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곳간을 노리는 쥐새끼들(4)
“흐으으응.”
콧소리와 섞여 나온 무언가 길게 빼는 듯한 목소리.
눈을 가늘게 뜬 채, 입가에 묘한 웃음을 걸어놓은 함채은은 나를 보고는 별다른 형식적인 인사조차 건네지 않았다.
“몇 살? 나보다 오빠야?”
도화살이 덕지덕지 낀 듯, 쌍꺼풀 끝자락에 살며시 걸린 눈웃음.
한쪽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긴 그녀는 발끝을 까딱거리더니, 이내 내 쪽으로 가볍게 몸을 기울였다.
“서로 동갑인 걸로 압니다만.”
“연하는 아니라 좋네. 그런데 계속 쓸데없이 존댓말 할 꺼야?”
“서로 친해지기 전까지는 그게 편하지 않을까요?”
“뭐야, 그게. 무슨 노인네도 아니고.”
탄산이 잔뜩 들어간 칵테일만큼이나 톡하고 쏘는 그녀의 말투.
살짝 가시가 돋은 건가 싶은 목소리였으나, 눈초리만은 그렇지 않아 보였다.
무언가… 마치 마음에 드는 희귀종을 바라보듯, 호기심이 한껏 커지는 듯해 보이는 함채은의 모습.
동물원의 철제 창살에 손을 집어넣는 아이처럼,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그녀가 다시금 내게 말을 건넸다.
“난 소극적인 남잔 싫어. 애초에 자기가 범호 오빠 통해서 나 소개해달라고 한 거 아니었나?”
“그건 맞긴 합니다만. 그쪽… 일단은 그냥 채은 씨라 부를게요.”
조금 뜸을 들인 나.
깍지 낀 양손을 낮은 테이블 위에 올린 나는, 그녀에게 던질 말을 속으로 차분히 골랐다.
“사실 내가 채은 씨한테 반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뭐라고 해야 하나, 좀 미안한 감정도 같이 있고요.”
함채은.
내 앞에 앉아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그녀는… 전형적인 말괄량이라는 말로 형용하기에는 상당히 부족한 부분이 있어 보였다.
보는 이의 눈을 사로잡는 복잡하고 화려한 그림. 그러나 오히려 그림 밖 여백에 눈이 가는, 그런 여자.
그렇기에 나는, 오히려 긴장을 풀고 편하게 한마디 말을 내뱉었다.
“사심이 있었거든요. 그쪽한테.”
“참, 나.”
어처구니없다는 듯, 대놓고 코웃음을 치는 그녀.
뒤이은 대답은 그야말로 예술의 극치였다. 나도 나중에 어디서 꼭 써먹고 싶을 만큼.
“혹시 너, 오다가 순결 캔디 먹었어?”
“…무슨 말입니까, 그건.”
“그 있잖아. 막 어디 여고생들 집 갈 때, 이상한 종교단체 아줌마들이 잔소리하면서 나눠 주는 거. 자신의 몸을 소중히 여기세요, 어쩌고저쩌고.”
호로로록, 남은 칵테일을 빨대로 모조리 빨아 마시는 함채은.
양손을 가슴팍 앞쪽으로 쭉 뻗으며, 그녀가 말했다.
“야. 남자가 소개팅 나왔는데, 사심 없이 나오면 그게 더 이상하지. 뭐야, 생긴 거랑 다르게 괜히 순진한 척이나 하고.”
“아, 남녀 관계에 관한 사심이 아닙니다. 좀 더 뭐랄까… 사업적인 부분에 대한 사심입니다.”
무언가 글러 먹은 대답을 듣기라도 한 걸까?
조각난 가면 끝자락 부스러기가 떨어져 나가듯, 어색하게 웃는 상태로 굳어버린 그녀의 표정.
“아, 이런 옘병… 그거였구나.”
탁자 밑으로 마구잡이로 발을 구르는 소리. 짜증이라도 난 모양이었다.
뽕! 멀쩡한 병따개는 놔두고, 괜히 숟가락으로 옆에 놓인 맥주병 뚜껑을 따는 함채은.
잔에 따르지도 않고 숫제 병나발째로 맥주 한 병을 모조리 비워버린 그녀는, 쾅 소리를 내며 빈 병을 내던졌다.
“크하, 이 소개팅은 망했어!”
* * * *
“망할 건 또 뭡니까.”
“아, 노인네 말투 진짜! 아무튼, 돈 얘기할 거면 공관 주소 알려줄 테니까, 우리 집 꼰대 아저씨한테 가서 하라고. 확! 뚜드려 맞기 싫으면.”
주먹 감자를 만들어 하늘 위로 붕붕 돌리는 그녀. 당장이라도 내 머리 위에 꿀밤 한 대를 때리고 싶은 표정이었다.
살짝 장난기 섞인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본 나.
