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군부의 눈길을 돌리는 무언가(3)
서울 아세안 회의의 D-day가 밝아왔다.
시골이었으면 새벽닭이 우렁차게 목청을 드높였을 이른 시각. 나는 김원철 아저씨와 함께 본사 건물 꼭대기 회장 집무실에 와 있었다.
“암만 생각해도 이거 잘못 생각했던 것 같어야. 그냥 양평에서 낚시나 할 걸, 이 나이에 꼭두새벽 출근이라니.”
눈 밑에 짙은 그늘이 내려앉은 김원철 아저씨.
입이 댓 발로 튀어나온 걸 보아하니, 어지간히 피곤이 쌓였던 모양이다.
한-아세안 캠프에서 민니와의 작별 이후, 내가 고안한 생각을 현실로 옮기기까지 실무 총괄은 아저씨가 다 했으니까.
아저씨를 달래는 방법으로는 달달한 것이 최고다. 나는 작은 냉장고에서 휘핑크림이 잔뜩 올려진 뚱뚱한 마카롱 한 박스를 꺼내며 말했다.
“물고기 낚는 것보다 사람을 낚는 게 더 보람 있는 것이다, 뭐 그렇게 생각하시죠.”
“무슨 예수랑 베드로 설화여? 나중에는 이스라엘까지 일 벌일 기세네. 사해에는 물고기 안 살아서 안 갈 것이여.”
“이스라엘 언저리까지 가긴 너무 멀고요. 적당히 덜 피곤하게 갈만한 곳이라면 태국 아니겠습니까.”
어느새 게 눈 감추듯 사라져버린 뚱뚱한 마카롱 한 박스.
나는 대충 티슈 두어 장을 뽑아 김원철 아저씨에게 건네며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 이번 일 잘 끝나는 대로 조만간 태국 출장이나 한번 가시죠. 회사 차원에서 요트 하나 대절해서 바다낚시도 하고요.”
“태평양 바다낚시… 이러면 또 내가 일을 빡시게 안 할 수 없지. 엇차!”
마카롱과 바다낚시라는 당근 두 개에 호랑이 기운이 솟아난 김원철 아저씨.
아저씨는 곧바로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 최종 결과물 내용이 적힌 서류철을 내게 내밀었다.
“일단 이론상으로는 완벽하긴 해. 우리 회장님이 말했던 그것. 물꼬만 트이면 될 겨. 물론 그 물꼬를 트는 게 만만치 않으니 문제고.”
“이론만 완벽하면 그만입니다. 걱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요.”
팔락, 서류철을 열어 종이 한 장 한 장을 넘기며 자신감에 웃음 짓는 나.
내 생각대로 제반 환경이 갖추어졌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다시 그 보고서를 김원철 아저씨에게 되돌려주며 말했다.
“그 물꼬. 아마 저쪽에서 먼저 트고 싶어 할 겁니다.”
“에이, 그래도 일국의 총리가 가오가 있지. 그 일단 이번 회담 기간 동안 최대한 그룹 차원에서 로비를 하자고.”
그간 쌓아둔 탄약그룹 로비력에 대해 일장연설을 시작하는 아저씨. 나름 만반의 준비를 마친 듯, 지구본까지 빙글빙글 돌려가며 목청을 드높이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본사의 태국 지사 인재풀을 총동원해서 로비전을 벌이는 방법은….”
그리고 그 순간, 벌컥 소리를 내고 열린 문.
미어캣처럼 고개를 들고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니, 거기에는 옆방에 있던 유세나 보좌관이 다소 놀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어… 할 필요가 없어진 건가, 설마?”
어리둥절한 모습의 김원철 아저씨.
설마 했던 그것이 현실로 다가오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는지, 어느덧 입가에 고여버린 침방울 하나가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새벽 다섯 시 반. 딱 비행기 내리자마자 연락이 온 걸 보니, 잉탁 총리도 양반은 못 되나 봅니다.”
소파에서 일어난 나는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며 기지개를 켰다.
어느덧 동이 터 오는 시간. 유리창 너머로 들이치는 햇빛에 눈을 조금 찌푸린 유세나 보좌관 역시 조금 당황한 모습이었다.
방금 일어난 상황에 대해 내게 해설을 요구하는 그녀.
“회장님? 잉탁 총리 측 전화인 건 어떻게 아셨는지…?”
“뭐, 그렇게 됐습니다. 나더러 만나자고 하던가요?”
