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장님의 핵몽둥이-104화 (104/300)

104화군부의 눈길을 돌리는 무언가(1)

“후우, 이제야 끝났네요.”

“어? 소녀의 순정을 짓밟고 기업의 이익만 추구하는 나쁜 남자다.”

우중충하게 비가 오는 날.

한-아세안 대학생 캠프가 막 끝난 늦은 오후. 별다른 휴식 시간도 없이 곧장 본사 건물로 달려온 나였다.

그러나 이게 웬걸.

회장 집무실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나를 반겨주는 것은 오로지 김원철 아저씨의 맥 빠진 소리뿐이었다.

“그건 또 무슨 억울한 소립니까? 안 그래도 머릿속이 복잡한데.”

“흐흐흐. 평범한 대학생 한원철 오빠가 갑자기 탄약그룹 회장이라면 놀랐을 것이잖어. 그것도 다짜고짜 일 이야기부터 했다니.”

어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간략하게나마 업무 공유가 된 상황.

옷걸이에 코트를 아무렇게나 걸친 나는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곧바로 내 귓가에 들려오는 김원철 아저씨의 목소리.

“어쩌면 민니는 한원철 오빠가 미울지도 몰러.”

“하, 그 한원철이라는 이름도… 아니지, 내가 계속 말리면 안 되지. 일단 민니 이야기는 차치하고요.”

부스럭, 직조 바구니에 담긴 초콜릿 껍질을 까고는 입 안에 되는대로 털어 넣는 나.

달콤한 당이 좀 들어오고 나니, 그제야 정신이 다시 멀쩡해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소득이 있었습니다. 막연한 추측을 확신으로 바꿀 수 있을 정도의.”

“일단 자세히 이야기를 들어 보자고. 그래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여?”

* * * *

툭, 툭.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방울을 메트로놈 삼아, 곧바로 술술 풀어지기 시작한 이야기보따리.

조만간 여름이 시작되자마자 다가올 태국 쿠데타. 여러 실마리를 엮은 나는 그것들을 한데 모아 하나의 직조물로 짜내어 김원철 아저씨에게 선보였다.

“태국 쿠데타라… 진짜 조만간 터질지 아닐지는 하나님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쪽 내부 사정이 영 꼬롬하다 이거지?”

“총리 딸이 직접 한국까지 와서 군의 문민통제 케이스를 찾는 걸 보면 말 다 한 거 아니겠습니까.”

어제저녁.

혈기에 미쳐서 날뛰고 싶어 안달이 난 사냥개들. 그들을 잠재울 방법을 가지고 있다며 자신한 나.

삼엄한 철책이 빙 둘린 최전방 지역 들판에서, 내 제안을 들은 민니는 잠시 눈을 내리깔고는 고뇌의 시간을 보냈다.

‘일단… 상황을 조금 정리하고 싶어.’

한참이나 뜸을 들이던 그녀.

서산 너머로 노을이 지고 산자락에 어둑어둑 그늘이 내려올 때가 되어서야, 조심스레 입을 여는 민니.

손에 꽉 쥔, 붉은색 내 명함은 그녀도 모르는 사이 조금 구깃구깃 주름이 지기 시작했다.

‘원철이… 아니, 서준이 네가 그리고 탄약그룹이 군부를 통제할 수 있다 했지? 도대체 어떤 방법이 있는 건데?’

‘당장은 말할 수 없어. 이쪽도 나름 복잡한 판돈 뭉치가 단단히 걸려 있는 상태니까. 하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긴장된 표정으로 내 입이 열리기만을 바라보는 민니.

확신에 진심을 담아, 그녀를 가만히 응시한 나는, 천천히 내가 내뱉어야 할 말을 꺼내었다.

‘잉탁 총리님이 수장으로 있는 태국 정부, 그리고 탄약그룹 회장인 내 이해득실이 일치한다는 것. 그것 하나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어.’

망설임의 알껍데기를 깨버리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는 민니.

의심의 여지가 없는, 그렇기에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 통했던 모양이었다.

어두워져 가는 풀밭 위에서 맞잡은 두 손. 이제… 필요한 사전 작업은 모두 마무리되었다.

앞으로 펼쳐질 아세안 회담, 이번 판의 본 게임에서 어떤 행보를 취해야 할지만 남았을 뿐.

“아무튼, 그래서 아세안 정상 회의의 포커스는 태국 쪽에 맞추시겠다?”

내 이야기를 모두 들은 김원철 아저씨는 쥐고 있던 만년필을 놓았다.

