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전리품을 분배하는 하이에나(1)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삐 소리 이후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연결된 이후 통화료가 부과됩니다.
털썩, 공관 복도 바닥에 주저앉은 함풍덕 국방부 장관.
혹시나 하고 걸어본 전화. 역시나 윤학길 국가안보실장은 받지 않았다.
“아니, 받을 수 없다… 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군.”
카펫 위의 먼지가 날리도록 세게 내쉰 한숨.
꿈꿔왔던 모든 것은 그저 낮잠 속 몽상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꿈에서 깨자마자 현실은 너무나도 추웠다.
근엄한 국방부 장관의 위치에서 잡스러운 방산 비리의 총책임자가 되어버린 모습.
그것은. 그날, 전 국민이 보는 앞에서 자신을 흔들어 깨우던 한 남자의 작은 손가락질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고.
“괴물 같은 놈… 제 목적을 위해 선거를 빌미로 대통령 목에 칼을 들이밀어? 배짱이 좋은 건지, 아니면 미친 건지 모르겠군.”
“둘 다겠지. 물론 미친 쪽이 더 맞긴 하겠지만.”
“채은이 너…! 도대체 집에는 언제…?”
언제 돌아온 것인지, 함풍덕 장관 자신 앞에 나타난 그의 딸 함채은.
그녀는 허리를 숙인 채로, 가만히 한쪽 손을 내밀었다. 애증 섞인 작은 손을.
“됐고. 바닥 차니까 얼른 일어나. 괜히 늙어서 기저귀 차고 다니면 감당도 안 돼.”
“이 정신 나간 계집애가 말버릇하고는… 그리고 함채은 너, 이제까지 뭐 하다가 이제 들어온 거야!”
크게 한번 혼을 내려고 마음먹은 함풍덕 장관.
그런 그의 의도가 무색하게 함채은은 제 아버지의 얼굴 가까이에 눈을 들이대었다.
“울지는 않았나 보네. 뭐, 덜도 말고 더도 말고 딱 괜찮은 정도?”
“이 년이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헛소리를…!”
“됐고. 자, 이거.”
내민 편지 한 장.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겉에는, 그저 붉은색으로 된 불꽃 모양의 탄약그룹 인장만이 봉해져 있었다.
“소개팅남이 아빠 주라더라.”
“뭐라고…?”
“아빠 꺼라고. 다 읽고, 옷 갈아입고, 바로 나와. 날씨도 좋은데 간만에 엄마한테 갔다 오자. 응?”
흠칫, 탄약그룹 인장을 보고 나니 그제야 이 모든 사태가 이해가 가는 모양이었다.
멍하니 멀어져가는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함풍덕 장관.
그는 허탈한 표정 반, 얼떨떨한 표정 반으로 주섬주섬 편지 봉투를 열기 시작했다.
-존경하는 함풍덕 장관님. 탄약그룹 회장 한서준입니다. 장관님께서 이 편지를 읽으셨다는 것은, 승리의 여신이 제 손을 들어주었다는 것을 뜻하겠지요.
“하하….”
그저 과거 사실만을 덤덤히 적어둔 편지 한 장.
SA-철화 테크윈의 서윤지 대표부터 국방부 신무기 개발 입찰 건, 함채은과의 만남과 이번 침대 게이트 건까지.
편지에 적힌 내용은 비단 과거뿐이 아니었다.
앞으로의 미래.
거기에는 향후 함풍덕 장관이 걸어가야 할 길까지 모두 적혀 있었다. 그가 사회적, 법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어떤 한계치에 가까운 선을 넘지 않은 수준에서.
“딸년 키워봐야 아무 소용없다더니. 어디 기생오라비 같은 놈에게 흠뻑 빠져가지고….”
맥 빠진 손으로 잡은 편지를 축 늘어트린 함풍덕 장관.
한숨을 내뱉고 고개를 든 그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늘 매일같이 오가는 길목이었으나, 항상 보이지 않던 것.
벽에 걸린 그것은 작고한 아내의 사진이 담긴 액자였다.
“아니… 꼭 그렇지도 않나 보구먼.”
짝, 소리가 날 만큼, 양 손바닥으로 자신의 뺨을 두들긴 함풍덕 장관.
그는 헛웃음을 내뱉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후우, 괴물 같은 놈.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한서준이 그놈 손바닥 위에서 놀았던 건가?”
혼잣말을 내뱉으며 액자 속 사진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그의 모습.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걸까?
