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장님의 핵몽둥이-100화 (100/300)

100화전리품을 분배하는 하이에나(3)

상하이. 푸둥 지구.

주장강의 끝자락인 삼각주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고층 빌딩.

팔락, 손가락 끝으로 서류 자락을 넘기던 제임스 왕 이사.

반복적인 리듬이라 해도 좋을 정도의 속도로 종이를 넘기던 그의 손길은, 갑자기 정지화면이라도 되는 것처럼 순간 멈추었다.

“애시당초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다소 아쉽게 되었군.”

제임스 왕 이사는 소제목에 ‘广州市(광저우시)’라고 적힌 페이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금융위기 후처리에 신경을 쓰던 <상하이 캐피탈>.

거대한 공룡일수록, 큰 위기를 수습하는 데에 시간이 오래 소요되는 법.

그렇기에 그는 자신이 내뱉은 말마따나 이번 방해 공작에 아쉬움만 남은 모양이었다.

“송구합니다. 한서준 쪽은 생각보다 더 영민했습니다. 거기에 서윤지 측에 지원 가능한 여력이 조금 부족했던 터라….”

“상황은 알고 있다. 옌룽, 너를 책망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놈의 발목을 좀 더 잡았으면 하는 바람이었을 뿐.”

잠시 발목을 물리게 만들었던, 서윤지라는 빳빳한 올무.

그리고 이제 막 자본이라는 화살촉이 새로 만들어졌건만, 그사이 벌써 저 멀리 달아나 버린 사냥감.

아쉬움에 작게 한숨을 내뱉은 제임스 왕 이사는 자신의 심복을 향해 물음을 던졌다.

“결국, 조선 반도에 직접 개입할 상황은 아닐 터. 지금 우선순위가 어찌 된다 했지? 내부 수습이 남았다고 했나?”

“일단 급한 불을 모두 껐고 이번 분기 내로 전부 갈무리될 예정입니다. 하여, 이제 최우선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은.”

골치 아픈 내부 뒤처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는 말에 화색을 띠는 제임스 왕 이사.

제 주인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하듯, 곧바로 옌룽은 답을 내놓았다.

운명의 장난이기라도 한 것인지… <상하이 캐피탈>과 그들을 비호하는 세력의 존망을 걸어야만 하는 답안을.

“남방, 동남아시아 쪽 기간산업에 빠른 영향력 확대가 필요하다 사료됩니다.”

“동남아시아라….”

의자에 앉은 채, 고개를 들어 천장에 눈길을 준 제임스 왕 이사.

목제에 섬세하게 조각된 동아시아 지도. 태양처럼 거대한 중화 대륙은 넘쳐흐르는 에너지를 발산하듯, 사방을 향해 부챗살 모양으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남쪽에 붙은, 툭 튀어나온 땅덩어리를 포함해서.

“조만간 베이징에 가 지침을 받아야겠군. 좋다, 조만간 남방과 관련된 세부 보고서를 올리도록.”

“예, 알겠습니다. 주군.”

* * * *

청와대, 영빈관.

분명 반쯤 납치나 다름없었던 며칠 전의 아침 식사 자리에서, 임계현 SA 그룹 회장이 이런 말을 하기는 했었다.

‘조만간 청와대에서 연락이 갈 걸세. 자세한 각론은 아마 그때 가서 논하면 될 게야.’

이제는 주인 없이 붕 뜬, 철화그룹이라는 전리품.

분명 그 분배는 권력이라는 쇠몽둥이를 쥔 청와대와의 협의가 필요하기는 했다.

문제는… 그 협의의 대상이 일개 행정관이나 수석비서관 급을 아득히 초월하는 자라는 것이었지만.

-대통령 주관 재계와의 대화, 그리고 소통.

단상 위에 붙은, 하얀색 실크로 만든 현수막에 적힌 글귀.

그리고 그에 걸맞게 자리를 빛내러 찾아온 수많은 경제 인사들.

“오, 한서준 회장님 아니신가? 나 태풍그룹 박 회장이오. 저번에 전경련 모임에서 한번 봤지요?”

“허어, 정말 아버님을 쏙 빼닮으셨어. 그나저나 국방부 신무기 입찰 건, 돌아가는 모습은 잘 봤어요. 허허허, 배우 하셔도 되겠더만.”