약이 살짝 오른 그녀의 반응은 가볍게 무시하고는, 나는 텅 빈 칵테일 잔을 뺏어서 그 안에 독한 양주를 가득 채워 넣었다.
“크하. 기왕 망한 거 저도 술이나 먹고 갈랍니다.”
텅 빈 술잔.
나는 양복 옷소매로 거품 묻은 입가를 그대로 훔쳤다.
가만히 그 모습을 보고만 있던 함채은. 어설프게 튀어나온 그 붉은 입술은 무언가 생각이 바뀌기라도 한 것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갑자기 팔짱을 끼더니, 등받이에 몸을 깊게 묻는 그녀.
“…아까 그, 거지 같은 사업 얘기보단 훨씬 낫네.”
“저도 그런 것 같습니다. 크으.”
“아, 나도 한잔 따라 주라고. 괜히 혼자 병신같이 자작하지 말고.”
가득 찬 술잔.
손가락으로 둥그런 가장자리를 빙빙 돌리며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여는 함채은은 뒤에 말 한마디를 덧붙였다.
무언가 슬픈 표정을 한 채로.
“…쓸데없이 불쌍해 보이니까.”
“꼭 스스로에게 하는 이야기처럼 들리네요.”
“…뭐라는 거야.”
“그냥, 뭔가 느낌이 그래요. 겉으로는 단순히 미친년처럼 보이긴 하는데, 그게 꼭 상당 부분은 인위적인 연출 같기도 하고.”
“아, 시끄러! 알지도 못하는 게.”
내가 내뱉은 말에 포함된 단어 하나가 정곡이라도 찌른 걸까?
무언가 골똘히 생각할 거리라도 있는지, 그녀는 가득 찬 술잔에 입술조차 대지 않았다.
그런 모습을 본 나는 꼭 개구쟁이라도 된 듯, 눈웃음과 함께 뒤이은 말을 더했다.
“아, 물론 그쪽이 본질적으로 미친년은 맞긴 합니다. 그동안 사건·사고를 워낙 굵직하게 치셔서.”
“지금 그 미친년한테 바로 한 대 맞고 싶다는 거지?”
내 쪽을 향해 뻗어진 손바닥.
나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내 완력에 이끌린 그녀의 손은, 내 뺨 한쪽에 살며시 다가와 내려앉았다.
“못 맞아드릴 것도 없지요.”
힘을 풀었지만, 여전히 내 뺨 위에 가 있는 그녀의 자그마한 손바닥.
그 온기가 얼굴에 전달될 즈음이 되어서야, 함채은은 다시금 토라진 어투로 내게 톡 쏘는 말을 내뱉었다.
이제는 전혀 뾰족하지 않은, 그녀 자신의 언어로.
“하… 진짜. 꼭 이런 찐따들이 여자한테 맞는 거에 아주 환장한다니까.”
“채은 씨는 지금 질풍노도의 시기이니까요. 좀 뒤늦게 찾아오긴 했습니다만.”
“아가리. 확 씨.”
다짜고짜 손으로 집게를 만들어 내 볼을 꼬집기 시작한 함채은.
손에 들어갔던 힘은,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그러하듯 서서히 어렴풋한 모습으로 변해갔다.
이내, 꼬집던 손으로 내 머리칼을 옆으로 넘기는 그녀.
“…잘생기긴 했네.”
“채은 씨도 예쁘긴 합니다.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나.”
“하여간, 입만 벌렸다 하면 그냥.”
딸깍, 품에서 꺼낸 금속제 라이터에서 올라온 푸른색 불꽃 하나.
붉은 입술에 문 담배에 푸른색 불꽃을 가져다 대며 그녀가 말했다.
“네가 우리 아빠한테 뭘 원하는지는 모르겠는데, 난 내놓은 자식이라 암만 나한테 말해도 이빨도 안 먹혀. 그리고.”
구름처럼 길고 긴 연기와 함께 내뱉은, 이제껏 말하지 않은 속마음.
“…아빠가 그렇게 계속 높은 곳만 쳐다보는 것도 싫고. 거창한 사업 어쩌구 얘기만 하면 꼭 헛바람이 든단 말이지.”
문득 기억이 났다.
함풍덕 국방부 장관. 분명 몇 년 전쯤 군인 시절, 암으로 죽은 자기 아내의 장례식 때에도 참석하지 못했던 남자.
3성 장군 진급을 앞둔 상황에서, 그는 아내를 보내는 시간을 갖는 대신 대규모 군사 훈련 지휘 쪽을 선택했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면 오늘 이 소개팅. 제법 나온 의미가 있네요.”
“뭐라고…?”
그 후로 엇나가기 시작했던 함채은. 그렇기에… 오늘 만남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아버지의 더 많은 성공을 바라지 않는 함채은. 내가 업무적으로 바라는 것.
