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쿠데타의 전조(2)
원탁에 둘러앉은 군복 입은 사내들. 어깨 위에 내려앉은 별은 흐릿한 전깃불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그들이 품고 있는 거센 욕망처럼.
“장군님, 잉탁 총리 그놈이 어제 자로 귀국했다고 합니다.”
“나도 봤다. 썩은 고기 조각 같던 얼굴이 무슨 일인지 다시 환하게 폈더군. 딴에는 나름 성과를 냈다 여긴 모양이야.”
“제깟 놈이 성과를 세워봐야 별 게 있겠습니까? 시원찮은 허풍이나 치고 다녔겠지요.”
아직 군부 내의 강경파들만 먼저 자리를 채운 원탁.
그들 가운데 최선임으로 보이는 이는 허리춤에서 묵직한 권총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한쪽 눈을 감은 채로, 벽 위쪽에 걸린 잉탁 총리의 초상화를 겨냥하며.
“뭐, 어차피 잉탁 놈의 정권이 뒤집어지기만 하면 하등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딸각, 장전되지 않은 총의 방아쇠가 당겨지자 곧바로 작동한 둔탁한 노리쇠.
흠집 하나 나지 않은 초상화였지만, 오히려 총알에 찢긴 것보다 더욱 모욕적인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장면을 본 군부 강경파 세력 일동의 웃음소리.
“흐흐흐. 저 말라깽이 총리 놈 머리통에 시원한 바람구멍이나 빨리 냈으면 합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탱크를 몰고 총리 관저로 달려갈 수도 있는데, 장군님 전용 특등석 자리 하나 비워두라 하면 되겠습니까?”
그들에게 있어 잉탁 총리는, 태국의 민주정 체제는 그저 한낱 시답지 않은 것에 불과했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한낱 유희 거리로 쓰기에 적당할 정도로.
“파이 사령관님 입장하십니다! 일동 차렷!”
거친 사내들의 웃음소리가 멈춘 것은 그때였다.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기계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군부 강경파 세력.
곧바로, 군부 온건파 세력과 함께 원탁에 앉은 파이 사령관.
“전부 모였나 보군. 앉지.”
습관처럼 콧수염을 쓸어 넘기며 원탁에 앉은 이들의 면면을 눈에 담는 그의 모습.
육중한 압박감이 얼마간 이어진 후에야, 파이 사령관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방금, 총리님을 뵙고 오는 길이다.”
“……!”
“짧은 시간이었으나, 많은 논의가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군부 강경파의 동요하는 모습에도 일절 흔들리지 않는 파이 사령관.
그는 태국 지도가 그려진 문서 한 장을 원탁 위에 올리고는 하던 말을 마저 이어나갔다.
“군사 혁명은, 쿠데타는, 오늘부로 이젠 더는 없던 일이 될 것이다.”
“사령관님! 그럴 수는…!”
쾅! 손바닥으로 거칠게 원탁을 짚고 일어선 군부 강경파의 우두머리.
붉게 상기된 그의 얼굴을 응시하는 파이 사령관. 아무런 말 없이도 기세를 꺾어 놓은 그의 턱짓에 강경파 우두머리가 주춤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제야 마저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파이 사령관.
“크라 운하. 공사부터 완공 이후 운영까지, 모든 것을 총괄할 국영기업. 그것이 우리 군부의 손에 들어올 것이다.”
크라 운하, 그리고 그것을 관장할 국영기업이라는 말에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 온건파와 중도파.
그들의 머릿속 계산기가 이해득실의 결괏값을 내놓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크라 운하라면… 분명 수에즈 운하나 파나마 운하 급이 될 텐데? 그러면 공사 자재 리베이트만 해도 얼마지?”
고전적인 수법으로 이익을 취하려는 자와.
“에헤이! 이 친구, 지금 그깟 푼돈이 문제인가? 저건 마르지 않는 샘물이야! 합법적인 선박 통행료만으로도 차고 넘친다고!”
좀 더 먼 미래를 내다보며 장밋빛 전망을 그리는 이까지.
막대한 이권과 그에 파생되는 부스러기들로 시끌시끌해진 원탁.