“예. 혹시 괜찮으시다면 아침 7시 이전에 만나 뵐 수 있냐고 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후, 곧바로 어깨에 걸쳐진 양복 재킷.
왼쪽 손목을 조금 돌려, 째깍거리는 시곗바늘을 바라본 나는 미소를 지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다가올 성공을 자축하는 가벼운 발걸음을.
“예상했던 것과 딱 맞네요. 오늘 일찍 출근하길 잘했습니다 바로 이동들 하시죠.”
* * * *
여의도 K 호텔 스위트룸. 조각조각 이어 붙인 색 유리창 앞에서, 새벽녘 동이 터 오고 있었다.
반쯤 구겨진 붉은 명함을 만지작거리는 잉탁 총리.
“총리님, 조간 현안 보고 시간입니다만.”
“되었네. 물러가게나. 적어도 지금은… 오로지 이 일에만 집중하고 싶군.”
아래 보좌진들에게서 새벽녘부터 쏟아지는 태국 국내 사정에 대한 보고가 있었지만, 그는 귀를 닫고 손을 휘저었다.
군부의 불온한 움직임, 점점 파행으로 치닫는 국영기업의 운영, 빈부격차와 경제위기까지.
군부라는 거대한 암세포. 그것을 도려내지 않는다면, 태국 국내 사정은 자신이 있든 없든 늘 똑같은 악순환의 고리 속에서 헤엄칠 것을 알기에.
“속는 셈 치고 만나보는 이가, 알고 보니 쿠데타 경력자였을 줄은 꿈에도 몰랐군.”
조간 보고를 받는 대신 잉탁 총리는 보좌진들에게 평소와 다른 무언가를 지시했다.
어떤 한 사람에 대한, 빠르고도 정확한 신상 보고를.
아세안 회의에 대비하기 위해 파견된 정보부 인원이 전부 달라붙어 파악한, 붉은 명함 속 탄약그룹의 수장.
“쿠데타를 막을 방법이 있다더니, 본인이 사우디에서 쿠데타를 기획했어? 기가 막힌 작자로구먼. 아니, 어쩌면….”
보고서 서류에 끼워진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을 한 손으로 펄럭거리는 잉탁 총리.
사진 안에는 황금 권총을 들고서, 사우디의 빈 살만 왕세자와 함께 승리의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피식, 총리 자신도 모르게 새어 나온 웃음. 그러나 그 웃음 속에는 비웃음의 의미도 야유의 의미도 일절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호기심, 그리고 막연한 기대감만이 그의 머릿속을 탑돌이처럼 빙빙 맴돌며, 방콕 황금 사원에 놓인 불상(佛相)과 같은 미소를 얼굴에 띄웠을 뿐.
“그래서인지 더욱 호기심이 도는군. 도대체… 이 젊은 남자가 내게 무슨 제안을 던질 것인지 말이야.”
“총리님. 예의 그 인물이 방금 도착했다고 합니다. 들어오라고 할까요?”
보좌진의 질문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잉탁 총리. 그의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굳게 닫혀 있던 응접실 문이 열렸다.
끼익, 금속제 경첩이 맞물리고 난 후, 곧바로 카펫을 밟고 다가오는 구둣발 소리.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붉은 명함의 주인. 잔뜩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총리는 천천히 거친 손 한쪽을 내밀며 말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딸아이에게서 대략적인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서준 한 회장.”
* * * *
들판의 허수아비처럼 빼빼 마른, 어찌 보면 왜소하기까지 한 체구. 콧잔등에는 도수 높은 안경을 걸친 이 중년의 남성은 첫인상부터 심히 안색이 나빠 보였다.
극도의 스트레스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내 눈에도 훤하게 보일 정도인 잉탁 총리의 얼굴.
하기야, 언제 총칼을 든 군인들이 그 거친 군홧발로 문을 박차고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살고 있는 그다.
그리고… 그 쿠데타라는 불쾌한 불안감은 올해 여름이 되면 곧 현실로 다가올 것이 명확한 상황.
“서준 한… 회장?”
형식적인 인사와 함께 맞잡은 그의 손. 그러나 그 거친 손아귀에는 어떤 힘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무력감과 허탈함으로 온몸이 가득 찬 이가, 눈을 질끈 감은 채로 마지막 패를 던지는 것처럼.
