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쿠데타의 전조(1)
여의도에 핀 벚꽃이 만개한 4월의 어느 날.
바람결에 흩날리는 꽃잎이 무색하게 보일 만큼, K 호텔 앞에 장식된 여러 빛깔의 천 조각은 그 화려한 위용을 마음껏 뽐내고 있었다.
붉은색과 푸른색, 흰색과 검은색. 아세안 각국의 국기 색 배합을 따라 물감을 흩뿌리듯 물들인 삼베 장막.
단청 아래를 지나가듯, 천천히 장막 아래 문을 지나 로비로 이동한 카메라는 제 눈이나 다름없는 촬영용 렌즈를 중앙 연단으로 향했다.
-서울에서 열린 올해 아세안 회의에서는 각국의 외교적 이슈 이외에도 경제적 사안 또한 깊게 논의되었다고 합니다.
수많은 인파로 빼곡히 들어찬 그곳. 카메라 바로 앞에는 앳된 얼굴의 여성 기자 한 명이 마이크를 쥔 채로 원고를 읽고 있었다.
-특히나 이제껏 국제적으로 논의만 분분했던 태국의 크라 운하에 대한 공사. 태평양과 인도양을 잇는 대공사를 탄약그룹이 수주했다는 소식입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귀에 걸린 인이어에 손을 가져다 올리는 여성 기자.
방송국 데스크에서 무언가 지시라도 내려온 것일까?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잠시 카메라에 비쳤다. 그리고 그녀는 곧바로 뒤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하던 말을 마저 이어나갔다.
-네. 지금 바로 태국 잉탁 총리와 탄약그룹의 한서준 회장이 MOU(양해각서)를 체결한다고 합니다. 지금 바로 현장 연결하겠습니다.
* * * *
-찰칵! 찰칵! 찰칵!
터져 나오는 카메라 플래시 소리.
연단 위에 선 채로, 환한 미소를 지은 세 명의 주인공들.
태국 총리와 탄약그룹의 회장이 주체가 되는 계약이건만, 대통령은 부득불 추가로 한 사람 몫의 주인공이 되어야만 했다.
맞잡은 두 주인공의 손. 그 모습을 중간에 선 채 흐뭇하게 바라보는 대통령은, 언론 앞일지라도 특유의 묘한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한서준이 이놈 참 물건이군. 애국심 자극용 이슈를 이런 식으로 끌고 오다니.’
벌써 연단 아래에서 손을 치켜들며 허가받지도 않은 질문에 열을 올리는 기자들.
동아시아 해상 운송로를 뒤집어버리는 일대 혁명에 후끈 달아오른 그들은, 분명 지금 이 순간에도 기사로 전국을 뒤덮을 것이 분명했다.
거대 담론으로 고양된 애국심에서 비롯된, 정부 지지율이라는 태아를 잉태하면서.
‘하지만… 조금 의아한 부분은 있다. 왜 호크아이 시스템을 태국에 판다는 것을 여름까지 비밀에 부치라고 요청한 것이지?’
축하용 케이크를 함께 자르며 옆에 선 탄약그룹의 수장을 곁눈질하는 대통령.
플라스틱 칼이 중심을 가르자 흰 생크림을 여러 겹 덧붙여 칠한 케이크의 안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한국의 사과와 배, 홍시가 들어간 1단을 지나, 태국의 망고와 구아바, 리치를 함께 버무린 2단 케이크.
대통령은 그 속에 든 것이 무엇일지는 전혀 예상조차 가지 않았다. 마치 태국 정부와 탄약그룹이 맺은 MOU(양해각서)의 은밀한 내용처럼.
“네! 크라 운하라는 세계적 대공사의 시작이 오늘 이 자리에서 첫걸음을 띄웠습니다. 그러면, 우리 대통령님께서도 한 말씀 안 하실 수는 없겠지요?”
때마침, 시의적절하게 앞으로 나선 사회자.
미리 행정관들로부터 언질을 받은 모양이었다.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분위기를 띄워놓은 그는, 은근슬쩍 마이크를 대통령에게 넘기며 발언을 자연스레 이끌어냈다.
“대통령님, 여기 한서준 회장님이 오늘 축하 말씀 못 들으시면 집에 안 가신답니다!”
“하하… 그렇게 되는 건가요? 일단… 다들 지루하실 테니, 그럼 짧게만 말하겠습니다.”
괜한 점잔을 빼고는 곧바로 연설을 이어나가는 대통령.