물론 그 뒤바뀐 환경 속에서 갑작스레 소외된 이 또한 있었다.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총리 놈이 감히 얕은수를 쓰다니…!”
그 소란스러움 속에 군부 강경파 우두머리는 공식적인 발언권을 잃었다.
그저 두 주먹을 쥔 채 벽에 걸린 잉탁 총리의 초상화를 보며 분노를 삭이고 있을 뿐.
“공사와 관련된 제반 기술은 한국의 탄약그룹에서 제휴될 것이다. 그 부분만 제외하면 나머지는 전부 군부의 자율에 달려있다.”
할 말을 모두 마쳤는지 곧장 자리에서 일어선 파이 사령관.
문밖을 향하는 그의 발걸음이 잠시 멈춤과 동시에, 강경파 우두머리 어깨 위에 파이 사령관의 거친 손이 올라왔다.
“이번 협상은 결코 돌이킬 수 없다. 그러니, 자네도 이제 그만 그 혈기를 좀 식히도록.”
“…….”
“행여나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일은 없었으면 하고. 늘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남들이 듣지 못할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충고 하나를 남기고 떠난 파이 사령관.
그것을 신호로 여긴 모양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군부 내의 온건파, 그리고 눈치만 보던 중도파까지. 그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새끼 오리처럼 파이 사령관의 뒤를 따랐다.
쓸쓸한 원탁에 휑하니 남겨진 자들은, 오로지 강경파뿐이었다.
“장군님, 이제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잠시 기다려라.”
침울한 표정으로 군부 강경파 우두머리의 눈치를 보는 부관.
군부 내 힘의 무게추가 갑작스럽게 기울어진 이 상황에서, 더는 강경파가 설 자리는 없었다.
무언가… 단 한 번에 이 모든 상황을 뒤집어엎을 카드가 없는 한은.
“아래 후배들에게 전달해라. 열흘 후, 항상 모이던 그곳으로 집결하라고.”
그리고 강경파의 우두머리는 그 독 발린 카드를 뽑지 않을 수 없었다.
목이 잘려 죽을 위험은 엄청나게 커졌으나,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그는 서서히 말라죽을 수밖에 없었기에.
“그리고, 하나 더. 그날 자리에 참석할 놈들은…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할 자들만 나올 자격이 있다는 것까지 전하도록.”
* * * *
‘이야, 이제 좀 쉴만한데 그새를 못 참고 한국 끌려가는 겨? 흐흐흐. 이것도 다 본인 팔자인 것이여.’
‘하아, 뭐 어쩌겠습니까. 안 갈 수도 없는 상대인데 말이죠. 거기에 해야 할 일도 있고요.’
태국에서의 달콤한 꿀 같던 휴가는 그다지 오래 가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나 혼자만 오래 가지 못했을 뿐이지, 김원철 아저씨나 유세나 보좌관을 비롯한 인원들은 아직 태국 앞바다에 정박한 요트에 있는 상황.
“오, 한 회장. 이번 재보궐 선거 승리의 주역이 드디어 납시셨구먼.”
“초대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대통령님.”
간만의 휴가를 즐기던 나를 불과 이틀 만에 다시 서울로 불러온 사람.
청와대 영빈관 앞뜰에서 내게 술잔을 건넨 대통령. 그는 곧바로 유리잔에 붉은 포도주를 따르며 말했다.
“자네는 타고난 장사꾼이야. 국민에게 자부심을, 내게는 지지율을 팔았지. 그것도 시의적절한 때에 딱 맞춰서.”
호화로운 야외 만찬. 부드러운 찬사의 말까지.
지금이야 이런 대접을 하지만, 선거 결과가 불만족스러웠다면 어떤 행보를 보였을지 눈에 선하다.
몇몇 사정 기관에 심어둔 연락책들에게서 들었던 찝찝한 소식들.
‘한 회장님. 나 국세청장입니다. 묘한 소식이 있어요. 청와대에서 탄약그룹 세무조사 준비를 하라고 해놓고, 갑자기 스톱시켰지 뭐야.’
작게는 국세청부터.
‘크흠, 사실 저희 검찰에도 비슷한 지시가 있긴 했습니다. 뭐, 한 시간도 안 돼서 전부 철회되었지만.’
