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장님의 핵몽둥이-103화 (103/300)

103화한-아세안 캠프(3)

“선배! 선배는 지금 정신이 있는 거요, 없는 거요!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우린 다 끝이야!”

쿵! 나무 의자가 부서질 정도로 거세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남자.

원탁에 둘러앉은 얼룩무늬 군복을 입은 사내들 가운데 그 누구도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마치 그의 예의 없는 고함이 그들 자신의 의견을 대변하기라도 한 것처럼.

“등 뒤로 칼끝이 다가오고 있는데 이대로 가만히 둘 거냐고! 저 신임 총리라는 작자는 우리 군부를 통으로 찢어발기려 드는데!”

“그만.”

태국, 방콕 외곽의 육군 본부 건물 지하.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언성을 드높이는 남자는 어깨 위에 별 두어 개를 달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금속제 별 표면에 비친, 콧수염 난 근엄한 사내 한 명의 모습.

“그쯤하고 진정하도록.”

“하지만, 선배!”

“그만! 입 닥치고 당장 자리에 앉아! 상관 명령이다!”

태국 육군의 파이 사령관.

습관처럼 손가락으로 콧수염을 쓸어내린 그는 강경파 군 후배의 눈을 매섭게 응시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권총이라도 겨눈 양, 그의 압도적인 위압감에 곧 잦아들기 시작한 흥분기.

자리에 앉은 강경파 군 후배의 호흡이 조금 진정되고서야, 마침내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직 정권 초기다. 지금 당장 총리를 갈아엎을 명분이 없다.”

“명분! 그깟 허울 좋은 껍데기가 어디 총알이나 제대로 막을 수 있냐 이거요! 아예 탱크를 몰고 총리 관저로 가서 짓뭉개버리면…!”

“멍청한 새끼! 실제 총을 쥔 병사 놈들이, 그리고 밑바닥 하층민들이 우리 말을 들어 처먹는 것이 그 껍데기 같은 명분 때문이야!”

입술에 꿀이라도 바른 듯, 순식간에 벙어리가 된 강경파 군 후배.

그런 그를 바라보며 짧게 한숨을 내쉰 파이 사령관. 생각이 많아진 그는 지휘봉으로 원탁 위 지도를 툭툭 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장은 안 돼. 하지만… 마냥 불가능하지는 않은 법. 네놈들은 그저 차분히 때를 기다려라.”

파이 사령관이 마지못해 내뱉은 말에 강한 자극이라도 받은 듯, 환희의 미소가 입가에 걸린 강경파 세력 일동.

사령관, 무리의 우두머리가 푹 눌러쓴 근엄함이라는 가면. 그는 자신의 손아귀에 쥔 고삐 끈이 점점 낡아감을 느끼고 있었다.

혈기를 주체하지 못한 채, 눈이 뒤집힌 채로 날뛰는 사냥개들.

설령 정권을 뒤엎는다 한들, 강경파라는 격랑의 파도에 휩쓸려서는 자신 또한 숨이 막힐 것을 예견하며.

“다다음 주, 한국에서 아세안 회의가 끝나는 대로 먼저 총리 쪽과 타협을 해 보겠다.”

“타협… 말입니까? 총리하고?”

“그래. 놈도 머리가 있다면 우리 쪽 이권까지 건들지는 않을 터. 충분한 이익만 보장된다면 굳이 일을 벌일 필요도 없으니까.”

실망스러움이 가득 묻어나오는 강경파 세력의 눈치. 그들은 자칫 제 무리의 우두머리마저 물어뜯을 것만 같아 보였다.

지금 당장 권위를 세워야 하는 상황. 파이 사령관은 주먹으로 탁자를 거세게 내리쳐 분위기를 환기했다.

-쾅!

그러고는 세로로 길게 난 흉터 한가운데에서 뿜어나오는 그의 안광.

송곳니를 세운 채, 굶주린 늑대 무리의 우두머리는 낮은 목소리로 그르렁거렸다.

“하지만. 만약, 그 자리에서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꿀렁거리는 강경파 세력 일동의 목젖.

마침내 원탁에 앉은 이들 모두의 눈을 하나하나 마주한 파이 사령관의 입이 열렸다.

“그때는 네놈들 말대로 피를 봐야겠지. 방콕 시내가 붉은 핏물에 발목까지 잠기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가로세로로 교차하는 환희와 우려.

군부 내의 강경파와 온건파의 얼굴에 명암이 안개처럼 드리웠다.

