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한-아세안 캠프(2)
매주 월요일 낮 열두 시.
고풍스러운 괘종시계가 뎅그렁 소리를 내면, 진한 커피 향과 함께 청와대의 분위기는 삽시간에 바뀌게 된다.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줄줄이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수석비서관들.
마치 마법이 풀린 신데렐라라도 된 것처럼, 근엄하기 그지없었던 고관대작들은 고양이 앞의 시궁쥐처럼 잔뜩 긴장한 상태가 되어 버린다.
“후우… 이걸 또 뭐라 말해야 하나?”
박동희 정책실장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긴 의자에 앉은 채, 입가에 묻은 커피 자국을 혓바닥으로 날름거리는 긴장한 그의 모습.
“당신은 지금 이딴 걸 생각이라고 하고 온 건가! 당장 나가! 당장!”
곧이어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벼락 치는 소리.
새빨간 홍당무처럼 달아오른 대통령의 얼굴.
내지른 고함의 흔적이 채 사그라지지 않았건만, 어느덧 순번은 박동희 정책실장의 차례가 되었다.
“대통령 각하…? 바로 보고 올려도 되겠습니까?”
“후우, 그래. 박 실장. 들을 준비 되었으니 어디 말해 봐.”
“아, 예. 그러니까 현재 재보궐 선거 관련 지지율이 영….”
하필이면 민감하기 짝이 없는 주제. 눈을 질끈 감은 박동희 정책실장은 힘겨운 목소리로 보고를 이어나갔다.
상황이 대통령에게 영 좋지 않다는 말을 간신히 내뱉으며.
“우세는 하나도 없고, 죄 경합입니다. 그것도 오차범위 안 초박빙이라 정치공학자들도 가늠이 안 된다 합니다.”
“…이것도 골치 아프게 생겼군. 그래서, 해결 방법은 가지고 온 건가?”
“아무래도… 거대 담론 위주로 진행되는 선거이다 보니, 무언가 큰 것 한 방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결론입니다.”
“큰 것 한 방이라.”
탁자 위에 올려진 야구공 하나를 습관처럼 집어 든 대통령.
늘 머리 아픈 일이 있을 때마다, 그는 외야수라도 된 듯이 무언가를 띄우고는 그대로 받아내곤 했다.
곧바로 허공 위로 두둥실 떠 오른 야구공. 몇 차례 손에 감기는 소리가 나고 나서야, 대통령은 박동희 정책실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묵직한 기술을 걸 수 있으면 걸어 봐. 다만, 괜히 무리해서 역효과가 나지 않도록 신경 쓰도록 하고.”
“예, 알겠습니다. 대통령 각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도록. 고양이 손이라도 빌릴 수 있다면 빌리고.”
문득, 고양이 손이라는 말에 순간적으로 무언가를 떠올린 대통령.
비록 큰 기대를 걸지 않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복권을 사는 마음으로 대했던 탄약그룹의 수장.
손에 야구공을 꽉 쥔 채로, 대통령은 박동희 정책실장에게 물음을 던졌다.
“그런데 탄약그룹 쪽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던가? 그 어린 친구, 이름이 아마… 그래, 한서준이 말이야.”
“그룹 차원에서 별도로 움직이는 것은 없습니다만, 회장 개인이 조금 특이한 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한서준이 개인이? 혼자서?”
의구심 반, 그러나 막연한 기대감 반을 섞은 채로 눈을 반짝이는 대통령.
곧바로 그에게 전해진 종이 한 장.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대학생들이나 참석할 법한 대외활동 포스터였다.
“한-아세안 대학생 캠프? 그 한서준이가 여기에 참가한다고?”
“외교통상부 산하 기관에 스폰서를 서면서까지 정원 외로 참석했다 합니다. 혹여나 불편하시다면… 제지하는 방법도 있습니다만.”
곧바로 터져 나오는 코웃음.
대통령은 얼굴에서 실소를 지울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일전에 자신의 목 끝에 칼날을 들이민 자치고는, 너무나도 어처구니없고 단순한 방법이었기에.
“기가 막혀서 뭐라 할 말이 없군.”
“그럼, 바로 실무 부처에 중단하라 지시를 내리겠습니다. 외교부 쪽에 공문을 넣어서….”
대화 주제를 탄약그룹 쪽으로 돌려버리고 어서 이 불편한 공간에서 도망치려는 박동희 정책실장.