아래층에서는 긴긴 기다림을 참다못한 딸의 재촉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빠! 뭐 해? 빨리 안 나오고! 엄마 보러 안 갈 거야?”
“참, 나. 못된 년 같으니.”
계단 난간을 부여잡고 한발 한발 아래로 내려가는 함풍덕 장관.
발자국 하나에 장관직 사의를.
다른 발자국 하나에는 침대 비리와 관련된 모든 것을 감내할 수 있는 책임을.
그리고 마지막 발자국에는… 국방부 신무기 개발 입찰 건에 대한 완전한 공정의 태도를.
하나씩 하나씩 날아가기 시작한, 어깨 위에 올려져 있던 탐욕.
그는 결국 온전히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편지 속에 담겨 있던, 추신처럼 덧붙인 미래로 향하는 길을.
그리고 후련하게 내뱉은 한 마디.
“지금 간다! 시간 좀 걸리니까 차에서 기다리고 있고!”
* * * *
투둑, 침방울과 함께 바닥에 뱉어진 투명한 큐빅 하나. 서윤지에게 있어 네일아트 따위는 전혀 중요치 않았다.
그저 해일처럼 다가오는 불안감을 조금이라도 누그러트리기 위해, 습관처럼 엄지손톱을 물어뜯는 그녀.
톱니바퀴처럼 어그러진 손톱으로, 서윤지는 조심스레 휴대폰 화면을 만지작거렸다.
-[임재호] 부재중 전화 29통
전혀 겁나지 않았던, 오히려 제 손아귀에 넣고 얼마든지 흔들 수 있을 것만 같던 남편.
그러나, 지금. 그녀가 쌓아 올린 공든 탑이 무너지는 이 상황에서, 임재호 부회장의 전화는 그녀를 두렵게 만들었다.
더는 내세울 카드가 없는 그녀가 다음 수를 생각하기 전까지는.
“미친 인간 같으니…! 아주 눈깔이 통째로 뒤집혔나 봐? 한 달 치 전화를 몰아서 하고 있어.”
짙게 그린 눈화장이 오늘따라 유독 어설퍼 보이는 지금 이 순간.
거울 속에 보이는 그녀 스스로의 모습은 마치 넋이라도 나간 과부처럼 보였다.
철화그룹이라는 사실상의 남편과 사별한 미망인처럼.
-지이이잉!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퍽 가엽다고 느끼던 그 순간, 다시 울리기 시작한 휴대전화 진동 소리.
거친 역정을 내며, 집어 든 휴대전화를 땅으로 내려치려는 그 순간.
“시아버… 지?”
화면에 찍힌, 기존과는 전혀 새로운 이름.
떨리는 손.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SA 그룹 임계현 회장의 전화에 그녀는 잠시 망부석처럼 굳어졌다.
“…….”
그리 길게 주어지지 못한 고민의 시간. 아랫입술을 꽉 깨문 서윤지는 조심스레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전화… 받았습니다. 아버님.”
“길게 말하지 않으마. 당장 본가로 오너라.”
일체의 노기조차 없이, 그저 메마른 사막 같은 임계현 회장의 목소리.
예상치도 못한 상황.
혹여나 임재호 부회장이 벌인 일일까 싶어 쉬이 대답을 꺼내지 않는 서윤지.
임계현 회장은 그 사실마저 꿰뚫어 본 듯, 곧바로 말 한마디를 덧붙였다.
“재호 녀석은 여기 없다. 새아가 너와 따로 이야기할 것이 있으니, 지체하지 말고 곧바로 오거라.”
* * * *
탄약그룹 본사 꼭대기 층, 회장 집무실.
털썩, 목에 건 넥타이를 마구잡이로 풀어 헤친 채, 소파 위에 맥없이 주저앉은 나.
간혹, 지금처럼 일터가 좋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첫 번째로는 무언가 열정적으로 일을 주도할 때. 그리고 두 번째로는….
“뭣이여. 그러니까 임계현 회장, 그 영감님 만나고 왔다고? 요 출근 바로 전에?”
“평창동 본가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니까요. 암만 아침 식사 초대라지만. 숫제 납치나 다름없는 상황이라 봐도 무방하지 않겠습니까.”
“납치 맞지. 나는 그 양반 곁에만 가면 숨이 턱턱 막히드만. 아주 사람 잡는 눈이라 그른가.”
바로 지금처럼, 일터보다 더 지독한 곳에서 간신히 탈출했을 때.