한마디씩 덕담 아닌 덕담을 건네는 재계 회장들.

물론 내게 건넨 것은 그저 덕담만은 아니었다. 묘한 웃음과 함께 간을 보듯 던지는 견제구 뭉치.

“대통령 모가지에 대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할 거라고는 내 상상도 못 했어요.”

“그럼, 그럼. 혈기가 넘쳐서 그런가, 배포가 우리 늙은이들하고는 비교가 안 돼. 참으로 그렇지요?”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힌 너구리들.

그들은 형식적인 행사가 끝난 후, 곧장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나와 임계현 SA 그룹 회장, 단 두 사람만을 남긴 채로.

“고개를 들어야 할 때 들고, 수그려야 할 때 수그리는 것이 중요한 법이지. 마치 저들처럼.”

휠체어에 앉은 채로, 떠나는 이들을 향해 손 인사를 하는 임계현 SA 그룹 회장.

그는 내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내 눈에 들어온 그의 입가에 서린 완고한 주름. 그 사이로 보이는 것은 기대감이라는 감정에 가까웠다.

오늘, 대통령 앞에서 보일 내 그릇이… 과연 어디까지일까 하는 식의 기대감.

“그런 의미에서 한 회장 자네는 희한한 선택을 한 게지. 한껏 수그려야 할 이 선거철에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으니.”

“칼바람이 무서워 머리통조차 못 들면 쓰겠습니까? 그리고 그 칼바람… 목이 잘릴 일은 없습니다. 지나고 보면 생채기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요.”

“허어, 꼭 인생을 두 번째로 사는 이처럼 말하는구먼.”

어디 계룡산에 돗자리를 깐 족집게 점쟁이라도 되는지, 가슴이 뜨끔할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임계현 회장.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가 그의 물음에 답을 해야 하는 일은 없었다.

황량한 광야 같다는 수식어가 어울릴 정도로 텅 빈 영빈관 내부.

경첩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열린 문 바깥에서는, 태양처럼 거대한 권력의 태풍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두 분 모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임계현 회장님, 그리고 한서준 회장까지.”

* * * *

영빈관 뒤쪽, 솔 내음이 가득한 경내.

아주 익숙한 듯, 떨어진 솔방울 하나를 주워들고는 위에 얹힌 솔잎 향을 맡는 대통령의 모습.

자리를 옮겨서일까?

환갑을 갓 넘긴 이 마른 남자는, 일절 공치사 없이 곧장 본론부터 꺼내 들기 시작했다.

“한 회장, 자네 뜻대로 되었네. 윤학길이는 이제 아웃이야.”

소싯적에 야구선수라도 했던 것일까?

푸른 잔디밭 너머로 집어 든 솔방울을 힘껏 내던지는 대통령.

힘을 잃은 그 솔방울은 하늘 위로 어정쩡한 포물선을 그리다 아주 맥없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마치 권력에 취했던 윤학길이 한순간에 날개를 잃고 추락했던 것처럼.

“그런데, 조금 기분이 나쁘더구먼. 윤학길이를 내치는 것이야 내 뜻대로지만, 꼭 누군가에게 떠밀리듯 했던 것만 같아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멀쩡한 소나무에 매달린 솔방울 하나를 떼어내는 대통령.

당장이라도 멀리 던져버릴 것만 같이. 아니, 어쩌면 손아귀에 넣은 채, 그대로 으스러트릴 것만 같은 느낌을 연출한 그가 내게 물음을 던졌다.

“해서, 자네 생각은 어떤가? 나를 가지고 노신 우리 한서준 회장님의 생각 말일세.”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검은 눈동자. 대통령이라는 봉황 모양 면류관을 쓴, 정치판의 노괴는 내게 무언가를 원하고 있었다.

“…….”

그리고 그것은, 그저… 단순한 사죄나 굴종 따위는 아닐 것이다.

자신의 계획을 어그러트린 내게 거는 기대감.

그 기대감을 효용 가치로 바꿔 보라는 무언의 압박이 본질일 터.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웃음 지으며,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내가 해야 할 말을 덤덤히 내뱉을 뿐.

“우선 축하드린다는 말씀부터 드려야겠습니다. 대통령님.”