서로 겹쳐진 두 개의 원은 의도치 않게 교집합 모양의 도형을 그리고 있었으니까.
몸을 앞쪽으로 기울인 나는, 당황한 그녀의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한 채로 입을 열었다.
“아버님께서 아예 높은 곳을 못 보시도록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채은 씨를 위해서, 그리고 저를 위해서.”
“꼭 아빠가 쌓아온 인생 탑을 싹 다 부수고 싶다고 말하는 것 같은데?”
“위에 쓸데없는 장식품은 무너뜨리고, 가장 튼튼한 기단만 남기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턱을 괸 채, 살짝 옆으로 늘어뜨린 목.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그녀. 나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그 자그마한 손의 손등을 감싸듯이 잡고는, 말 한마디를 덧붙였다.
“채은 씨가 거기 앉아서 같이 쉴 수 있도록.”
바보처럼 입을 벌리고는 그대로 눈만 멀뚱거리는 모습.
“흐으으음….”
그 깊은 고민의 끝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소감문 한 장으로 내게 다가왔다.
“아, 씨! 진짜! 이거 꼭 작년에 호스트 바에서 공사 당할 때 느꼈던, 딱 그런 기분인데.”
“안 쳐본 사고가 대체 뭡니까…?”
“아, 시끄러. 가만있어 봐. 근데, 또 다르게 생각하면… 못 속아줄 것도 없긴 해.”
벌컥벌컥 소리를 내며 앞에 놓인 양주병을 모조리 비워버린 함채은.
어느새 벌게진 얼굴로, 무언가를 결심한 그녀가 내게 생뚱맞은 물음 하나를 던졌다.
“한서준이 너, 침대 좋아해?”
“그게 무슨…?”
“하긴, 나한테 말하는 거 보면 순 늑대인데 안 좋아할 리가. 여자들 데리고 어지간히 많이 눕혔겠지.”
이건 좀 억울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지금은 변명할 타이밍이 아니다.
“우리 아빠도 침대 좋아 죽더라. 좀 다른 의미로.”
왜냐하면, 지금 타이밍은… 함채은이라는 내부자가 대규모 국방 비리와 관련한 실마리 하나를 내게 던져주는 시간이니까.
“근데 그 침대, 딱 봐도 중국산 싸구련데 값은 무슨 프랑스 어쩌구 브랜드 가격이더라고.”
“……!”
강제로 잡아채진 내 거친 손은, 허공 위에서 함채은의 작은 손과 함께 꼭 맞잡아졌다.
자물쇠처럼 꼭 맞물린 서로의 새끼손가락.
엄지손가락으로는 손도장을 꾹꾹 찍으며, 그녀의 툭 튀어나온 입술에서는 나를 향한 협박 아닌 협박이 튀어나왔다.
밉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밉지만은 않은.
“너 적당히 때려라. 괜히 우리 집 꼰대 울리면 그땐 진짜 내 손에 죽을 줄 알고.”
* * * *
“아이고, 두야. 아주 딸내미 하나 있는 게 웬수여, 웬수.”
용산, 국방부 청사.
함풍덕 장관은 어지간히 머리가 아픈 모양이었다. 엄지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 그는, 곧바로 옆에 선 부관을 향해 물음을 던졌다.
“그래서, 이 계집애 어디 간 건지 아직도 파악 못 했다고?”
“…면목 없습니다. 좀 더 분발하겠습니다.”
“끄응. 됐다! 그게 뭐 네 잘못이냐, 딸년 잘못 키운 내 잘못이지.”
산처럼 꽁초로 수북이 쌓인 재떨이 위에 하나를 더하는 함풍덕 장관.
이런 지극히 사적인 집안일에 더 신경을 쓰기에는, 그가 하고자 하는 일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것은 윤학길 국가안보실장, 그리고 서윤지까지 엮인 국방부 신무기 개발 사업뿐만이 아니었다.
“그 침대 쪽 한다는 업자는,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다고?”
“예, 장관님. 좀 더 기다리라 하면 되겠습니까?”
“됐어. 그냥 올라오라 해. 애간장 태우는 것도 슬슬 끝내고, 이만 확정지어야지.”
툭, 집무실 책상 위에 놓인 문서 하나.
‘장병 생활관 현대화 사업’이라는 제목의 문서에는 조 단위의 예산이 책정되어 있었다.
“이건 윤학길이 같은 외부인들하고 절대 못 나눠 먹지. 같은 국군 식구들하고만 껴서 진행해보자고.”
“예산 액수가 큰데… 괜찮겠습니까?”
우려를 표하는 부관에게 함풍덕 장관은 심드렁한 어투로 대답했다.
마치 당연한 것을 왜 묻느냐는 듯이.
“얌마! 이게 다 생계 때문에 그러는 거야. 알아서 티 안 나게 조정 다 된 거니까, 괜히 어디서 말실수나 하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