직각으로 허리를 수그린 후, 황급히 문밖으로 종종걸음을 치고 있는 그의 귓가에 대통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그냥 그대로 놔둬.”
“각하…?”
“무슨 엉뚱한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과만 가지고 오면 그만이다. 일전에 약조한 대로 성과를 낸다면 약속한 대가를 줄 것이고.”
이제는 해체되어 법정관리에 들어간 철화그룹의 방산 부문.
분명 그것은… 탄약그룹에 있어 날개가 될 것이지만, 어찌 보면 족쇄이기도 했다.
대통령이 약속했던 정부 지원 이자 감면, 행정 규제 대폭 완화, 세제 혜택까지.
이 모든 것이 무위로 돌아가게 된다면, 분명 탄약그룹은 갑자기 커진 외형에 급체하고 말 것이 분명했기에.
“철없는 신선놀음이라면 스스로 대가를 치르게끔 하면 그만일 터. 계속 지켜보고 수시로 보고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각하.”
* * * *
캠프 개최 장소는 생각보다 본사와 가까운 곳에 있었다.
청계천의 시작점인 청계광장에서 아래쪽으로 조금 걷다 보면 보이는 덕수궁.
벚꽃이 마중 나온 고즈넉한 돌담길을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면, 바로 근처에 내걸린 현판 하나.
-외교통상부 산하, 국제 대학생 교류 협회.
“어디 보자. 이름이, 한원철 학생?”
“한원철…? 아, 네. 맞습니다.”
“뭐여. 젊은 친구가 본인 이름도 헷갈리고.”
한원철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단전 깊숙한 곳에서 끓어오르는 어처구니없음.
캠프 관련 업무를 모조리 김원철 아저씨에게 위임하고서 별다른 확인을 하지 않았더니, 장난삼아 이름을 본인 걸로 해 둔 모양이었다.
“한원철, 한원철. 아아, 같은 한씨? 그래. 어쩐지 그 한서준 회장인가 하고 닮긴 했네. 확실히 친척이라도 피는 못 속이는 것이여.”
콧잔등에 걸쳐진 도수 높은 안경을 손가락으로 올린 말단 직원.
그는 갑자기 캠프 개최 하루 전에 굴러들어온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거, 좋은 집안 자제분이신데, 이런 귀찮은 행사는 왜 오신 건지 몰라?”
“뭐, 그렇게 됐습니다. 앞으로 행사 기간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문제만 일으키지 말아 줘요. 뭐, 탄약그룹 후원도 있으니 어지간한 부탁은 다 들어드릴 테니까. 일단, 복도 끝 오른쪽으로 가시면 돼.”
“알겠습니다.”
그리고는 강당에서 적당히 진행된, 지극히 형식적인 행사 식순.
곧바로 근엄한 전직 외교관 출신 낙하산 협회장의 훈화 말씀 비슷한 것이 이어졌다.
“에, 그러므로 여러분은 세계화 시대에 발맞추어 온 지구촌 사람은 하나의 가족이다,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행사에 임해야 하며….”
아무도 듣지 않는 인간 수면제의 연설.
그렇기에, 나 역시 졸린 훈화 말씀은 귓등으로 흘리고는 곧바로 눈을 감았다.
동남아시아.
분명 한번 연관이 된 적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깊은 밑바닥 어딘가에서.
“…아아, 그랬지. 그때 교도소에서 분명.”
순간 어두컴컴한 칠흑 속에서, 문득 떠오른 기억 한 조각.
피식,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온 웃음. 회귀 전에 있었던 과거를 회상한 나는 작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생각해 보니, 그때 그 웃긴 태국인… 자기가 군 출신이라 했었지?”
* * * *
교도소 안에는 모든 인간군상이 집합해 있었다.
나처럼 모든 책임을 홀로 짊어지고 온 재벌가의 사람부터, 사회 가장 어두운 그림자인 조직폭력배까지.
그 가운데에는 간혹 외국인도 포함되어 있을 정도였으니 말해 무엇하랴.
‘옹박아! 이 띨띨맞은 새끼! 나가 느보고 뭐라 했는지 또 까먹은 것이여?’
아마 징역살이 3년 차 정도쯤이었을 것이다.
