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전리품을 분배하는 하이에나(2)
굽이진 평창동 언덕길을 올라, 안개 낀 북한산 자락 바로 아래 보이는 곳.
차에서 내린 서윤지. 그녀는 SA 그룹 임계현 회장의 저택 앞에 선 채, 선글라스를 벗었다.
어둠이 걷히고 막 터오기 시작한 아침 해.
동쪽 봉우리에 걸친 새로운 빛이 새로운 날을 밝히는 지금, 그녀의 가슴팍에는 다시 희망이 뛰기 시작했다.
“그래… 어쩌면 저 늙은이가 내 편이 될 수도 있지.”
절망의 구덩이에 두 발이 깊게 빠진 채, 점점 아래로 가라앉는 그녀의 몸.
허리께에 한껏 감아 두었던 질긴 넝쿨은, 너저분한 지푸라기처럼 순식간에 풀어 헤쳐진 지 오래였다.
그렇기에 눈을 질끈 감고, 마지막 힘을 다해 내민 한쪽 손.
“어서 오십시오. 작은 사모님.”
“회장님은… 아니, 아버님은?”
“위층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올라가시죠.”
천천히 계단을 오르는 서윤지.
한옥 특유의 삐걱거리는 마루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내민 손에 힘을 쥐어 무언가를 움켜잡았다.
새로운 구원자가 될 동아줄일지, 파멸을 향해 가라앉는 자신을 비웃을 비단뱀일지 모를 무언가를.
“그래. 바로 왔구나. 앉거라.”
“예, 아버님.”
이른 아침이건만, 벌써 식사를 마쳤는지 그저 잣을 띄운 수정과만을 내놓는 가정부.
서윤지는 의아해했다.
보통… 임계현 회장의 스타일상,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는 식사를 같이 곁들이기에.
“아버님, 아침 진지는 벌써 잡수신 건가요?”
“음? 아아, 그래. 먼저 손님이 왔다 가셔서 말이지. 뭐랄까, 아주 귀한 분이셨단다.”
귀한 손님.
그리고 뒤이어 부른 서윤지 자신.
머릿속으로 무슨 기대라도 한 것일까?
흔들리는 수정과 표면에 띄워진 그녀의 얼굴에 알 수 없는 묘한 미소가 비쳤다.
“혹시,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을까요? 아까 말씀하셨던 그 귀한 손님분 말입니다.”
“글쎄, 그분이 찾아오신 까닭은, 오늘 새아가 너를 부른 이유이기도 하지. 우선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텅 빈 도자기 그릇을 탁자 위에 내려놓은 임계현 회장.
휠체어에 앉은 채, 무릎담요를 덮은 그는 특유의 툭 튀어나온 눈으로 서윤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국방부 신무기 도입 사업건. 어찌 될 성싶더냐? 가망이 있어 보이던?”
“……!”
“안팎으로 여러 이야기가 오가더구나. 내 새아가 너에게 직접 설명을 듣고 싶어, 이리 부른 것이다.”
그저 자애로운 얼굴로 서윤지 자신을 바라보는 시아버지의 모습.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에 허리 아래가 빨려 들어가던 그녀는 직감적으로 손아귀에 온 힘을 주었다.
무심코 잡았던 긴 무언가가… 새로운 동아줄이 될 것을 확신하며.
‘지금… 지금이 기회다! 반드시 늙은이를 내 편으로 돌려야 해. 아마 그 손님이란 사람은 분명 정부 쪽 사람이겠지.’
서윤지가 입을 열었다.
곧바로 자세를 고쳐잡고는, 이제껏 보였던 그 어떤 모습보다 더 열정적인 언변을 뽐내며.
“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반드시 해낼 자신이 있습니다.”
“그래? 그 근거가 무어냐? 윤학길이도 함풍길이도 이번 침대 건으로 전부 밀려났을 텐데?”
“…중국, 중국 반도체 회사가 있습니다. 보고서를 보셨겠지만, 공장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고, 예상 매출액도 점점 증가 중입니다.”
설산에서 굴러떨어지는 눈덩이처럼 점점 커져만 가는, 살기 위한 거짓말.
타고 남은 잿더미 사이, 이제는 영영 뛰는 법을 잊은 광저우 반도체 공장.
정상적인 작동은 고사하고, 현지의 반발 탓에 접근조차 어려운 상황이었음에도 서윤지는 철저히 은폐할 것을 지시했다.
그런 사소한 것쯤은… 그녀에게 있어 그저 날숨 따위에 불과했으니까.
전속력으로 강물을 해치고 내달린 후, 뭍에 다다르면 내뱉을 날숨.
