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쿠데타의 전조(3)
방콕 인근의 모 오두막집.
차를 타고 외곽으로 20여 분간을 더 달려야 나오는, 인적이 드문 어느 마을.
평소 보지 못했던 낯선 사내 몇몇이 하나둘씩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제 전부 온 건가.”
“예, 장군님.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저희 모두는… 숭고한 대의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좋다. 시작하지.”
군의 보안시설이라도 되는 걸까?
겉보기에는 쓰러져가는 오두막이었지만, 그 안에는 군사 작전에 필요한 첨단 장비가 들어서 있었다.
굳은 표정의 사내들.
군부 강경파 중에서도 가장 과격하기로 정평이 자자한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허리춤에서 뾰족하게 날 선 칼 한 자루씩을 꺼내었다.
그리고는 마치 미리 합을 맞추기라도 한 듯, 곧바로 칼로 자신의 손바닥 한가운데를 긋는 그들의 모습.
“태국의, 우리들의 조국을 위한… 새로운 군사 혁명을 위하여!”
“군사 혁명을 위하여!”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커다란 무명천 위에 손바닥 도장을 찍는 군부 강경파 일동.
흰 도화지처럼 아무것도 없던 무명천 위에는, 그들의 붉은 핏물로 찍어낸 결의의 증표가 흉측하게도 자리해 있었다.
“이제 더는 돌아갈 길은 없다. 알고들 있겠지.”
“각오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지금이라도 빠지고 싶은 자는 저 문밖으로 나가라.”
미동조차 하지 않는 강경파 일동. 상기된 그들의 얼굴에는 고양된 감정이 그대로 녹아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시간이 조금 지나, 검붉은색을 띤 혈서(血書)를 아련하게 바라보는 강경파의 우두머리.
그는 고개를 들어 수하들의 눈을 하나하나 맞추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바지에 오줌이나 지릴 겁쟁이는 없나 보군.”
“그럴 놈이었으면 애당초 이곳에 올 생각도 않았을 겁니다, 장군님.”
긴장감을 억누르기 위해 애써 호탕한 척을 하는 그들.
한바탕 억지로 쥐어짠 웃음소리가 가시고 나자, 드디어 본론을 꺼낸 강경파의 우두머리.
“좋다. 그렇다면 나는 여기 남은 그대들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세부 계획을 모두 밝히겠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장군님!”
곧바로 탁자 위에 올려진 전장 상황도.
지휘봉을 든 강경파 우두머리의 손이 그림 아래쪽 태국 남부 지방을 향했다.
크라 운하가 들어설, 바로 그 지점에.
“여기는 운하 공사 예정지 아닙니까? 이곳은 어째서…?”
“현재 크라 운하 국영 기업의 모든 물자 수송부터 인력 동원은 우리 쪽 세력이 맡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날, 총리와의 협상으로 강경파가 버려졌던 때. 적선하듯 파이 장군이 던져준 작은 이권.
군부 내에서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위상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모욕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목제 지휘봉에 잔뜩 들어간 힘. 떨리는 손으로 방콕부터 운하 건설 예정지까지의 철도 구간을 가리킨 우두머리가 말했다.
“우리는… 이를 철저히 역이용한다. 군사적으로.”
“장군, 역이용이라면…?”
“건설 자재 대신 무기를, 공사 인부 대신 병력을 수송한들 저들이 바로 알지는 못할 터.”
“……!”
태국의 행정 관리는 보통 아날로그식 수기로 되고 있었다.
비록 한국의 탄약그룹이라는 회사에서 전산화 작업을 한다고 하지만,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 예상되는 판국.
“분명 총리 놈은 한 번쯤은 크라 운하 현장에 모습을 비칠 것이다.”
“아…!”
거대한 국책사업인 크라 운하.
거기에 민주정 체제로 뽑힌 총리인지라, 지방의 여론도 신경을 써야 하는 상황.
너무나도 완벽하게 짜인 이 판은 마치 한 조각을 남긴 퍼즐처럼 보였다.
그 마지막 조각이… 강경파 세력에게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올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바로 그때가, 군사 혁명의 방아쇠가 당겨질 시기이다. 전체적인 골자는 이렇게 돌아갈 것이다.”