“감… 감사합니다, 선배. 아니, 사령관님! 역시 사령관님께서도 우리와 같은 생각을…!”

“시끄럽다! 그러니 그때까지는 가만히 닥치고 자리나 지키고 있도록. 경거망동하다가 거사를 그르칠 일이 없게끔 말이다.”

찝찝한 해산 명령과 함께 썰물처럼 빠져나간 군부 핵심 인원들. 파이 사령관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복도 너머 점점 멀어져가는 악다구니 소리.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최대한의 의지를 관철하려는 이들의 언성은 곧 파이 사령관의 귀에 잔향처럼 남았다.

“후우, 강경파 놈들 통제도 이젠 지긋지긋하군. 온건파 놈들은 아예 원탁 위에선 찍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있고.”

거친 굳은살이 올라온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파이 사령관.

군부 내에서 7할이 넘는 비율을 차지하는 강경파. 그들의 입에 걸린 고삐가 끊어진다면, 그래서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다면.

상상하기 힘든 최악의 파국은 들불처럼 걷잡을 수 없이 번지게 되고 말 것이었다.

의자에 몸을 깊게 묻은 파이 사령관. 결정권이라는 시한폭탄을 손에 쥔 그의 입에서 기운 빠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여름 전까지는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 만에 하나 있을… 별다른 외부 변수가 없다면.”

* * * *

대한민국의 최전선, DMZ(비무장지대). 정말 오래간만에 입어보는 전투복 야전상의, 정말 오래간만에 가 보는 군부대 시설.

“다 왔다, 민니. 이제 소원 성취했지?”

“히히. 갑자기 변덕 부려서 미안해. 그렇지만 꼭 한번 와보고 싶었어.”

내가 이곳에 온 까닭은 예비군 훈련이라든가 하는 것 때문이 아니다.

서울에서의 고풍스러운 궁궐 투어도, 대형 면세점에서의 쇼핑도, 그 나이 때 여자들이 좋아하는 맛집 탐방도 마다한 그녀, 민니 때문이었다.

“여기가… 최전방?”

“그래. 네가 좋아하는 군 시설이 바글바글해. 나는 질려서 쳐다보기도 싫지만.”

태국 상류층의 특징답게 화교 혈통이 진하게 섞인 그녀는, 어쩌면 아이돌 가수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환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잔망스럽게 손뼉을 치며 군 시설 여기저기를 쏘다니는 민니.

푸른 빛의 판문점부터 삼엄한 철책에 이르는 구간까지, 그녀는 모든 풍경을 눈에 담고자 애쓰는 모습이었다.

“자, 아까 봤던 곳은 판문점이고, 여기는 실제 군부대 안.”

“아, 그래서 군인 아저씨들이 총을 들고 서 있는 거구나. 여기저기 있는 군사 시설도 그렇고.”

본래대로라면 외국인인 민니는 이곳 군부대 안까지 들어오지도 못할 상황.

그러나, 외교부 측에 양해를 구하자마자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심지어 부처 간 협조 안 하기로 유명한 그 국방부 쪽에서도.

‘아마 대통령, 그 양반이 언질을 주었겠지. 일단은 협조할 수 있는 부분은 다 협조하라고.’

대통령.

지지율에 눈이 뒤집힌 그 양반이 보기에 내가 지금 하는 일이 마뜩잖아 보일 수 있다는 것쯤은 안다.

하지만… 회귀 전, 감방에서 만났던 옹박이.

‘쿠데타 때 옹박이 특급 에이스였다. 침투조에서 선봉 역할 했다.’

‘어따, 옹박아. 느가 아무리 군대 뻥을 씨게 쳐도 여기 있는 사람들 싹 다 안 믿어부러잉.’

‘방장님은 군 면제라 진짜 사나이들의 세계를 모른다. 조폭이어서가 아니라 너무 살쪄서 면제 아닌가?’

‘하, 나. 이 썩을 놈의 자슥이. 옹박이 너 이 새끼. 오늘 찐하게 매타작 한번 해야 쓰겄다.’

앞니 두 개가 빠진 채 훤히 웃음 짓던 그의 모습. 그리고 그가 말했던 태국 쿠데타.

그렇다면 지금, 태국 총리의 딸과 함께 단둘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이 시간은 곧 내게 기회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될 터.

나는 가지고 온 도시락 하나를 민니에게 건네고는, 근처 평평한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자, 배는 채우고 해야지. 그 군사 스파이 활동.”

