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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의 핵몽둥이-105화 (105/300)

105화군부의 눈길을 돌리는 무언가(2)

누군가의 낮보다 아름다운 밤의 도시 방콕.

환락가의 네온사인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고층 빌딩의 루프톱 바.

술에 취한 채로 가장 높은 그곳에서 아래를 훤히 내려다보는 한 무리의 남자들. 그들은 장교 특유의 짧은 머리칼을 하고 있었다.

“어이, 계집들 잠깐 밖에 있으라 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갑자기 내려진 딱딱한 명령.

우두머리의 갑작스러운 지시에도 남자들은 반론 따위는 일절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각자 옆에 끼고 있던 여자들을 루프톱에서 내몰았다.

그리고 곧바로 뒤바뀐 분위기.

취기와 음욕이 섞인 몽롱함은 즉시 군부 강경파 특유의 규율 잡힌 엄숙함으로 대체되었다.

“파이 사령관께서 거사에 대해 여지를 주셨다. 얼마 전 원탁회의에서 결정된 일이다.”

“그게 정말이십니까? 드디어…!”

마른 들판에 불이 붙듯 한껏 달아오르던 군부 강경파의 모습.

흡족한 표정의 우두머리는 애써 근엄함을 유지한 채, 제 나름의 웅장한 서사시를 마저 이어나갔다.

“조용! 아직 끝까지 결정된 일은 아니다. 먼저 총리와의 협상이 있을 것이다.”

협상.

현재 군부가 손에 쥐고 있는 태국 내의 자원개발과 관련된 국영기업의 통제권.

광산부터 대규모 농업까지를 아우르는 국영기업 집단. 태국 경제의 피를 빨아먹는 이 탐욕스러운 기관은 필시 잉탁 총리의 눈에 개혁 대상으로 비추어졌으리라.

“아아….”

조금 실망한 듯한 수하들의 얼굴.

피식, 작게 웃음 지은 우두머리는 곧바로 탁자 위에 놓인 과일바구니에서 사과 한 알을 집어 들었다.

“물론 실망하기엔 아직 이르지.”

“장군님?”

터질 듯한 혈관이 점점 도드라지기 시작한 우두머리의 손등.

거대한 욕망만큼이나 커져만 가는 그의 손아귀 힘. 조금씩, 조금씩 군부의 힘에 짓눌려가던 붉은 사과는, 견뎌낼 수 없는 압력을 마주하자 퍼석 소리를 내며 터져 버렸다.

“이제껏 그 이상주의자 총리 놈이 제대로 된 협상안을 내놓았던 적이 있던가! 결국, 우리 군부가 궐기하는 수밖에. 그렇지 않은가!”

“장군님 말씀이 옳습니다!”

그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팔목 아래로 흐르는 달콤한 과실즙. 그리고 곧바로 이어진 사내들의 환호성.

그들 군부 강경파는 결코 포기할 생각도 양보할 생각도 없었다. 국영기업에서 흘러나오는, 마약 같은 과실즙에 취한 채 눈이 벌게진 그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술잔을 높이 치켜든 사내들은 제각기 욕망에 찬 건배사를 제창하기 시작했다.

“태국! 이 나라는 우리 군부의 나라다!”

“군부가 곧 정부고, 정부가 곧 군부인 세상! 군사 혁명 세력에게 다시없을 영광을 위하여!”

목이 터져라 부르짖는 군부 강경파 일동. 어쩌면 그들은 그 과실즙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쇠솥 바깥으로 끓어 넘치는 혈기. 방울진 그들의 폭력적인 핏방울은 이미 도를 넘어서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갈망하고 있었으니까.

주체할 수 없는 권력을. 그리고 가문 대대로 그에 뒤따르는 부와 명예를.

낮보다 아름다운 방콕의 밤.

그들만의 파티는 군부 강경파 우두머리의 마지막 건배사 외침으로 절정에 다다랐다.

“군홧발 아래에 순종하는 태국! 그리고 그 위에 마땅히 군림할 그대들을 위하여!”

* * * *

경복궁부터 시작해 시청, 숭례문을 거쳐, 서울역까지 이어지는 세종대로.

그 드넓은 도로 전체를 모조리 통제할 정도의 움직임. 검은색 차 한 대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주변의 호위를 받으며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난해하게 되었군.”

