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The greatest show(2)
용산 국방부 청사, 대회의실.
국방부 신무기 개발 사업 입찰을 앞둔 이곳에는 하나둘씩 이해 당사자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충성. 그간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선배님.”
“고생은 무슨… 막판 가서는 나도 손 놨어. 어차피 승자가 정해져 있는 게임인데, 해서 뭐 하나 싶고.”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번 일의 실무를 맡은 인원들.
어깨 위에 별 두 개를 단 육군 장성. 그는 자신 옆에 앉은 대령급 인사에게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마치 자신에게 주어진 알량한 권한 따위야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이거, 높으신 분들이 입김 거하게 불어 넣으셨다. 괜히 어디 술자리 가서 흘리고 다니지 말고, 입에 자크 짝 채우고 댕겨.”
“아니, 신무기 건 같이 중차대한 사안에도 숟가락을 들이민답니까? 그 침대 건도 아니고? 도대체 어떤 잡놈들이…!”
“어허! 조용히 하래도? 여기 녹음기 버튼 딸깍거리는 기자 놈들 많다.”
입술 위에 검지를 올리고는 입으로 바람 소리를 내는 장성.
고개를 가로저어 좌우를 살피고 난 후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깊은 탄식 소리와 함께.
“후우… 우리 함풍덕 장관, 그리고 윤학길 국가안보실장.”
“하아, 어쩐지 청사 내에 뜬소문이 든다더니.”
“얌마, 군복 벗고 쫓겨나기 싫거든, 모르는 척 바보로 살아. 마침… 들어들 오시네.”
-끼익
낡은 철제 경첩이 포개짐과 함께 문이 열리는 소리.
대회의실 앞쪽과 뒤쪽에 달린 커다란 두 개의 문.
마치 영화에서나 보는 것처럼, 동시에 열린 문틈 사이로 서로 다른 두 개의 빛이 방 안으로 비쳤다.
“높으신 분들. 아니, 높으신 놈들.”
“함풍덕… 윤학길….”
“잘 봐둬. 제아무리 어깨에 별 단 군바리든, 목에 깁스한 고시 출신 관료 놈들이든 간에, 우리가 넘을 수 없는 부패의 벽이 있다는 걸. 물론….”
씁쓸한 표정으로 내빈석에 앉은 이들을 바라보는 장성.
점점 채워지는 공간. 이내 인수 당사자인 탄약그룹과 SA-철화 테크윈의 자리까지 채워지자, 그는 지그시 두 눈을 감았다.
자신의 힘으로는 이룰 수 없어 보이는 말 한마디를 덧붙이며.
“뭐… 저들 중 기적을 만드는 자가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 * * *
뚜벅뚜벅, 걸음걸이 하나하나에 울려 퍼지는 구둣발 소리.
국방부 장관 함풍덕, 국가안보실장 윤학길. 양 끝의 문을 지나 장내로 걸어 들어온 두 사람.
서로 다른 생각, 서로 다른 입장, 서로 다른 이해관계.
거울에 비친, 좌우가 바뀐 모습처럼, 각자를 마주한 그들.
번쩍거리는 카메라 플래시 속에서, 두 손은 허공 위에서 맞잡아졌다.
“합의가 바뀔 만한 일이 그간에 일어나지는 않으셨는지요, 장관님?”
빼빼 마른, 손등에 푸른 핏줄이 툭 튀어나온 앙상한 손을 내민 윤학길 국가안보실장.
그의 눈빛은 탐욕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번 일로 SA-철화 테크윈을. 아니, 어쩌면 서윤지라는 꼭두각시를 통해 철화그룹 전체를 자신의 정치 조직의 사금고로 쓰겠다는 생각.
때문에, 마른 나뭇가지처럼 앙상할지언정 힘이 잔뜩 들어간 그의 손아귀.
후덕한 양손으로 그 마른 손을 붙잡으며 함풍덕 장관이 대답했다.
“허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전에 논의했던 것 그대로 갈 겁니다.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윤 실장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부드러운 미소 속에 뾰족하게 날 선 함의를 감추지 않은 함풍덕 장관.
다가오는 재보궐 선거.
이번 일에 숟가락을 얹었으니, 국회의원 공천에 대한 약속을 지키라는 무언의 압박.
인생 말년에 펼쳐질 정치 로드맵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그는 속으로 다짐했다.