갑자기 죄수복을 입은 채로 눈앞에 나타났던 태국인 남자 한 사람.
어수룩한 얼굴, 빵빵한 곱슬머리.
그는 길고 복잡한 태국 본명보다, 주로 무에타이 영화를 연상케 하는 ‘옹박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 썩을 놈아! 똥간을 썼으믄 물을 뿌리라고 했냐 안 했냐? 느 진짜 일부러 그러는 것이여잉?’
군에서 있다가 온 것이라 그런지 단체 생활에 금방 적응했던 옹박이.
그는 조폭 출신 방장의 갈굼에도 늘 익살스러움을 유지한 채로 말을 맞받아치고는 했다.
‘내 이름 옹박이 아니다. 그리고 똥 싸고 물도 뿌렸다. 둘 다 틀린 방장님은 빡대가리.’
‘하! 오늘 참말로다가 매타작 한번 해야 쓰겄다. 어야, 빠따 하나 가지고 와라잉! 나가 오늘 사람 하나 조사부러야겠응께.’
그렇게 매일같이 내게 소소한 재미를 주었던 옹박이. 그는 확실히 개그맨 기질이 있었던 모양이다.
매주 방 안에 둘러앉아 간식거리를 나눠 먹는 시간. 옹박이는 특유의 어눌한 발음으로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그게 제법 재미있었으니까.
‘그래서, 재작년에 태국에 쿠데타 일어났다. 내가 이 손으로 태국 총리 잡고서 대빵한테 넘겼다. 그때 이 흉터도 생겼던 거다.’
‘옹박이 이 새끼는 하여간 입만 열었다 하면 구라가 자동으로 튀어나와부러. 얌마! 그거 저번에 나랑 작업할 때 다친 거잖냐!’
‘다친 거 위에 또 다친 거다. 사나이는 원래 그런 거다. 방장님은 계집애.’
‘어따, 요것이 참말로다가 입을 재봉틀로 콱, 기냥!’
솥뚜껑만 한 방장의 꿀밤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입을 놀리던 옹박이.
충분히 기억을 더듬은 나는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곧바로 눈을 떴다.
“군부 쿠데타. 태국.”
점점 구체적으로 피부에 와닿기 시작하는 기억들.
분명… 당시에 내가 수감 3년 차였고, 옹박이의 쿠데타 참여가 재작년이라고 했으니, 사건이 일어나는 때는.
“올해, 대충 여름쯤인가.”
그 순간, 째깍거리는 소리를 내며 머릿속에서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들.
코앞으로 다가온 태국 군부의 쿠데타. 그리고 아세안 회의를 통해 내가 얻어내야 하는 이익.
목에 걸린 명찰에 적힌 ‘한원철’이라는 이름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오늘 이곳에 참석하기를 잘한 것 같았다.
“가만있자. 이럴 때가 아니지. 외국인 참가자 리스트가….”
호주머니에서 막 꺼내진, 구깃구깃 구겨진 흰 종이.
그 위, 깨알 같은 글씨로 적힌 외국인 참가자들의 정보.
국적별로 알파벳 내림차순으로 적힌 그 종이 끝자락 즈음에 눈길을 돌리자 곧바로 이름 하나가 내 눈에 들어왔다.
-Thailand, Minni Yingtak(21)
민니 잉탁.
스물한 살의 대학생인 그녀는… 올해 여름 쿠데타로 목숨을 잃게 될 태국 총리의 딸이었다.
“…대어가 눈앞에 있는 줄도 몰랐네.”
툭툭, 멍하니 놓은 넋은 곧바로 들려오는 마이크 쇳소리에 다시 정신이 들었다.
협회장으로부터 마이크를 건네받아 연단에 선 말단 직원.
아까 나와 몇 마디 말을 섞었던 그는 안경을 고쳐 쓰고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아, 아. 참가자 여러분. 조금 이따 파트너를 정할 겁니다. 한국인 참가자분 한 분. 그리고 외국인 참가자분 한 분이 짝을 지을 거예요.”
한 쌍씩 짝을 지어 다니면서 서울 일대를 돌아다니는 코스. 누구의 방해도 없이 밀착해서 정보를 뽑아내기 딱 좋은 환경이다.
“그럼, 이제까지 우리 협회장님 말씀 때문에 지루하셨을 테니, 잠깐 화장실들 다녀오시고 10분 후에 다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