“처음 뵙겠습니다, 총리님. 우선… 지금부터 저지를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거두절미하고 꼭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패를 받은 내가 해야 할 것은 명확하다.
“많이 두려우셨을 겁니다. 잉탁 총리님. 그렇지요?”
수렁 속에 빠진 이가 탄식을 내뱉으며 던진 패. 내가 해야 하는 것은, 요행을 바라듯 내민 그 손에 구원의 확신을 불어넣는 일뿐.
힘없이 맞잡은 두 손. 나는 손아귀에 힘을 주어 그의 앙상한 불안감을 거세게 움켜쥐며 말했다.
“군부의 쿠데타.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 검은 그림자를 홀로 버텨내시느라 정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이보시오, 한 회장. 지금 무슨 그런 말씀을….”
당황한 듯한 모습의 잉탁 총리.
충분히 결례임을 알고 있으나, 나는 그의 말허리를 도중에 잘라버렸다.
“군부 강경파의 움직임을 손바닥 보듯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통제 시스템.”
곧바로 불필요한 미사여구 없이 곧바로 직구처럼 던져진 본론.
유약함을 깨기 위해 던져진 공은 충분히 강한 파열음을 내며 총리에게 닿았다.
“……!”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 총리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쿠데타의 공포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넘어, 군의 문민통제라는 숙원까지 전부.”
그리고 그것은… 잉탁 총리에게 있어 어떠한 뇌홍 역할을 한 것이 분명했다.
이제껏 젖은 화약처럼 구차한 연기만 내뿜던 그의 내면. 다가오는 군홧발의 파도 속에 다시는 피우지 못하리라 여긴 것에 폭발적인 불꽃을 달릴, 그런 역할을.
목젖 너머로 무력감을 삼킨 잉탁 총리. 잠깐의 침묵이 지나간 후, 그는 내게 짤막한 질문 하나를 던졌다.
“…그게 가능한 겁니까? 태국이라는 나라에서?”
“가능합니다. 기술적으로는.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호크아이 시스템.
작전부터 보급까지, 군부의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는 IT 기술.
그러나 분명, 군부라는 집단은, 특히 그 가운데 강경파들은 이 거대하고 질긴 목줄을 찰 것을 격하게 거부할 터.
그렇게 한번 사나운 투레질을 끝낸 그들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향할 곳은, 분명 잉탁 총리가 있는 공관이 될 것이었다.
“불가능할 테지요. 정치라는 영역에서는. 하지만.”
그렇기에 말미에 덧붙인, 묵직한 단서 하나.
“지금 저는 그 불가능을 가능케 만들 방법 또한 가지고 왔습니다.”
서류 가방에서 꺼내 든 지도 한 장.
내 손가락은 태국 전역이 표시된 그 지도의 가장 위쪽에서 점점 좁아져 내려가는 아래쪽을 향하고 있었다.
“맹견에게 목줄을 채울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먼저 먹잇감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입니다.”
좁은 띠처럼 생긴 땅으로 분리된 태평양과 인도양. 나는 붉은 펜을 꺼내어 직선 하나를 그렸다.
누가 보더라도 국제 물류의 흐름을 뒤바꿀 수 있는, 최고의 요지 한가운데에 그려진 선.
“저희 탄약그룹과 함께 운하 건설을 담당할 국영기업을 하나 만드십시오. 군부 강경파가 마음껏 들어가 이권을 탐낼 수 있는.”
“여기는….”
속칭, 크라 운하.
이제껏 수많은 건설 시도가 있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무산되었던 초대형 프로젝트.
분명 군부는, 이 프로젝트가 재개된다면 운하 건설을 위한 국영기업에 눈독을 들일 것이다. 이제껏 자신들이 해왔던 것처럼.
그리고… 그 익숙함 속에 숨어있는, 호크아이 시스템이라는 함정.
“피에 굶주린 맹견이 게걸스럽게 뼛조각을 씹어 먹는 동안, 그리고 거기에 눈이 뒤집혀 다른 것을 보지 못하는 동안.”
군부와 끈끈하게 연계될 국영기업. 문민통제의 서막은 그곳에서부터 오를 것이다.
아차 하는 순간, 휘하의 말단기관이라 생각했던 곳에서부터 올라온 시스템은 필시 본체에 닿을 것이기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들의 목에는 질긴 목줄 하나가 걸려 있을 겁니다. 이제는 절대 벗을 수 없는. 그래서 주인을 물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되는 목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