굵직하게는 검찰 단계까지.
분명 대통령은 자신 대신 책임을 뒤집어쓸 어린양으로 나를 지목했을 터였다. 만약 성공하지 못했다면.
“그러니 한 회장 자네는 이곳에 있을 자격이 되지. 편히 즐기다 가게나.”
“아직 편히 즐기기에는 뭔가 하나 빠진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온전히 믿지 못하기에, 결코 등을 맞대지 못하는 관계.
겉보기에는 불편해 보일지언정, 오히려 이런 관계가 업무적으로는 깔끔하다.
특히나… 밀린 외상 대금을 받아내는 데에는 더더욱 그러하고.
포도주가 담긴 유리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은 나는, 곧바로 대통령의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장사꾼에게 있어 가장 기쁜 시간은 정산하는 시간 아니겠습니까?”
“계산 하나는 철저하구먼.”
“제가 약속드렸던 것은 전부 지켰습니다. 모두가 행복한 윈-윈 게임의 마무리는 이제 하나만 남았고요.”
그런 말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음 짓는 대통령.
오른손을 올린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로, 대기 중이던 박동희 정책실장에게 무언가를 지시했다.
“이봐, 정책실장. 준비해 둔 것.”
“예. 대통령님. 여기 있습니다.”
일전에 이야기가 오갔던 것인지, 곧바로 금색 봉황 무늬가 새겨진 결재판 하나를 꺼낸 박동희 정책실장.
종이 위에 만년필 펜촉이 닿아 서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완성된 대통령의 자필 서명.
“필요한 부분은 이제 실무자 선에서 알아서 편의를 봐줄 걸세.”
“신속하고 확실한 결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기회가 닿을 때마다 우량 고객으로 모시겠습니다.”
“이거야 원, 정치판 생활하면서 대놓고 이런 식의 거래는 또 처음이구먼. 해서, 추가로 바라는 건 더 없나?”
깍지 낀 두 손으로 턱을 괴고는, 재미있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대통령.
이번 일로 나름의 효용성이 입증되었다고 느껴서일까?
그는 어떻게든 내 발목에 족쇄 아닌 족쇄를 걸어두고 싶은 눈치였다.
“…당장은 괜찮습니다. 그저 태국 크라 운하 건에 대한 수출입은행 지원만 적시에 이루어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당장 필요하지도 않은 빚을 끌어 쓸 생각은 없기에, 그저 당연한 것을 재확인하듯 던진 말 한마디.
그러나… 대통령은 그것을 조금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듯했다.
마치 난해한 수수께끼를 접한 것처럼 알쏭달쏭한 그의 표정.
“잠깐, 잠깐. 수출입은행 지원이라니? 설마 한 회장 자네, 정말 그 크라 운하 건을 진행하겠다는 건가?”
태평양과 인도양을 잇는 크라 운하. 그 막대한 사업성에도 불구하고 늘 실체화에 실패한 이유는 명확했다.
태국 남부, 이슬람 반군의 준동. 그리고 분리 독립 세력.
“이거 젊은 친구에게 내 너무 부담을 주었나 보군. 그 부분은 괘념치 말게. 어차피 내후년쯤 공사가 엎어진들 국민들은 다 잊은 후일 터이니.”
그렇기에 크라 운하에 선거용 이벤트 이상의 기대는 일절 한 적이 없었던 대통령.
어차피 나중에 백지화될 사업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그의 계산식은 일견 타당했다. 워낙 복잡하게 엉킨 실타래처럼 단단히 꼬인 곳이었으니까.
그러나.
“내후년이라. 저는 그것과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다르게 생각하다니, 한 회장, 그게 무슨 소리인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대통령의 얼굴.
지금 이자에게 모든 것을 말해줄 필요는 없다. 그저… 앞으로 내가 입증해나갈 일을 보여주기만 하면 충분할 터.
나는 남은 포도주를 모조리 입에 털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통령에게 있어 영 영문 모를 말 한마디만을 남긴 채로.
“내후년 이맘때쯤이면, 아마 공사가 절반 정도 끝나 있을 겁니다. 만일 그때도 지지율이 필요하시다면 다시 연락 주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