‘공천만 받으면 곧바로 자기 정치 시작이다. 일단, 군 출신 인사들을 모아야 하고, 그러려면… 역시 침대 업자 놈들에게 빨리 돈을 뽑아내야겠어.’
평생 물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메말랐던 자신의 갯벌. 그곳에 권력이라는 밀물이 들이닥치는 상황.
그는 빨리 배 위에서 노를 꺼내어야 했다.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물이 들어올 순간을 위해서.
“그러니, 서로가 서로에게 맺은 약속… 반드시 지키는 것으로 합시다.”
“이제 보니, 장관님도 정치인 다 되셨습니다.”
“언제까지 군문에 갇혀있을 수만은 없으니까요. 자, 이제 슬슬 이동 하시… 어어?”
갑자기 그의 양복 재킷 안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
행여나 급한 일일세라, 곧바로 꺼낸 휴대전화. 그 화면 속에는 사진 한 장이 들어가 있었다.
-아, 적당히 좀 하라고. 개똥 같은 꼰대! 나 진짜 집 안 들어간다?
평소 듣던 목소리가 그대로 들릴 것만 같은 문자 메시지와 함께 보내진 그 사진. 거기에는 가운뎃손가락을 쭉 편 함채은의 모습이 들어가 있었다.
“이 철딱서니 없는 년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려서…!”
“함 장관님?”
관자놀이를 문지르는 함풍덕 장관.
잠시, 아주 잠시. 그는 이 말썽꾸러기 딸의 존재에 대해 잊기로 마음먹었다.
그녀가 방금 보낸 메시지가, 사실 그를 위한 것인 줄은 전혀 깨닫지도 못한 채.
“아, 아닙니다. 별일 아닙니다. 어서 자리로 가시죠.”
* * * *
함풍덕과 윤학길.
두 사람의 모습을 모두 지켜보던 서윤지는 다리 한쪽을 꼰 채, 발목을 까딱거렸다.
지금까지는… 그녀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는 두 장기 말.
높은 자리에 앉아, 한 칸씩 이동하는 늙은 장기 말을 바라보며 그녀가 홀로 중얼거렸다.
“아주 속이 훤히 보이네. 애초에 보라고 보여준 것이겠지만.”
체스 경기가 종료되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날 장기 말.
큰 칼을 비스듬히 찬 검은색 나이트(Knight) 따위야 상관할 바 아니나, 흰색 고깔모자를 쓴 비숍(Bishop)은 신경 쓰이는 존재였다.
“분명, 이번 일이 끝나는 대로 감당하기 힘든 청구서를 들이밀겠지. 이기든 지든 상관없이.”
그렇기에… 더더욱 이겨야만 하는 체스 경기.
손에 쥔 금제 펜던트에 습관적으로 힘이 들어간 그녀의 손. 점점 빨라지는 심장박동 소리에 서윤지는 얼굴에 홍조를 띄웠다.
“반드시 이길 거야. 그리고 철화그룹 전체를 먹어 치우겠어. 얼마나 큰 청구서를 들이밀든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정도로. 그러려면.”
금이 간 펜던트 사이로 보이는, 이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두 부자(父子)의 모습.
서출이었기에, 그리고 가문을 이을 수 없었기에 감내해야 했던 모든 시련을 곱씹으며, 그녀의 시선이 어딘가를 향했다.
자신이 그토록 부러워하던, 그러나 도저히 넘을 수 없는 한 남자에게로.
“…저 인간부터 짓밟고 올라서야만 해.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꽉 쥔 주먹에서 한두 방울씩 맺혀 떨어지는, 피 섞인 땀방울에는 초조함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이제 더는 돌이킬 수 없는, 막다른 절벽 끄트머리에 선 서윤지.
SA-철화 테크윈의 존속, 주인 잃은 철화그룹의 승계, 그리고… 이제는 거짓과 부실로 점철된 채, 껍데기만 남은 광저우 반도체 공장 리스크까지.
낭떠러지를 등진 그녀는 이제 자신의 모든 것을 건 마지막 도박을 시작했다.
오로지 단 한 사람, 문 안쪽으로 터벅터벅 걷고 있는 탄약그룹의 수장을 노려보며.
* * * *
용산 국방부 청사 내부는 투박했다.
전형적인 관료주의의 인상. 거기에 군 특유의 색채까지 덧댄 이곳.
그러나, 오늘 화려한 쇼가 열릴 대회의실 문을 들어서는 순간, 그 밋밋하던 색채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아니, 정확히는.