이래저래 고려해야 할 사안이 여럿 있었던 모양이다. 탁자 위에는 무언가 빼곡하게 적힌 종잇조각 하나가 놓여 있었다.

“잉탁 총리에게 호크아이 시스템을 팔 겁니다. 군부의 움직임을 손바닥 안에 넣고 실시간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감시자산을 말이죠.”

“음….”

뭔가 탐탁지 않은 듯한 얼굴의 김원철 아저씨.

호로록, 빨대로 망고 주스를 끝까지 흡입한 아저씨는 깜지 같던 종잇조각을 뒤집어 흰 바탕에 새로운 글씨를 써 내려갔다.

“흠… 그게 말이지. 우리 회장님이 꺼낸 그 안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어야. 그것도 아주 치명적인.”

쓱쓱, 종이를 사이에 두고 탁자의 나뭇결에 금속제 펜촉이 맞닿는 소리가 남과 함께, 천천히 쓰이기 시작하는 글씨.

날아갈 듯 휘갈겨 쓴 그 필체는, 내게 치명적이라는 두 가지 문제를 한눈에 간략히 보여주었다.

-① 태국 군부의 반발

-② 한국 대통령의 불만족

“먼저 ①번. 호크아이 시스템은 속된 말로 군부의 속사정을 싹 다 발가벗긴다는 것 아니여. 보급부터 병력이동까지 전부.”

“그래서 쿠데타 방지에 이만한 것도 없습니다.”

“그니까 태국 군부가 가만히 안 있겠지. 이건 숫제 날 잡아다 잡수쇼 하는 거니까, 먼저 당하기 전에 뒷빡을 때리려 들지 않겄어?”

곧바로 ①번 바로 옆에 가위표를 친 김원철 아저씨. 가위표 옆에는 쿠데타를 뜻하는 귀여운 탱크 그림이 그려졌다.

아래를 향해 내려간 만년필의 백금 펜촉. 뒤따른 내 시선은 ②번 앞에 멈추었다.

“그리고 ②번. 은근히. 아니지, 아니지. 아예 대놓고 속 좁고 계산적인 우리 대통령 각하 양반.”

“오, 아주 정확한 표현.”

속 좁고 계산적이라는 일침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 나.

곧바로 특유의 호리호리한 체형을 살린 대통령 캐리커처가 흰 종이 위에 그려졌다.

“저번에도 한번 말했지만서도, 이 정치 장사꾼 아저씨는 단순히 호크아이 시스템을 태국에 팔아먹은 정도로는 만족 못 할 것이여.”

“동남아 아세안 국가 전체에 팔면 모를까, 태국 하나로는 씨알도 안 먹히겠죠.”

“탄약그룹이 국위선양을 해서 자기 지지율을 좀 올려봐라, 뭐 그런 계산인 거 잘 알잖어? 그니까 이런 말 하기 뭣하지만서도….”

귀여운 탱크 그림과 대통령 캐리커처. 두 그림 사이에 선을 연결해 그은 김원철 아저씨는 나를 바라보며 조금 아쉬운 듯 입을 열었다.

“우리 회장님이 아까 말했던 안건. 이걸로는 뭔가 좀 부족하다 이거지. 그냥 디딤돌 정도라면 또 모를까.”

타당하다.

부족하기 그지없는 계획.

그저 호크아이 시스템을 태국에 팔아 쿠데타를 막겠다는 느슨한 계획 따위에 태국 군부도, 한국 대통령도, 그 어느 쪽도 호응할 리가 없다.

그렇기에… 슬그머니 지은 작은 미소.

“어! 어! 딱 걸렸어!”

군부 쿠데타와 대통령의 만족. 두 개의 물줄기를 건너기에는 그저 디딤돌에 불과한 내 계획.

그러나 디딤돌의 존재는 곧… 그다음으로 뛰어넘어갈 큼지막한 돌다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할 터.

이제 겨우 물가 앞에서 발목이나 걷었건만, 김원철 아저씨는 내 뒤에 희미하게 보이는 돌다리를 본 모양이었다.

곧바로 앞으로 몸을 기울이는 아저씨.

“흐흐흐. 뒤에 뭐 더 있지? 이젠 얼굴만 봐도 알아. 지금 딱 걸렸다니까?”

“이젠 진짜 귀신이네요. 독심술 같은 거라도 쓰는 겁니까?”

“회장님도 우리 박자옥 여사 같은 무서운 아낙네하고 반 평생 같이 살아 봐. 다 깨우치게 되어 있어야. 그래서 내가 하산한 것이고.”

결혼이라는 높은 산에서 모든 것을 깨닫고 하산한 김원철 아저씨.