두꺼운 강철로 만든 차량 문턱에 팔을 괸 대통령. 그는 진한 코팅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고뇌 탓인지 한층 더 깊어진 이마 주름. 대통령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는, 곧바로 옆자리에 앉은 박동희 청와대 정책실장에게 물음을 던졌다.

“이봐, 임자. 이번 재보궐 선거 지지율은 계속 답보 상태 그대로인가?”

“예, 대통령 각하. 일전에 말씀드렸던 것 그대로, 초박빙 상황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쯧… 경기가 너무 안 좋으니 이 사달이 나는 겐가 보구먼. 이러면 분명 내년 지방선거에도 악영향일 터.”

지지율이라는 벌건 고깃덩어리를 먹고 자라는 선출 권력.

선거, 다른 말로는 표심을 얻어낼 무리 사냥에 실패한 우두머리는 더는 부족민을 이끌 자격을 잃게 되고, 종국에는 권좌에서 끌려 내려가는 법.

그 당연한 생리를 수십 년 전부터 뼛속 깊이 새긴 대통령. 그렇기에 그는, 지금 아세안 정상 회의 참석이라는 중차대한 외교 일정마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동남아 쪽 인간들이 딱히 위신을 세워 줄 깜냥은 안 되지 않은가 이 말이야.”

“아무래도… 큼지막한 건수가 있지 않은 이상, 이번 건으로 급격한 지지율 반등은 다소 무리로 보입니다.”

덜컹, 서울역 인근 도로가 조금 파인 모양이었다. 위아래로 조금 흔들리는 차량.

충격이 온 것은 비단 차량뿐만이 아니었다. 뒤이은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풀려버린 박동희 정책실장의 동공.

“이거야 원, 괜히 윤학길이를 솎아냈나 싶기도 하구먼.”

“윤학길… 말입니까?”

“그래. 그래도 그 친구가 선거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봤는데 말이지. 이거 오늘따라 유독 아쉬워.”

“……!”

차 안에 찾아온 묘한 정적.

이 서늘한 상황을 지켜보던 운전기사는 황급히 시선을 룸미러에서 떼고 정면을 응시했다.

손바닥에서 흘러나온 땀으로 젖은 박동희 실장의 양복 무릎.

그리고 정적의 부활을 암시하는 우두머리의 말에 도둑처럼 찾아온 내적 고뇌.

‘미치겠군… 상황이 이런 식으로 돌아가게 되면, 윤학길을 몰아내자 주장했던 내 입지가 불안해진다.’

혓바닥으로 메마른 입술을 축이는 박동희 정책실장.

좀처럼 돌아가지 않는 머릿속에서 그는 적당한 단어를 고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상관은 그 찰나의 시간조차 주지 않으려는 모양이었다. 곧바로 이 불쾌한 상황을 나뭇가지처럼 확장해가는 대통령.

“그러고 보니, 탄약그룹 말이지. 윤학길이 제거에 앞장섰던 그 핏덩이 회장 놈. 일전의 대학생 캠프 이후로 별 움직임은 없었다 했나?”

“오늘 회담 개최 몇 시간 전에 미리 나섰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별다른 특이사항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 그래? 이거 어처구니가 없군. 그 정도 깜냥밖에 안 되던 놈이 내 목에 칼을 들이밀었던 건가?”

아무런 분노의 감정도 섞이지 않은 채, 마치 대놓고 들으라는 듯 툭 내뱉은 대통령의 혼잣말.

창가에 비친 대통령의 시선은 아까와는 달리, 조금 왼쪽으로 이동해 박동희 정책실장의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기회다! 이렇게 되면 내가 각하의 분노를 뒤집어쓸 필요는 없을 터.’

그리고 제 주인의 의중도 모르는 채, 구원의 동아줄로 보이는 것을 향해 손을 뻗는 박동희 정책실장.

목마른 자가 정체 모를 샘물을 급히 들이켜듯이, 그는 재빨리 자신에게 튈 유탄의 방향을 다른 사람의 쪽으로 돌렸다.

“확실히… 한서준 회장, 그 어린 친구가 던진 돌 하나에 여럿 불편한 상황이 생기는 모양새입니다. 엄중 경고 조치가 필요하지 않을는지요?”

