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장님의 핵몽둥이-97화 (97/300)

97화The greatest show(4)

무대의 막이 올랐다.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그리고 먼발치의 카메라에서 터져 나오는 스포트라이트.

나를 향한 인공적인 불빛들. 그러나 그 불빛의 가장 중심부에는 시선이 있었다.

주인공이 바뀐, 이 쇼를 지켜보는 관객들의 냉엄한 평가의 시선이.

“탄약그룹 한서준입니다. 반갑습니다.”

딱딱하고 메마른, 그리고 조금 탁한 목소리의 인사. 흔한 기대의 박수조차 없는, 냉랭한 반응.

내게 주어진 무대 장치는 오른손에 든 마이크와 왼손에 쥔 리모컨뿐.

새하얀 도화지 같은 화면에 눈길을 주며, 나는 곧바로 발표에 들어갔다.

“발표하기에 앞서, 조금 깜짝 놀랐다는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저 또한… 당혹스러웠거든요.”

나는 강물 위에 꽁꽁 얼어붙은 얼음판에 돌을 던지듯, 기울어진 분위기를 환기하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움직임 때문일까?

이 자리에 모인 수십 명의 관객, 그리고 분명 카메라 너머에서 이 쇼를 지켜보고 있는 수백만, 수천만 명에 달하는 관객들의 이목이 순식간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놓칠 수 없는 타이밍. 나는 곧바로 왼손에 쥔 리모컨 버튼 하나를 눌렀다.

“먼저 발표해주신 SA-철화 테크윈의 서윤지 대표님. 공교롭게도 그분께서 말씀하셨던 내용이 저희 탄약그룹이 가져온 것과 대부분 겹쳐서 말입니다.”

천천히 한 번씩 눌러진 버튼에 발맞추어 한 장 한 장 지나가는 슬라이드.

말단 병사부터 사령부의 최고 지휘관까지 통합된 전장 공유 시스템.

심지어 세부적인 그래픽과 운영 방식까지 동일한 이 발표 내용은, 앞서 서윤지가 보인 무대와 너무나도 똑같았다. 마치 데자뷔라도 보는 것처럼.

“사실 그렇기에 더 말씀드릴 것이 없습니다. 전장 가시화, 통합적 병력 운용, 보급 체계 중앙화. 전부 거기서 거기라고밖에요.”

“크흠… 이보세요, 한 회장님!”

툭툭, 마이크 소리가 난다 싶더니, 어느새 내빈석에서 들려오는 걸걸한 말투.

발표 도중 말을 끊는 결례를 저지른 사람은 다름 아닌, 함풍덕 국방부 장관이었다.

마치 건수 하나를 잘 잡았다는 것처럼, 나를 향해 대뜸 호통을 치는 그의 시선은 내가 아닌 카메라 렌즈를 향했다.

다분히… 의도적인, 너무나도 뻔하디뻔한 거짓 연출을 애써 그려가며.

“지금 그게 발표하는 측에서 가질 예의입니까? 아무리 상대방 것을 그대로 베꼈다 한들, 최소한의 성의는 보여야지!”

들을 가치가 없는, 함풍덕 장관의 외침.

시끄럽게 떠드는 그의 목소리에는 일절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내 시선은 내빈석 뒤쪽을 향했다.

공교롭게도 옆자리에 붙어 앉은 윤학길과 서윤지, 두 사람.

“…….”

내 침묵을 어떤 식으로 해석한 것일까?

삽시간에 무표정에서 환희로 바뀌기 시작한 그들의 표정.

마치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승리를 선언할 것만 같은 그 눈빛은 나를 향해 이렇게 포효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겼다…! 오늘 이 자리에서 한서준 저놈을 끝내 제물로 삼는다면, 원하는 모든 것이 내 손아귀에 들어올 터.’

자신들의 앞에 펼쳐질 운명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저 희망에 부푼 그 모습이, 나는 퍽 우스웠다.

그저 입가에 조소만을 띄우고는 고개를 가로젓는 나.

그리고 그 행동을 본 함풍덕 장관. 가열찬 공격에 박차를 가하기라도 하듯, 그의 고함이 장내를 쩌렁쩌렁 울리기 시작했다.