곧바로 내게 500ml짜리 콜라 하나를 건네주는 김원철 아저씨.
안 그래도 더부룩한 속사정 탓에, 나는 단 한 번에 페트병 바닥을 비워냈다.
“후우, 이제 좀 소화가 되네요.”
“대관절 그 영감님이 무슨 일로 아침나절부터 부른 것이여? 뭐… 대충 짐작은 간다만.”
“그게 말이죠. 사실은….”
전 국민에게 생중계되고 있는 상황에서 침대 비리 건을 꺼내 들었던 나.
고작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청와대 측에서는 감사원에 압력을 넣어 국방부에 대한 대대적인 감찰을 벌였다.
해맑은 표정으로 도화선에 불을 붙였던 나.
하지만, 나는 이 광란의 돌풍 속에서 한 발짝 발을 빼고 있었다.
그저 조용히, 곧 있을 국방부 신무기 개발 사업의 정식 입찰을 관망하면서.
‘도련님. 아니, 회장님. 누가 꼭두새벽부터 회장님을 찾는데유.’
‘…새벽 6시에 말입니까? 도대체 누가…?’
‘임계현이가 아침밥 같이 먹자고 그러면 아실 거라네유. 근디 회장님 친구분들 중에 임 씨는 없었는디.’
내가 본가를 찾았던 것을 어떻게 안 것인지, 곧바로 사람을 보낸 임계현 SA그룹 회장.
그 순간,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애매한 기분.
무언가를 벌인다기보다, 벌여진 일을 수습하기 위해 나를 찾은 듯한 느낌.
그리고 그 느낌이 현실이 되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서 오게. 한 회장. 이리 가까이서 보니 부군을 쏙 빼닮았구먼.’
휠체어에 앉은 채, 그대로 나를 올려다보던 임계현 회장.
문득, 회귀 이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작고하는 그날까지 SA 그룹을 단단한 반석 위에 올려놓는 작업을 멈추지 않던 모습이.
그리고, 지금. 내 앞에 앉은 작은 거인의 움푹 파인 눈동자는 그 깊이만큼이나 통찰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현명한 연극. 내 재미있게 보았네. 내 아들 부부 내외부터 장관·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결국, 한 회장 자네가 주인공이 되더군.’
딸그락, 은으로 된 수저를 들어 식사를 시작한 임계현 회장.
작은 거인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모든 것을 알고서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었다.
‘운이 여럿 따랐습니다.’
‘다 자네 복이야. 유능한 아랫사람과 적절히 찾아온 시기까지, 전부.’
체기가 있는 것인지, 식사를 멈추고 곧바로 숭늉을 들이켠 임계현 회장.
답답한 속을 당장에 풀고 싶은 모양인지, 그는 내게 곧바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윤학길이와 함풍덕. 두 사람은 알아서 정리된 것 같고… 이제 남은 것은 내 며늘아기 하나뿐이던가?’
‘의도한 것은 아닙니다만, 공연히 임재호 부회장님께서 유탄을 맞으신 것 같습니다.’
‘내 일부러 맞게 두었다. 사색으로는 깨우치지 못할 녀석이니, 경험으로라도 배워 나가게 해야겠지.’
임재호와 서윤지.
아들 내외가 목도한 위기에, 별것 아니라는 듯한 반응을 보이는 그의 모습.
식사를 마친 후. 바람을 쐴 겸, 나와 함께 정원에 나온 임계현 회장이 입을 열었다.
‘그 국방부 신무기 개발 사업 말일세. 자네가, 그리고 탄약그룹이 가져가게 될 터. 그렇지 않은가?’
‘굳이 길목을 막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까?’
‘SA 그룹이 역량을 집중해야 할 곳은 따로 있네. 그리고 그것은 한 회장, 자네와 논의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고.’
앉은 자리에서 가만히 내 눈을 바라보는 작은 거인.
뺨을 스치고 불어오는 봄바람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 역시 임계현 회장이 뜻한 바가 무엇인지 곧바로 느낄 수 있었기에.
‘철화그룹. 그러고 보니 이제 주인이 없게 되었습니다.’
막이 내린 무대.
텅 빈 객석과 덩그러니 남은 세트장을 바라보며, 이제껏 바라보기만 했던 그가 입맛을 다시기 시작했다.
‘조만간 청와대에서 연락이 갈 걸세. 자세한 각론은 아마 그때 가서 논하면 될 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