“허어, 임자도 그리 생각하나?”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각하. 제 이익을 위해서 어설프게 선거 정국에 영향을 끼쳤으니…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될 듯합니다만.”

“그래. 박 정책실장 생각은 그렇다 이거군.”

제 수하의 말을 신호탄으로 여긴 걸까?

시종일관 창밖을 바라보던 대통령의 몸이 정면을 향했다. 얼굴에는 비열할지언정 충분히 만족스러운 웃음이 걸린 채로.

“그러면 선거 끝나는 대로, 임자 이름 걸고서 사정 정국 드라이브 거세게 걸어 봐. 탄약그룹 승계나 탈세 쪽으로 싹 다 털고.”

“각하…?”

“화살받이로 쓸 놈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대통령 책임론 나오기 전에 여론을 돌려야 하니, 너무 늦지 않게 준비해 두고.”

하필이면 창밖으로 보이는 여의도 국회의사당의 풍경. 대통령은 정치라는 진흙탕 위에서 벌어지는 이전투구의 기술을 잊지 않은 모양이었다.

‘너구리 같은 인간… 애초에 노렸던 게 이거였군. 내 안위 따위엔 처음부터 관심도 없었던 게야.’

한탄하듯 끓는 속을 달래 보았지만, 이미 늦은 상황.

갑자기 떠안게 된 폭탄이었으나, 내던질 수도 없다. 박동희 정책실장은 일절 싫은 티를 내지 않고 그대로 명을 받들었다.

“…예, 각하. 각본부터 연출까지 뒤탈 없이 철저하게 진행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그건 임자가 수고해 줘.”

대통령을 태운 차량은 한강 다리를 건너 어느덧 여의도 내에 진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에 들어온 여의도 K 호텔 건물.

색유리를 이어 붙여 마치 갓 피어난 꽃을 연상케 하는 그 건물을 바라보며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갓 피어난 어린 친구가 쓴맛을 좀 보게 될 것은 안쓰럽지만, 뭐 별수 있나. 애시당초 과욕을 부렸던 제 탓이지.”

“참으로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대통령 각하. 한서준 회장도 다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배워가는 것일 테고요.”

“그래. 이제 슬슬 내려야겠군. 아니, 잠깐만, 잠깐만….”

운전석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려는 기사를 말리는 대통령.

그의 눈에 보이는 호텔 정문 앞 풍경, 그곳에는 도저히 상상하지 못했던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환한 미소를 띤 채, 젊은 한국인 남성의 손을 꼭 잡고 흔들고 있는 잉탁 태국 총리의 모습.

“잉탁 총리? 저 사람이 어째서? 굳이 바깥까지 나와서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깐깐하기로 이름 높은 잉탁 총리.

그는 태국 경제에 깊게 관여된 어지간한 일본계 거대 기업 회장과의 만남도 가지지 않던 것으로 유명할 정도였다.

주변을 둘러싼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그의 모습.

불현듯 떠오른 대통령의 의구심이 해소된 것은, 구름처럼 몰려든 인파 너머로… 탄약그룹의 주인, 한서준의 얼굴이 보인 후부터였다.

“한서준… 회장?”

등줄기를 타고 곧바로 머리끝까지 올라오는 직감.

아무런 판단 근거 없이도 대통령은 느낄 수 있었다. 방금까지 정교하게 짜둔 정치적 방정식은 한순간에 쓸모없는 물거품이 되었다는 것을.

“이봐, 정책실장!”

“예, 대통령 각하! 지금 바로 조사해서 보고 올리라 지시하겠습니다!”

새로운 변수에 맞추어진 새로운 방정식. 대통령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정치적 수를 하나하나 미지수에 대입하기 시작했다.

“한서준, 한서준… 그 잉탁 총리와 저 정도의 관계라면 분명 큰 이슈거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일 터.”

현장에 있던 청와대 직원들로부터 곧바로 올라온 약식 보고.

곧바로 차량은 일부러 기존에 정해두었던 자리를 피해 빙 둘러 주차장으로 향했다.

점점 멀어져가는 새로운 가능성의 풍경을 바라보며 대통령은 홀로 무어라 중얼거렸다. 이제는 반쯤 확신으로 변한 자신의 직감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한서준이 저놈… 어쩌면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의 거목(巨木)일지도 모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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