한국과 태국, 그리고 동아시아 전역의 번영으로 시작된 주제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국내 선거 이슈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아주 노골적이지는 않을지언정, 듣는 이가 누구든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발언.
“우선… 크라 운하 공사에 필요한 모든 지원에 대해, 우리 정부는 최대한의 편의를 보장할 것을 약속드리는 바입니다.”
연단 위, 대통령의 뒤편에 걸린 거대한 전광판.
대통령의 발언이 시작됨과 동시에 곧바로 화면 속 영상은 시시각각 변해가기 시작했다.
동북아시아의 작은 한반도에서 출발한 거대한 컨테이너선. 바다를 가르던 중 갑자기 나타난 육지에 멈춰버린 선박의 모습.
클로즈업된 선원들의 난감한 표정과 꺼진 엔진이 어두운 분위기를 연출해내는 그 순간.
갑자기… 마법처럼 가로로 끊어져 버린 육지.
“따라서! 지금 이 역사적인 순간을 미래에도 이어나가기 위해서, 우리 국민들께서도 많은 지지와 성원을 주시길 당부, 또 당부드립니다!”
순식간에 육지 한가운데에 난 곧은 물길.
크라 운하를 통해 미끄러지듯 운하를 가르는 컨테이너선의 모습이 점점 멀어져갔다.
하늘 위로 올라가는 앵글의 높이만큼, 점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둥근 지구의 모습.
태양 빛을 받아 환해진 지구의 한반도 상공이 다시 클로즈업됨과 동시에, 화면 속에는 목이 터져라 부르짖는 대통령의 얼굴이 가득 찼다.
“미래를 향한 도약! 세계를 향한 전진! 우리 대한민국이 함께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국으로 생중계되고 있는 대통령의 선거 운동 아닌 선거 운동.
대통령은 앞쪽 행정관들이 앉은 곳을 바라보았다.
한껏 상기된 표정의 홍보 수석. 자타공인 연출 쪽 최고 전문가인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만족스러운… 승리의 신호로 약속했던 격한 끄덕임을.
‘성공이다!’
지지율을 걸고 벌이는 지지부진한 샅바 싸움에서 무게추를 뒤집기 시작한 대통령.
연단에서 내려오자마자, 마치 변검처럼 대중들에게 보이는 얼굴을 지운 그가 박동희 정책실장에게 물었다.
“어때, 괜찮던가?”
“완벽합니다, 대통령 각하! 지금 여당에서도 각하께서 큰 기술을 거신 것에 대해 감사하다는 인사가 오고 있습니다!”
“방심하지 말고 지지율 체크나 끝까지 하도록. 그나저나….”
뒤를 돌아 아직 환하게 빛나는 연단을 바라본 대통령.
그곳에는 해일처럼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 속에서, 홀로 꼿꼿이 선 채로 넉살 좋게 응답하는 누군가가 있었다.
“한서준 회장님! 크라 운하 공사의 시작은 언제부터라고 보면 되겠습니까?”
“태국 내에서 컨소시엄을 구성한다는 설과 국영 합작기업을 만든다는 말이 도는데요. 어떤 형태로 진행되는 겁니까, 회장님?”
여유와 패기, 두 가지가 넘쳐흐르는 듯한 환한 웃음.
실타래처럼 엉킨 복잡한 감정을 속으로 정리하며, 대통령은 그의 모습 가운데 가장 정치인다운 판단을 내렸다.
“한서준이 저놈은 끝까지 달고 갈 가치가 있겠군. 사정 정국은 당분간 없는 일이 되어야겠어.”
“…바로 수사기관에 중단하라는 지시를 내리겠습니다. 각하.”
“그래 그렇게 하지.”
다음 일정을 위해 차량에 올라탄 대통령.
한강 다리에 들어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순식간에 멀어져가는 여의도.
습관처럼 창가에 가만히 기댄 채로, 빛나는 그 섬을 뒤돌아본 대통령은 불현듯 떠오른 감정을 혼잣말로 내뱉었다.
무언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는 한데, 그의 직감은 가능하다고 외치는 것을.
“그건 그렇고… 저 크라 운하. 정말 진행되긴 할 건지 모르겠군. 뭐, 어차피 내 임기 도중에 완공될 리는 없으니 상관없긴 하지만.”
* * * *
김원철 아저씨는 머리가 좋다.
매일같이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어딘가 나사 빠진 말을 내뱉는 것으로 봐서는 영 어울리지는 않지만 말이다.