* * * *
태국, 방콕 총리 관저.
총검이 꽂힌 긴 장총을 어깨에 멘 사내들. 잉탁 총리는 늘 그들을 두려워했다.
공관을 지키는 것을 빌미로, 그의 이마 한가운데에 납탄을 욱여넣을 수 있는 자들.
그러나.
“그나마 다행입니다, 총리님. 파이 사령관과 이야기가 잘 통했으니.”
“뭐, 당장 머리통에 바람구멍이 날 일은 없게 되었으니 말이지.”
피식, 작은 미소를 지으며 부관의 말에 농담으로 대답하는 잉탁 총리.
더 이상 그에게 총리 공관은 창살 달린 새장이 아니었다.
늘 빛조차 들어오지 못하게 두껍게 쳤던 커튼마저, 이제는 전부 걷어버렸을 정도로.
한낮의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나무 탁자 끄트머리를 매만지며, 잉탁 총리는 며칠 전 파이 사령관과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긴장한 그의 귀에 들려온, 군인 특유의 굵은 저음 목소리.
두꺼운 손으로 콧수염을 쓸어내린 파이 사령관이 말했다.
‘제안 주신 선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저희 군부는 해당 내용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크라 운하 건설과 운영을 맡을 국영기업.
그 모든 권한을 군부에 준다는 말에 한참이나 고민하던 파이 사령관.
서류에 적힌 세세한 사항을 모조리 검토한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긍정의 표시였다.
‘온건파에 이어 중도파까지. 군부 핵심 인원 대부분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겁니다.’
‘파이 사령관, 혹시 강경파 세력까지 전부 안전하게 가져간다는 것은… 내 욕심인 겁니까?’
볼이 푹 팰 정도로 마른 몸의 잉탁 총리는 자신과 반대되는 거구의 사내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겉껍질은 질문의 형식을 하고 있지만, 그 속내는 책임을 지우는 것이었다.
군부 강경파.
이번 크라 운하에 관한 이권을 군부가 먹고자 한다면… 반드시 그들의 입에 멘 고삐를 바싹 조이라는 의미의 책임을.
‘강경파까지 포섭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하지만…?’
‘놈들이 목줄을 끊고 선을 넘는다면, 그리고 총리님께서 그놈들을 제압하신다면.’
두꺼운 양손을 깍지 낀 채, 탁자 위에 턱을 괸 파이 사령관.
군부라는 거대한 집단 전체를 생각해야 하는 이답게,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뒷말을 덧붙였다.
‘향후 있을 수 있는 불미스러운 일. 그것에 대한 총리님의 처분에, 군부는 그 어떤 이의도 달지 않겠습니다.’
귓가에 메아리처럼 울리는 파이 사령관의 말.
어느덧 회상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난 잉탁 총리. 창가로 걸어가 바깥 풍경을 바라본 그가 무어라 작게 중얼거렸다.
“숫제 막는 것은 나더러 알아서 하라는 것이로군. 곰 같이 생긴 사람이 속은 여우일세.”
톡톡, 손가락으로 창틀을 몇 번 두들긴 잉탁 총리.
생각의 바다에서 치는 물장구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뒤를 돌아 비서관을 향해 지시했다.
“그 호크아이 시스템. 곧바로 국영기업에도 적용 가능하다고 했지?”
“예, 총리님. 아예 기본 전산 자체를 호크아이 기반으로 한다고 했습니다.”
“적용까지 기간은 얼마나 걸린다고 했나?”
“이것저것 행정 절차까지 감안한다면… 두어 달쯤은 걸릴 것 같습니다.”
탁상 위의 달력에 표시된, 벚꽃 모양으로 장식한 숫자 4.
두꺼운 달력 종이를 두 장 넘긴 잉탁 총리는 만년필 하나를 꺼내 들고는 6월의 어느 날에 진한 표시를 새겼다.
서울에서 자신의 손을 잡아주었던 이가 일러준, 가장 적절한 시기를.
‘총리님께서 스스로 미끼가 되십시오.’