“조금만, 조금만 SA 그룹 본사에서 도움을 주신다면… 이 정도 위기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가뿐히 넘을 수 있습니다. 반드시!”
“허허, 새아가 네가 패기가 좋구나. 내 소심한 아들놈과는 참 정반대야.”
지팡이 쥔 양손을 모아 투박하게 웃는 임계현 회장.
일순간 서윤지의 눈앞에 비친 희망의 빛줄기.
‘표정으로 봐서는… 성공한 건가?’
빛줄기가 암흑으로 바뀌는 데에 걸린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턱 끝으로 뒤에 선 수행비서에게 무언가를 지시하는 임계현 회장.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바로 가방에서 누런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는 수행비서의 모습.
“그렇기에, 재호 그 녀석이 이번 일로 배워가는 것이 많겠지. 그저 무르던 쇳덩이가 조금이라도 단단해졌기를 바랄 뿐.”
“아버님…?”
팔락, 서류 봉투에서 꺼내진 두 개의 문서.
양쪽에 시퍼런 날이 선 도검처럼, 두 개의 문서는 서윤지의 목 끝을 향하고 있었다.
한쪽 날은 이미 임재호 부회장의 도장이 찍힌 이혼서류였고.
다른 한쪽 날은… SA 그룹 본사 비서실이 조사한, 광저우 반도체 공장 실태 보고서였다.
“이, 이건…!”
“정녕 SA 그룹이 외눈박이라고 생각했던 게냐? 그 어설픈 손바닥으로 모두 가릴 수 있다 여길 만큼?”
아연실색.
흑색 단발과 정확하게 대비되는, 새하얗게 질린 서윤지의 얼굴.
단숨에 발가벗겨진 듯한 기분에,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떨리는 온몸을 조금이라도 진정시키기 위해 양손으로 팔을 꼭 감싸고 있을 뿐.
“모든 자리에서 내려가라. 그리고 떠나거라. 앞으로 재계에 발을 붙일 생각일랑 않는 게 좋을 게고.”
툭, 무심히 내뱉은 말과 함께 그녀 앞에 내던져진 통장 하나.
그 안에 든 것은 정확하게 그녀 몫의 지분 가치가 계산된 현금이었다.
‘잠깐…! 철화그룹, 그러면 SA 그룹이 들고 있는 철화그룹 지주사 지분은…?’
아직도 철화그룹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서윤지.
임계현 회장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곧바로 목소리를 내리깔고 온화함을 거두는 SA 그룹의 거목.
“내 분명 말했을 텐데? 재계에 눈을 들이지 말라고. SA뿐이 아니다. 네 친정인 철화그룹 또한 마찬가지일 터.”
“아버님! 이럴 수는, 이럴 수는 없습니다! 철화그룹은 제가, 반드시 제가 가져가야 하는…!”
“무슨 방법으로 가져가려 하는고? 아무 힘도 없는 네가.”
무릎에 상처가 날 만큼 바짓자락을 꽉 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서윤지의 모습.
손등 위로 떨어지는 눈물방울.
그런 것 따위야 전혀 개의치 않다는 듯, SA 그룹의 거목은 앉은 자리에서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아가, 아까 이곳에 왔던 손님이 누구냐 물었었지?”
흉하게 번진 눈화장.
뺨을 타고 내려온 시커먼 물줄기가 그린 것은 절망 그 자체였다.
“네가 그토록 질시하던, 그리고 증오하던 남자. 그리고… 주인 없이 붕 뜬 철화그룹을 나와 함께 쪼갤 남자.”
그리고 그 절망은… 턱 끝 아래로 내려와 이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듣기 싫은 누군가의 이름 석 자를 문신처럼 귓가에 새기면서.
“탄약그룹 한서준 회장과 모든 이야기가 끝났다. 이제 이곳에 새아가 네가 설 자리는 없다.”
* * * *
펑! 축하의 폭죽 터지는 소리와 함께 하늘 위에서 비처럼 내리는 형형색색의 색종이 조각.
다시 찾은 용산 국방부 본관.
신무기 개발 사업 입찰과 관련한 모든 절차가 마무리된 지금,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오직 축하뿐이었다.
“축하드립니다. 한 회장님. 진작 이렇게 되어야 했었는데… 너무 굽이굽이 돌아서 온 게 아닌가 싶습니다.”
내게 악수와 함께 축하의 말을 건네는 김철근 국방부 차관. 아니, 김철근 국방부 장관 내정자.