도대체 뭘 깨달은 건지는 도통 모르겠지만, 여하튼 아저씨는 내게 빠른 대답을 바라며 재촉하기 시작했다.

“지금 나 화장실 가고 싶은 것도 참고 있는 거 알지? 얼른 말해줘야.”

“하, 갔다 와서 들으면 되는 걸 꼭.”

어쩐지 뭘 자꾸 많이 마시더니, 점점 다리를 오므리기 시작하는 모양새가 내 눈에 들어왔다.

괜히 집무실 내에서 불필요한 대형 사고를 야기할 필요는 없겠지.

홍차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나는 곧바로 이번 일의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혹시… 크라 운하라는 것. 들어보셨습니까?”

* * * *

-승객 여러분. 본 항공기는 이제 곧 한국의 인천국제공항에 착륙합니다. 모두 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어주시길 바랍니다.

자그마한 비행기 창문 너머로 저 멀리 보이는 인천 앞바다와 영종도의 모습.

철컥, 기장의 안내방송대로 허리춤의 금속제 벨트 버클을 멘 잉탁 태국 총리. 그의 얼굴은 평소보다 조금 더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총리님, 괜찮으십니까? 혹시 아까 기내에서 다소 과음하셨던 것이 아니신지…?”

“괜찮네, 괜찮아.”

고개를 가로저으며 비서관의 말에 대답하는 잉탁 총리.

그는 탁자 위에 놓인, 남은 황금빛 액체를 보란 듯이 들이켜며 대답했다.

“속이 답답해 위스키나 몇 잔 조금 마셨던 것뿐이야. 아무 문제도 없네.”

“…알겠습니다.”

조여지는 올무처럼 점점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군부의 쿠데타 위협.

잉탁 총리의 속은 답답함을 넘어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제아무리 독한 술로 씻어내려 한들, 씻겨질 기미가 일절 보이지 않는 자국만이 남은 채로.

“알겠네. 되었으니, 자네도 자리에 앉지. 슬슬 아래로 내려가나 보구먼.”

두둥실 떠가던 비행기에 조금씩 가해지기 시작한 끌어당김.

아래쪽으로 떨어지는 속력은 점점 박차를 가한 듯 빨라지고 있었다. 그의 심장 박동 소리와 함께.

“차라리 이대로 끝없이 내려갔으면 좋겠군. 그렇게 되면… 우리 딸이 슬퍼해서 안 될라나?”

얼마 전, 한국에서 아세안 국가 대학생들을 위한 캠프를 다녀온 그의 딸 민니.

문득, 잉탁 총리는 출국 직전 딸아이가 건네주었던 명함 한 장을 떠올렸다.

손아귀에 쥐기라도 한 듯, 조금 구깃구깃해진 붉은색 명함.

‘여기 이 사람. 아마도… 지금 아빠가 고민하는 걸 해결해줄 수 있을 거야.’

그게 무슨 말이냐고 재차 되물어도 정확한 대답을 주지 않던 그의 딸.

가슴팍 안주머니에서 그 명함을 꺼낸 잉탁 총리. 노안 탓에 돋보기안경을 쓴 그는 눈의 초점을 맞추어 거기 적힌 글씨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어디 보자. 탄약그룹 회장, 서준 한. 아무리 봐도 그냥 한국의 방산 쪽 전문 재벌 기업인데….”

기내에서 보좌진에게 들은 바로는, 이 젊은 회장이 조금 독특한 광폭 행보를 보인다는 것 외에 특이한 것이 없는 회사였다.

오히려 군부가 연상되는 방산 쪽 회사였기에, 막연한 거리감과 거부감이 들기나 할 뿐.

점점 커지는 엔진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은 잉탁 총리. 비행기의 머리가 땅바닥을 향해 내려가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며, 그는 기도하듯 무어라 중얼거렸다.

“민니, 그 기특한 녀석이 딴에는 제 아버지 생각한다고 어디서 인맥 닿는 대로 구해온 모양이구먼.”

그의 바지 주머니에 그대로 들어간 붉은색 명함.

쿵, 비행기 타이어가 단단한 콘크리트 활주로에 닿는 것을 온몸으로 받아낸 잉탁 총리.

불안하게, 그러나 어쩌면 시원시원하다는 느낌이 들 만큼 미끄러지듯 앞을 향해 나아가는 비행기.

자신도 제어할 수 없는 그 움직임에 운명을 맡긴 채로, 그가 무어라 한마디 말을 중얼거렸다.

“그래도… 혹시나 민니가 말한 대로 이 젊은 회장이 내 구원자 노릇을 해 준다면 바랄 게 없겠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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