“히히. 스파이 아니거든? 산업연수생 같은 거면 또 모를까.”

민니는 타고난 성격이 쾌활한 모양이었다. 장난스럽게 던진 스파이라는 농담을 정색 없이 그대로 받아준 그녀.

샌드위치를 하나 집어 든 앳된 소녀는 멍하니 철책선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진짜… 희한한 나라야. 여기.”

“한국이?”

“어. 수도 근처에 40만 명이 넘는 병력이 있는데, 쿠데타 가능성이 거의 없어. 그래서… 신기하면서도 뭔가 부럽고 그렇네.”

“이제는 문민통제로 군부 목줄을 쥐고 있으니까. 여기서 쿠데타는 상상할 수도 없지.”

문민통제라는 말에 부러움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민니.

아직 어린 나이여서일까?

생각했던 그대로 자신의 감정을 아무런 숨김없이 드러내는 그녀.

“아빠가 알면 좋아하겠네. 태국이랑은 완전 정반대니까.”

들릴 듯 말 듯, 바람결에 흘린 것처럼 작게 읊조린 혼잣말.

조금 슬픈 표정을 지은 그녀는 샌드위치를 다 먹고는 폴짝 바위에서 내려왔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 쓸쓸하게 내뱉은 한 마디.

“이제 다 봤으니까 가야지. 이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같이 와 줘서 진짜 고마워.”

바지춤에 묻은 흙을 툭툭 털고는 앞쪽으로 걸어가는 그녀.

오늘 하루, 함께 시간을 보내며 나는 확신했다.

민니, 잉탁 총리의 딸인 그녀가 보인 모든 언행은… 제 아버지의 근심이 날 것 그대로 고스란히 묻어나고 있었다고.

그렇기에, 확신을 가지고 그녀를 향해 말할 수 있는 고해성사.

“나와 여기 온 것만으로도 너희 아버님께… 아니, 잉탁 총리님께 도움이 될 거야 반드시.”

“너… 우리 아빠가 누군지 알고 있었어?”

사슴처럼 동그란 눈으로 깜짝 놀란 채 나를 바라보는 민니.

내게 그저 공무원 딸이라고만 자신을 소개했기에, 경계심이 한층 올라간 모습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불필요한 변명을 길게 늘어놓을 생각 따위는 없다.

한 발짝 그녀 앞으로 다가간 나. 나는 그저 무덤덤하게 할 말을 이어나갔다.

“민니 너, 다른 참가자들하고는 뭔가 다르더라고.”

“그게 무슨…?”

“서울 관광 명소란 명소는 다 재끼고 선택한 게 살벌한 최전방 투어. 계속 군 시설을 볼 때마다 메모하고 분석하는 모습까지.”

손에 쥔 노트를 뒤로 숨기는 그녀. 땅바닥을 향한 그녀의 동공은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마구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떨림에 쐐기를 박았다.

“아버님께서 많이 불안해하시나 봐? 태국 군부라는 광폭한 경비견이 언제 손을 물어뜯게 될지 몰라서.”

“…….”

말을 잇지 못하는 민니. 긍정의 말도 부정의 말도 쉬이 꺼내지 못하는 그녀의 머릿속은 분명 복잡함의 뭉게구름으로 가득 차 있을 터.

나는 지갑을 꺼내어 그녀에게 붉은색 종잇조각 하나를 건네었다. 탄약그룹 회장 직함이 적힌, 내 명함을.

“이건…?”

“진짜 내 이름, 그리고 진짜 내 직함. 아버님께 전해 줘. 그리고, 이 말도 함께.”

작은 손으로 내 명함을 꼭 쥔 민니. 의심과 호기심, 행여 있을 기대감으로 뒤섞인 그녀의 눈동자가 곧바로 나를 향했다.

“다다음 주. 서울에서 열릴 아세안 정상 회의. 그곳에서 꼭 따로 뵙고서 중요한 안건 하나를 말씀드릴 거라고.”

잠시 고민의 시간을 가진 후, 마침내 끄덕이는 민니의 고개.

풀리지 않는 군부 쿠데타라는 매듭을 단칼에 베어 버릴 수도 있다는 혹시 모를 희망.

그 길목에서 내 이야기를 듣는 것을 택한 그녀에게,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명확한 메시지를 던졌다.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들어야만 하는 메시지를.

“혈기에 미쳐서 날뛰고 싶어 안달이 난 사냥개들. 그들을 잠재울 방법. 내가, 그리고 탄약그룹이 가지고 있으니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