침대 게이트와 관련해 책임을 지고 물러난 함풍덕 전 장관의 자리를 채울 그는, 어쩌면 나보다 더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축하는 제가 드려야겠지요. 조만간 장관님이라 불러 드려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허허… 아직 청문회도 남았고 그렇습니다. 여하간에, 국방부 신무기 개발 사업 입찰 성공.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처음에는 탄약 중공업의 박한이 전 사장과 함께 내 반대편에 섰던 김철근 장관 내정자.
그러나 지금, 그는 어느새 나와 향후 몇 년간 보폭을 맞출 위치까지 오게 되었다. 그것도… 아주 호의적인 관계로.
“그럼 전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조만간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한 회장님.”
이래저래 바쁜 모양이었다.
아랫사람 몇 명의 귓속말을 듣고는 자리에서 떠난 김철근 장관 내정자.
어느새 텅 빈 대회의실.
터벅터벅, 구둣발 소리와 함께 천천히 연단 위에 오른 나는 고개를 들어 어디론가를 향해 눈길을 돌렸다.
첫 입찰 당시, 내빈석이었던 그 자리. 승리라는 신기루에 눈이 먼 서윤지가 앉았던 그 자리에는 불이 꺼진 채 쓸쓸함만이 남아 있었다.
“하이고, 오늘 아예 참석하지도 않았드만, 서윤지 그 여자. 맥아리 없게 그냥 대리인만 보내 놓고.”
서출. 그리고 왕관에 대한 강한 열망.
마치 실타래처럼, 내게 복잡하기 짝이 없던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던 서윤지.
거울 쌍이 되고 싶었으나, 깨진 유리 조각으로 몰락한 그녀의 모습을 곱씹으며, 나는 김원철 아저씨에게 대답의 말을 건넸다.
“참석하지 않은 게 아니라 못한 것일 겁니다. 이미… 그녀는 끝났으니까요.”
“임계현 회장, 그 노인네가 단칼에 베긴 했을 것이여. 걷지도 못하는 영감이 정보는 귀신같이 빨라서리.”
나는 마지막 눈길을 그 자리에 두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예전의 나와 닮았던 그녀였기에, 조금 복잡해진 마음.
하지만 이젠 앞으로 나아가야 하기에, 나는 그 이름 없는 무덤가에 그 복잡함을 내려놓았다.
마치 국화꽃 한 송이를 헌화하듯.
“뭐, 이젠 정말 다 끝났네요. 슬슬 돌아가도록 합시다. 다음 일정이 아마 양택수 부회장하고 미셸 사장 보고였던 것 같은데요.”
“그랬지. 근데 그 전에 출출한데 뜨끈한 해장국이나 한 사바리 하고 들어가자고. 내가 살게. 법인카드로.”
법인카드로 사는 거면 실질적으로 내가 사는 것이거늘, 생색이란 생색은 아낌없이 내는 김원철 아저씨.
마침 끼니때가 되기는 한 모양이었다. 느껴지는 허기에 금세 돌기 시작한 입맛.
“그냥 제가 살 테니 그 법인카드는 좀 넣어두시죠. 이거 얄미워서 어디 소화나 제대로 되겠습니까?”
“아니, 사준다고 해도 이렇게 욕을 먹고. 히야… 진짜 우리 회장님, 마음이 떠났어. 나에 대한 마음이.”
하루에 한 번은 술에 취한 것처럼 이상한 소리를 하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 김원철 아저씨.
분명 해장국을 고른 것도 전날 과음의 영향이 있을 터였다.
어제 자 법인카드 결제 내역을 다시 봐야 하는 건가, 잠시 고민하던 나.
그 순간, 갑자기 아저씨의 안주머니에서 벨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내 곁을 떠나간 그 사람 이름은 자옥, 자옥, 자옥이였어요♪
“얼레? 잠깐만, 잠깐만….”
신명 나게 울려대는 트로트 음악.
분명 이혼했다던 전 아내분 이름이 박자옥 여사셨던 것 같은데.
“네, 네? 아, 알겠습니다. 예압. 그때 뵙겠습니다.”
“혹시 전 아내분? 괜히 쩔쩔매지 마시고 차라리 다시 합치시지 그러십니까?”
“아니, 아니, 그런 끔찍한 일은 절대 없을 거고. 그 뭐다냐.”
뻘쭘한 표정을 짓고는 양복 상의로 휴대전화 액정을 닦는 김원철 아저씨.
다시 한번 놀리기 위해 내가 입을 열려는 그때, 전혀 생뚱맞은 아저씨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들려왔다.
무언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스케일이 커진 채로.
“우리 회장님… 대통령이 놀러 오라던디? 밥 같이 먹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