‘한서준 회장? 지금 그게 무슨 말인지…?’
‘방콕 공관에서 불확실한 때를 기다리고 있느니, 차라리 대놓고 타이밍을 주시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가령, 예를 들자면.’
달력에 적힌 D-day 표시.
코를 찌르는 진한 잉크 냄새를 맡으며, 잉탁 총리가 웃음 지었다.
‘총리님 홀로 수도를 떠나, 지방 일정이 잡혔을 때라든지 말입니다.’
한층 비장해진 총리의 눈빛.
건너편 비서관을 바라본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마치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처럼.
“그럼 운하 착공식은 6월 15일로 하지. 중앙군의 남부 지역 훈련이 갓 끝난… 바로 마지막 날에.”
* * * *
두 달이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흘러갔다.
이제는 봄의 따스함이 후덥지근함으로 바뀌어버린 6월의 여름.
지금 내 앞에는 얼마 전, 태국에서 돌아온 성원식 본부장이 선 채로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크라 운하 공사 예정지는 말레이시아와의 접경지대 쪽으로 확정되었습니다, 회장님.”
지난 두 달여간 동남아시아 정글에서 살다시피 하며, 현장에서 모든 업무의 총괄을 맡았던 성원식 본부장.
하얗던 얼굴은 어디로 간 건지, 새카맣게 탄 그의 피부색은 그간의 고생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말하고 있었다.
“열대우림 지형에 중간에 산맥이 있긴 하지만… 현재 탄약그룹이 가진 기술이라면 별다른 무리 없이 진행이 가능합니다.”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기대 이상으로 잘해주셨습니다. 무엇보다.”
상당히 공들인 티가 나는 보고서.
특히나 맨 후반부에 위치한 내용은, 내 입꼬리를 올라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호크아이 시스템의 민수 분야에 대한 완전한 적용 및 분석.
앉은 자리에서 현장의 모든 상황을 실시간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스템.
크라 운하를 위한 국영 기업에 갓 적용된 이 시스템은 바로 이곳, 서울의 내 집무실에서도 작동할 수 있었으니까.
“벌써 저쪽 군부 강경파의 움직임이 훤히 보인다는 것이 가장 마음에 듭니다.”
모니터 한쪽 구석에 빨간색으로 깜빡이는 불빛들.
철도를 이용한 자재와 인력 수송에 이상이 있다고 감지된 신호는 내게 계속해서 경고 시그널을 보내고 있었다.
“창고 내의 자재 현황은 그대로이고, 추가로 고용한 인부도 없네요. 그런데 이 정도의 물동량이라면… 답은 하나뿐일 테고.”
쿠데타.
그 사전 준비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현장.
내 앞에 선 성원식 본부장 역시 돌아가는 사정을 정확히 알고 있기에, 내게 공감의 의사를 표했다.
“회장님께서 생각하신 그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태국 군부 강경파가… 단단히 일을 벌일 계획인 듯합니다.”
“예견된 일이었으니까요. 자, 그럼.”
자리에서 일어나 여름용 양복 재킷을 걸친 나.
서랍에서 여권을 꺼낸 나는 곧바로 호출 벨을 눌러 비서실 직원에게 지시를 내렸다.
“전용기 준비하세요. 며칠 내로 태국에 갈 겁니다.”
“회장님…? 잉탁 총리와 더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걱정과 우려의 감정이 얼굴에 온전히 드러난 성원식 본부장.
거울을 보며 넥타이를 고쳐 맨 나는, 싱긋 웃음 지으며 그에게 애매한 대답을 주었다.
“제가 설계한 판이니, 끝맺음도 제가 해야겠지요.”
운명의 장난인지 갑작스레 내게 다가온 태국이란 나라는 조금 특별했다.
내 회귀 이전의 기억과 함께 맞물린, 군부 쿠데타와 크라 운하. 이 두 가지는 내게 기존 역사와는 다른 세상을 열게끔 만들었으니까.
“그리고, 겸사겸사 잉탁 총리와의 유대감도 좀 더 쌓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크라 운하… 분명 탄약그룹의 미래를 위한 발판이 될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