“꼭 색채가 얼어붙은 것 같네요.”
나를 향해 쏟아지는, 모두의 눈초리. 공기마저 시리도록 찬 이곳에서, 나는 관계자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눈에 담았다.
국방부 장관 함풍덕, 국가안보실장 윤학길, 그리고… SA-철화 테크윈 대표 서윤지까지.
오늘 이 자리에서 넘어설 수 있는, 넘어서야만 하는 자들의 면면을.
“그러게. 무슨 눈에서 냉동 빔 나올 것 같다야. 바라보면 막 앉은 자리에서 꽁꽁 얼어버리는.”
한기 탓에 냉동 주꾸미가 될 것만 같다는 김원철 아저씨.
잠시 상상한 그 모습이 조금 웃겼지만, 나는 의리상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목구멍 안쪽으로 삼켜냈다.
“농담부터 하시는 걸 보니, 오늘은 유독 긴장 같은 게 전혀 없으시나 봅니다.”
“긴장? 나 말하는 거? 내가 긴장을 왜 해?”
내빈석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채로 가슴팍을 팡팡 두들기는 김원철 아저씨.
이 묘하게 근거 없는 자신감의 원천이 어디인지 궁금하던 찰나, 뒤이어 들려오는 명쾌한 해답.
“저번에 우리 회장님이 직접 시연하던 그 시스템을 내 눈으로 봤는데, 뭣이 긴장될 것이 있겄어. 흐흐흐.”
“확실히 완벽하긴 했지요. 이 자리에서 그 시스템을 다시금 시연하게 된다면, 그 순간.”
색채마저 얼어붙게 만든 세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나.
몰이 사냥하듯 진형을 짜, 나를 그 서늘한 냉기로 통째로 얼려 죽이려 들던 저들 따위에게 티끌만큼의 두려움조차 없었다.
그저 단 한 번, 딱 한 번의 손가락질 하나만으로도 정으로 얼음 조각을 깨트리는 조각가처럼, 저들을 산산조각 낼 수 있기에.
마우스를 잡듯 의자 팔걸이 끝자락을 잡은 내 오른손.
그 검지 끝에 아주 작은 힘이 들어감과 동시에, 확신을 담은 말 한마디가 내 입에서 나왔다.
“저들은… 철저하게 부서질 겁니다. 애초에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가늠조차 못 할 만큼.”
“어따, 무서운 거. 난 그렇게 살벌하게 보좌한 적 없어야.”
“그러면서 입꼬리는 괜히 또 올라가 있지 않으십니까? 마침… 시작하네요. 김철근 차관이 직접 진행을 맡은 모양입니다.”
-툭, 툭, 지이이이잉!
컴퓨터에 갓 연결한 마이크에서 나는 둔탁한 기계음.
몇 번의 헛기침 소리 후, 곧바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 김철근 국방부 차관의 인사말이 시작되었다.
“크흠, 국방부 신무기 도입 사업 입찰식에 참석해주신 내빈 여러분께 진심으로 환영의 말씀을 드립니다.”
곧바로 터져 나오는 카메라 플래시. 차후 대한민국 국방력의 기초를 닦는 사업이기에, 여론의 관심 또한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본 사업은, 강도 높은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모든 입찰 과정은 공개로 진행되며, 실시간으로 송출되고 있음을 밝히는 바입니다.”
말을 마친 후, 내 쪽을 바라보는 김철근 국방부 차관.
공개 입찰, 그리고… 실시간 송출.
내가 그에게 바란 유일한 요구. 그것은 이 판에 그 어떤 직접적인 개입 없이, 그저 판 자체를 크게 키우라는 것이었다.
모든 이들이 지켜보는 눈앞에서, 그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그 누구도 발뺌할 수 없도록.
아무런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나. 김철근 차관은 그것을 신호로 받아들인 듯, 다시금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장내의 청중에게 외쳤다.
“그럼 지금부터 국방부 신무기 개발 사업 입찰식을 실시하도록 하겠습니다. 가장 먼저… SA-철화 테크윈의 프레젠테이션이 있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서윤지.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와 함께 내빈석에서 일어나 아래쪽 연단을 향하는 모습.
칠흑같이 어두운 단발의 머리칼, 이내 차가움과 도도함으로 무장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쓰레기는 쓰레기장에. 이제 과거의 모든 낡은 유산을 폐기 처분할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