내 눈길을 피하고는 곧바로 어색한 듯 휘파람을 불기 시작할 정도였으니까.
“크흠, 업무량 조절… 은 당분간 힘들겠지. 아무튼, 이제 보고 시작한다?”
오늘도 어김없이 시작된 보고 시간.
팔락, 하나로 취합된 그룹의 모든 눈과 귀가 보고 들은 정보.
전체로 모인 것과 각각의 개별적인 것. 두 가지 모두는 마치 나침반처럼 단 하나의 지표만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번에 들이닥친 태풍의 눈 안에 윤학길이라는 자가 가장 가운데 있다는 것을.
“더욱 명확해졌네요. 윤학길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이 사람의 목을 쳐야 탄약그룹이 살아난다는 것을.”
“천천히 움직이는 편이 낫지 않을까? 아무래도 권력의 최고 중추에 서 있는 사람이잖아.”
“저도 방금까지는 그렇게 판단했는데, 안타깝게도 오리 닮으신 귀여운 기자님 때문에 그러지를 못하겠습니다.”
뜬금없이 나온 여기자 이야기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김원철 아저씨.
환한 대머리 위에 물음표 여러 개를 올려놓은 아저씨는, 머리를 굴리는 것을 그만두고 곧바로 내게 물음을 던졌다.
“뭔 소리여? 그건?”
“윤학길이가 급하게 움직인다는 것. 방금 최예나 기자가 보도했잖습니까.”
엄지손가락으로 까맣게 변해버린 TV 화면을 가리킨 나.
곧바로 하나씩 맞춰져 가는 퍼즐 조각에 대한 해설 아닌 해설이 이어졌다.
“철화그룹 서씨 집안. 하루아침에 저 개판이 나게 된 것. 말단 수사기관은 절대 못 합니다.”
“아…! 그렇네!”
그제야 비로소 고개를 끄덕이는 김원철 아저씨.
위치를 잘못 잡은 것인지, 머리가 앞뒤로 움직일 때마다 전깃불에 반짝이는 이마 자락.
나는 애써 웃음을 참으며 하던 말을 마저 이어나갔다.
“분명 뭔가 서윤지와 윤학길, 두 사람 사이에 딜이 있었겠지요. 철화그룹이라는 큼지막한 고깃덩이를 둘러싸고서.”
“그렇지. 그게 합리적이겠지. 가만있자… 그러면 이제 어찌한다?”
째깍째깍, 시곗바늘 움직이는 소리만이 집무실 안을 가득 메운 침묵의 방.
서로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거듭해도 영 나오지 않던 묘수는, 소파에 앉은 김원철 아저씨에게서 나왔다.
그것이 정말 묘수인 건지는… 나중에 가서도 잘 모르겠지만.
“손자병법이 이르길, 이럴 때는 약한 고리를 노리라 했느니라.”
“진짜 손자병법에 그런 게 쓰여 있습니까?”
“나도 몰러. 그냥 아무거나 내뱉은 말이지. 그런데… 이번엔 그게 맞는 것 같다야. 흐흐흐.”
와그작, 큼지막한 옛날 과자를 한 입 베어 문 김원철 아저씨.
곧바로 내 눈앞에 설탕이 잔뜩 묻은, 찐득찐득한 손가락 세 개가 펼쳐졌다.
“서윤지, 윤학길, 그리고 함풍덕 국방장관. 세 사람 중에 가장 약한 고리는 우리 함씨 아저씨 아니겠어?”
“뭐, 그야 그렇겠지요. 그런데요?”
“공략 대상을 노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또 가족을 먼저 포섭하는 거고. 그러니까 말이지.”
갑자기 찾아온 싸한 느낌.
분명 집무실 온도를 상당히 따듯하게 올려놓았건만, 불안함이 섞인 서늘한 느낌은 거침없이 내 등 뒤를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소개팅. 이참에 청춘사업 비슷한 것 한번 하자.”
순간,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온 유세나 보좌관.
나만큼이나 흠칫 놀란 그녀의 반응을 바라보며, 나는 김원철 아저씨에게 불안한 상상이 현실로 다가오지 않기를 바라며 물음을 던졌다.
“설마… 함 장관 가족이라면, 혹시 제가 생각하는 그 여자?”
“흐흐흐. 마귀할멈은 나한테 소금을 뿌렸지만, 우리 회장님은 냉철한 판단력으로 꾹 참을 거라 보걸랑.”
아무래도 집무실에 소금을 비치해 두라고 총무팀에 일러두어야 할 것 같다.
운전병에 대한 갑질과 폭행, 전속 부관의 얼굴에 가래침 뱉기, 만취한 후 부대 앞 초병의 총기 빼앗고 도망치기.
이 모든 그랜드 슬램을 불과 20대 중반의 나이에 달성한, 그리고 김원철 아저씨가 소개를 받으라 권유하는 그 여자는 바로.
“함 장관네 정신 나간 외동딸. 분명 우리 회장님은 감당할 수 있을 거야. 파이팅!”
* * * *
용산. 국방부 장관 공관.
한적하기로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공관촌. 그러나 유독 이곳만큼은 세간의 법칙이 통용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늦은 밤. 한쪽 눈이 시퍼렇게 변한 운전병. 그는 자신이 모시고 사는 또래 여자를 업고는 현관문을 열었다.
“야! 빨리 가라고!”
“후우… 알겠습니다.”
술에 떡이 된 채, 그리 길지도 않은 운전병의 머리칼을 잡아챈 그녀.
“아빠 알면 나 죽는 거 알지? 그럼 빡빡이 너는 내 손에 바로 죽는 거야!”
“이 년이…! 함채은! 너 지금 뭣 하는 짓이야!”
때마침 마당에 나와 있던 함풍덕 국방부 장관.
상념과 함께 태우던 담배였지만, 그의 외동딸과 함께 불어온 독한 연기는 매캐한 독 기운처럼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들기 충분했다.
“오우, 잔소리꾼 영감님. 오랜만.”
“정신 나간 년! 내가 밑에 운전병들한테 함부로 하지 말라고 말했을 텐데!”
“아, 얘가 말귀를 못 알아 처먹잖아! 띨띨한 새끼가 진짜!”
“이 년이…! 아직도 철이 덜 들어서!”
운전병과 공관병에 대한 갑질 사건으로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린 것이 불과 재작년이었으나, 아직도 그의 딸은 정신을 못 차린 듯했다.
반성의 기미라고는 전혀 없이, 오히려 제 아버지에게 가운뎃손가락을 세우는 함채은.
“사랑해용.”
“지금 이게 장난 같아! 그리고 어딜 처녀 애가 밤늦게까지 술에 절어서 다녀!”
“나 처녀 아닌데. 생물학적으로.”
“함채은…!”
마치 당나귀에서 내리듯, 운전병의 등에서 내려 재빨리 제 방으로 뛰어 올라가는 함채은.
뒤에서 뭐라 들려오는 잔소리는 이미 그녀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저 온 신경이 집중된 것은, 자그마한 휴대전화 화면에 띄워진 문자 메시지 한 통이었으니까.
-[김범호] 네가 예전에 말한 대로 잘생긴 재벌가 남자애 소개팅 잡아 놓았다. 일단… 누군지는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