“한 회장님! 지금 장관이 하는 말이 들리지 않습니까? 표절에, 무대응까지! 이 무슨 성의 없는 태도입니까!”

“제 발표가 장관님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나 봅니다.”

“내 기분이 문제가 아니고! 지금 전 국민이 지켜보는 앞이지 않습니까! 이럴 거면 그냥 입찰 철회하세요! 기가 막혀서 원…!”

윽박지름을 가장한 망신 주기 쇼.

국회의원이 되고 싶다더니, 그새 어디서 비슷한 영상이라도 찾아본 모양이었다.

물론… 그 정치인 흉내 비슷한 것은 너무나도 저열하고 가소로워서, 일말의 타격감조차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렇네요. 장관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럼! 내 말이 옳지… 아니, 아니. 한 회장님?”

“전 국민이 지켜보는 이 자리에서, 제가 중요한 것 하나를 빼먹을 뻔했네요.”

무언가… 순식간에 뒤집힌 무대 위의 분위기.

삐그덕, 어설프게 맞물려가는 톱니바퀴 소리에 조금씩 변해가는 등 뒤의 세트장 배경.

그 바뀐 배경을 가장 빨리 눈치챈 자는, 멍한 표정의 함풍덕 장관이 아니었다.

직감적으로 손을 들고 뒤이을 내 발언을 제지하는 윤학길 국가안보실장.

“한 회장님.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이쯤에서 자리에서 내려오심이….”

“아니요. 가장 중요한 내용 하나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군의 고질병을 아주 쉽게 고칠 수 있는 IT 기술 하나가.”

“잠시만! 해당 부분은 비공개로 논하는 편이…!”

새하얗게 변한 그의 얼굴.

정치판에서 수십 년을 구르고 또 구르던 그의 이맛자락에는 식은땀 한 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무언가 온전히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자신이 설정해 둔 함수가 잘못된 값을 산출하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는 윤학길의 모습.

하지만… 그는 막을 수 없다. 별처럼 많은 카메라 렌즈의 반짝임 너머, 이 모든 장면을 생생히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그럼 지금부터 곧바로 발표하겠습니다. 저희 탄약그룹에서 자체 개발한 시스템인.”

딸깍, 왼손에 든 리모컨을 꾹 누른 나.

곧바로 막막하기 짝이 없던 화면이 바뀌고, 숫자와 함수로 점철된 시스템이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화려하지도, 파격적이지도 않은, 어찌 보면 지루하기까지 한 배경.

그러나… 곧이어 내가 누른, 단 한 번의 손짓에 그 단조로움은 순식간에 역동성으로 다시 태어났다.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광경을 관객들의 눈앞에 몸소 선보이며.

“군납 비리 자동 적발 인공지능의 실현 모습을. 예시로 적용할 사안은… 장병 생활관 현대화 사업. 일명, 6조 원대 침대 비리입니다.”

* * * *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꽉 조인 넥타이를 조금 풀어 헤친 대통령은, 답답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경내를 거닐었다.

어느새 완연한 봄. 정치인에게 있어 바뀐 계절이 의미하는 바는, 곧 있을 재보궐 선거가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왔다는 것일 터.

푸른 잔디밭에 놓인 야외 테이블과 의자.

쌉쌀한 녹차 한 잔을 마신 대통령의 눈에 들어온 것은 주요 일간지의 1면 헤드라인이었다.

-[한성일보] 국방부 신무기 개발 사업 일찰 과정에서 드러난 역대급 군납 비리! 갑자기 논란이 된 침대 사건?

-[내일경제] 품질은 메이드 인 차이나, 가격은 메이드 인 프랑스? 수상한 침대 가격. IT 기술로 잡아냈다.

휘이잉, 갑자기 불어온 봄바람에 그대로 날아가 버린 신문지.

온화한 표정의 대통령은 그런 해프닝 따위야 일절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앞에 선 남자에게 미소를 보였다.

실망이라는 감정이 가득 담긴, 대통령 특유의 감정 표현을 넣어서.

“허허, 윤학길이. 자네도 실수라는 걸 하는 사람이로구먼. 내 다시 봤어.”

“…송구합니다. 대통령 각하. 제가 감히 무어라 변명조차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변명은 무슨. 사람이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기 마련이지. 물론.”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는, 몸을 틀어 윤학길을 향한 대통령.