“크하, 이게 인생이지. 세상에 어디 메여 살 필요가 없걸랑. 그냥 바닷바람 따라 해류 따라 흘러가는 것이 인생이여.”
한 손에 맥주캔을 쥔 채로,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는 요트 선미에 앉은 김원철 아저씨.
총리와의 회담이 끝난 후, 태국 출장이나 가자는 그 지나가듯 던진 말을 아저씨는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회사 차원에서 대절한 요트도. 그리고 그놈의 꿈에 그리던 바다낚시도.
“보니까, 별로 잡은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요트에서 하는 바다낚시가 그렇게 좋으십니까?”
이곳은 태국 남부. 푸켓 인근의 바다 한가운데.
사실 이곳에 온 이유는 마냥 극락 체험을 하려고 온 것만은 아니다.
공식적인 출장 목적으로는 크라 운하가 들어설 예정지의 탐방이었으니까.
“흐흐흐. 원래 노는 것은 회삿돈으로 해야 행복한 것이여.”
“어련하시겠습니까. 뭐, 그래도 약속한 게 있으니 일단 지키긴 합니다만.”
“그게 회장의 자질인 거지. 아 참, 그나저나 성원식 본부장 그 양반 말이여.”
선베드 위에 앉아 꼬치구이를 질겅거리며 내 물음에 대답하는 태국판 신선.
낄낄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행복에 겨운 김원철 아저씨가 입을 열었다.
“그 양반은 불쌍해서 우째? 기껏 태국까지 와서 별로 놀아보지도 못하고.”
“노는 사람이 있으면 고생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니까요. 그리고 본인이 사서 하는 고생이니, 제가 뭐 어떻게 할 수도 없습니다.”
태국 남부, 말레이시아 접경지역 정글 한복판에 가 있는 성원식 본부장.
중공업, 건설, 조선 해양 3사의 총괄 역할을 맡은 그는, 이번 일을 자신이 도약할 계기로 삼은 모양이었다.
‘제게 실무와 관련된 모든 것을 맡겨 주십시오, 회장님.’
‘너무 대형 프로젝트인데… 계열사 수십 개가 달라붙는 총괄 업무입니다. 가능하겠습니까?’
우려 섞인 내 물음에 오히려 초롱초롱 눈을 빛내던 성원식 본부장.
그는 자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내게 반문했다.
‘회장님께서 건설, 중공업, 조선해양 3사를 묶어 통합 인프라 계열사를 만드실 생각이시지 않습니까?’
‘제 속 읽는 것 하나는 귀신이시네요.’
‘이번에 제게 능력을 입증할 기회를 주십시오. 거대한 공룡 규모의 인프라 회사를 제대로 굴릴 수 있는 재목인지를 시험하는.’
그렇게 승낙이 떨어지자마자, 곧바로 공항에서 차를 타고 정글로 들어가 버린 성원식 본부장.
이제는 온전히 내 충복이 된 그였다.
“뭐, 덕분에 기술적인 부분이야 알아서 해결되고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긴 하지. 아무튼, 이대로라면 예상했던 대로 착착 진행되겠네. 운하도 파고 쿠데타도 막고.”
“쿠데타는 못 막습니다. 일어나는 것 자체는 말이죠.”
“그래. 쿠데타는 못 막고… 어, 어… 뭐라고?”
딸그락, 쥐고 있던 낚싯대를 갑판 위에 떨어트린 김원철 아저씨.
충격이 컸는지 턱 끝으로 질질 흐르는, 입 안에 머금고 있던 맥주.
“아니, 그게 무슨 소리여? 쿠데타 못 막으면 합작 국영기업은 뭐 어떻게 하게? 그리고 호크아이 시스템으로 움직임 싹 다 볼 수 있는 거 아니었어?”
“볼 수는 있겠죠. 하지만, 실제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과 보기만 하는 것은 다르니까요.”
나는 머릿속으로 눈에 밟히는 문서 하나를 생각했다.
얼마 전, 태국 총리로부터 받은 정보기관 보고서.
군부 강경파의 직위와 권한, 그리고 최근 동향이 적힌 그 보고서가 말하는 바는 명확했다.
끓는 피를 주체하지 못하는 이들은… 크라 운하와 관련된 국영기업으로 눈을 돌릴지라도, 반드시 총칼을 들고 일어날 자들이라는 것을.
“하지만… 쿠데타가 일어난들, 불발로 그치게는 만들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