“축하? 선거를 코앞에 두고 내 목에 칼끝을 들이민 사람이 그런 말도 할 줄 아나?”

“윤학길을 쳐내고 저를 얻으셨으면, 그리고 철화그룹 분할의 최종 중개자가 되셨다면, 그야말로 수지맞는 장사이지 않습니까?”

손에 솔방울을 쥔 채 그대로 나를 응시하는 대통령.

대중의 호감을 사야 했기에 부드럽지만, 실상 그 누구보다 날 선 눈동자.

바람 부는 소리가 몇 차례 지나가고서야, 그의 손에 든 솔방울은 조심스레 탁자 위에 올려졌다.

“재미있는 친구로군. 임 회장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군요.”

“여기 한서준 회장이 제 불민한 아들놈보다야 이야기 나누시기 훨씬 수월하실 겝니다.”

이미 내가 없을 때 서로 말을 맞춘 모양이었다.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대통령과 임계현 회장.

“허면, 이제 대통령님께서도 가납하신 줄 알고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임계현 회장의 말에 승낙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인 대통령.

날씨가 쌀쌀한 것인지, 휠체어에 앉은 채 무릎 담요를 조금 위로 올린 SA 그룹의 거목은 하던 말을 연이어나갔다.

“주인 없는 철화그룹은… 탄약그룹과 SA 그룹이 서로 나누어 인수하는 형식으로 갈 걸세.”

“구체적인 각론을 듣고 싶습니다만.”

곧바로 뒤이은 장황한 설명.

복잡하기 짝이 없는 지분과 자본의 곡예가 언어의 형태로 춤을 추었지만, 최종적으로 내려진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전기·전자 쪽은 SA 그룹이, 방산 부문은 탄약그룹이 가져가는 것이 최선이겠지. 아니 그러한가?”

“큰 틀로는 그렇게 나눈다라….”

철화그룹의 알짜 계열사인 전기·전자 분야를 가져가겠다는 임계현 회장.

분명 향후 있을 스마트폰의 세상에서 최대한 빠르게 고지를 점령할 계획이겠지.

하지만… 이미 두 노괴의 면면을 보니, 벌써 합의된 내용일 터. 반발은 무의미하다.

나는 단서 하나를 덧붙이고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SA-철화 테크윈. 그 회사를 방산 분야로 봐주신다면 주신 제안을 수용하겠습니다.”

“그 정도쯤이야. 어차피 골치 아픈 회사였네. 지분 정리는 확실히 할 터이니 한 회장이 가져가게나.”

“좋습니다. 그렇다면.”

아래로 향하던 눈은 다시 정면을 향했다. 곧바로 나와 다시 눈이 마주친 대통령.

그가… 단순히 호의로 철화그룹이라는 전리품을 내게 나눠줄 리는 없다.

하이에나로부터 분배받는 고기 조각. 나는 송곳니 사이로 시뻘건 웃음을 보이는 대통령에게 물음을 던졌다.

“제가 치러야 할 반대급부는 무엇으로 하면 좋겠습니까, 대통령님?”

“정치인에게 있어 가장 좋은 화폐는 곧 지지율이라 할 수 있지.”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 후, 습관처럼 소나무 등허리를 손으로 매만지는 대통령.

솔 내음이 묻은 손바닥을 내밀며, 그는 주먹 쥔 손에서 손가락 세 개만을 내게 펼쳐 보였다.

“3주 후, 서울에서 ASEAN(아세안) 회의가 개최된다네. 공교롭게도 재보궐 선거를 사흘 앞두고 말이지.”

ASEAN(아세안).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국가 연합에 가까운 공동체.

물경 6억 명이 넘는 인구를 자랑하는 이 거대 시장에서, 대통령이 나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팔 수 있는 것은 뭐든 팔아 봐. 돈은 자네가 갖고, 국민들은 자부심을 얻고, 그리고 나는.”

퀴즈를 내듯 하던 말을 중간에 끊고는, 나만을 바라보는 대통령.

끓던 피도 식기 마련인 환갑이 넘은 나이.

그러나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리게라도 만든 건지, 그는 여전히 눈을 번뜩인 채로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지지율이라는 달콤한 과육을 곧바로 크게 한입 베어 물기만을 바라며.

“지지율을 얻으시면 모두가 행복한 윈-윈 게임이 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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