희끗희끗한 회백색 머리칼을 위로 쓸어 넘긴 그가 평소보다 한 단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어난 일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스스로 짊어져야 한다는 것은, 내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그래. 알면 되었네. 허면, 이왕 이리된 것. 긴말할 것 없이, 내 하나만 묻겠네.”

다시금 불어온 봄바람은 아까 전과는 달리 유독 서늘하게 윤학길의 폐부에 닿았다.

침묵이 부른, 꼭 억겁과 같이 느껴지는 찰나의 시간.

잠시 생각을 정리한 대통령은 결심한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번 침대 건, 그리고 그걸로 파생될 가능성이 농후한… 그 국방부 신무기 도입 사업. 자네 뜻대로 계속해나가면, 그 책임도 자네가 질 수 있겠나?”

“그건….”

“쯧쯧쯧. 이 친구, 참.”

망설임의 모습을 보인 순간, 곧바로 사라져 없어진 기회.

곧바로 윤학길의 귓가에 실망이 가득 담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불이 더 번지지 않게 하려면, 타고 있는 집을 부수는 게 나아. 괜히 작은 집 하나 지키려다가 마을 전체가 불타게 생겼다네.”

이미 정해진 대통령의 의중.

선거를 앞두고 더 판을 크게 벌이지 말라는 그 말에, 윤학길은 두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소통령, 중통령이라는 정체 모를 헛바람이 빠져 쪼그라든 채로.

“해당 신무기 개발 건에 대해서는… 아무쪼록 공정한 방향으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각하.”

“잡음 나지 않게 해. 선거 자금이야 다른 곳에서 끌어올 곳 많으니, 자네는 앞으로 공천에서 신경 끄고.”

선거의 꽃 공천권.

그 달콤한 가시 몽둥이에서 순식간에 멀어지게 된 윤학길.

축 처진 그의 뒷모습은 꼭 패배한 개가 상처를 입은 채로 다리를 절룩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타이밍이 좋습니다, 각하. 저 윤학길이를 단칼에 날릴 명분이 생겼으니 말입니다.”

멀어져가는 윤학길을 바라보는 대통령.

언제 온 것인지, 그의 옆에는 청와대 정책실장 박동희가 서 있었다.

윤학길 국가안보실장과 늘 대립 관계였던 그는,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정적을 바라보며 웃음 지었다.

“오만방자했습니다. 지나칠 만큼.”

“자멸한 게지. 원래 욕심이 많은 친구였으니. 그렇지만 뭔가… 석연치 않구먼.”

“각하, 윤학길이 영애님 목숨을 구했던 것은, 이미 지난 세월에 걸쳐 충분히 보상을 받은 것만으로도…!”

권력의 추가 다시금 옮겨질세라, 황급히 설득에 나선 박동희 정책실장.

이미 그 속내를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대통령은 손을 휘휘 저으며 그의 말허리를 끊었다.

“아니, 그 이야기가 아니야. 작금의 상황이 꼭 내가 누군가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기분이다, 이걸세.”

“…각하?”

자리에서 일어난 대통령.

산들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오는 정원 한가운데에서, 그는 자신과 꼭 닮은 소나무 줄기를 매만지며 말했다.

“내 목에 보이지 않는 칼날을 들이민 게지. 윤학길을 자르지 않는다면, 재보궐 선거 패배라는 큰 상흔을 남기겠다는 칼날을.”

솔 내음이 묻은 손바닥을 내미는 대통령.

최소한의 눈치는 있는 모양인지, 박동희 정책실장은 곧바로 손바닥 위에 서류 하나를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대통령이라는 최고 권력자의 목에 칼을 들이민 발칙한 남자의 신상이 담긴 서류를.

“젊군. 아니, 어리군.”

“재벌 그룹을 이끌기에는 확실히 연치가 짧긴 합니다만….”

“그러니 더욱 재미있겠어. 한서준이 이 친구, 조만간 한번 만나볼까 하네.”

재미있는 구상이라도 한 듯, 입꼬리가 올라간 대통령.

뒷짐을 진 채, 관저로 향하는 그의 입에서 무심한 듯 투박한 말 한마디가 툭 튀어나왔다.

“그대로 전하게나. 언제 밥이나 한 끼 같이 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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