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태평양과 인도양을 잇는(1)
낯선 천장이다.
그냥 어디 삼류 소설에나 나올 그런 대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진짜 문자 그대로 눈을 떠보니 낯선 천장이 눈앞에 있었다. 제법 고급스러운 병원 스타일의 인테리어로 된.
“회장님! 회장님, 괜찮으신 거예요?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해 보세요!”
“크헉…!”
그리고 갑자기 조여오는 숨통.
폭탄 파편에 폐나 심장을 다쳤다거나 해서가 아니었다.
감정의 파도에 휩싸여 목 근처 경동맥을 꽉 쥐고는 앞뒤로 흔드는 유세나 보좌관.
요새 취미로 스포츠 클라이밍을 한다고 듣긴 했다만, 그녀의 굳은살 박인 손아귀 힘은 생각보다 한층 더 거셌으니까.
“일단… 일단, 이것 좀 놓고 말 하시죠. 저도 숨은 쉬어야 하니까요. 쿨럭! 쿨럭!”
가까스로 생명의 위협을 물리친 후, 나는 곧바로 천천히 고개를 숙여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어디 보자.
팔다리는 각각 두 개씩, 손가락 발가락도 스무 개 다 떨어져 나간 곳 없이 전부 무사하고. 복부나 허리에 수술 흔적도 보이지 않는 상황.
아무리 멀리서 터졌다지만 폭탄 사고에 휘말렸는데, 사지 육신이 멀쩡하다니. 자잘한 찰과상이야 몇 있다지만, 이것만으로도 기적이 아닐 수가 없다.
“전반적으로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은데… 혹시 거울 있으면 좀 주시겠습니까?”
다만, 거울 속에는 머리에 핏자국 묻은 흰 붕대를 감고 있는 내 모습이 들어있었다.
무언가 다른 사람이 보았을 때, 조금… 많이 아픈 것처럼 보일 정도로.
“내가 어떻게 된 거랍니까?”
“의사가 말하기를… 회장님께서 그때 폭발 당시에 머리 쪽에 충격이 온 것이라 합니다.”
CT나 MRI 같은 정밀 검사에서도 문제가 없다는 의료진의 소견.
아마 폭발의 후폭풍 때문에 잠시 정신을 잃었던 정도에 그친 모양이었다.
‘문제는 잉탁 총리인데.’
전대미문의 자살 폭탄 테러 사건을 겪은 잉탁 총리.
비록 그가 죽거나 다치는 일은 없었지만, 감정이 격해져 무언가 예상 밖의 사달이 난다면 그것도 그것대로 곤란한 상황.
‘괜히 군부 전체에 대해 대규모 숙청 시도라도 했다가는 운하 공사 자체가 중단될 수도 있다.’
추후 있을 이런저런 시나리오에 따른 대응책을 고심하고 있던 내 모습이 걱정이라도 된 걸까?
내 쪽으로 몸을 기울여 눈을 글썽거리는 유세나 보좌관.
“회장님…? 정말 괜찮으신 거 맞으시죠?”
“아, 괜찮아요. 검사에서 이상 없으면 그대로 퇴원하면 되겠네요.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아니! 지금 몸도 성치 않으신데, 무슨 일을 또 하신다고…!”
안 그래도 동그랗던 눈이 꽃사슴처럼 더 둥글둥글해진 유세나 보좌관.
그녀의 만류에도 급히 환자복을 벗은 나는, 병실 한쪽에 세워둔 전신거울을 바라보며 셔츠 단추를 아래쪽부터 채워나갔다.
초조해진 마음 탓인지, 유독 잘 매어지지 않는 작은 단추들.
조금 부은 손가락으로 맨 위쪽 마지막 단추를 채우며, 나는 거울 너머 당황한 표정의 유세나 보좌관에게 지시를 내렸다.
“후우… 일단 빨리 상황을 판단해야 합니다. 유세나 보좌관, 지금 바로 잉탁 총리 측하고 연락해 주세요. 최대한 빨리 약속을 잡자고….”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서준 한 회장님.”
“……!”
거울에 비친 시야 바깥에서 들려오는 탁한 남성의 목소리.
태국 억양이 강하게 섞인 영어로 말하는 그 목소리는 분명… 잉탁 총리의 것이었다.
예상 밖의 전개에 조금 놀라 고개를 돌린 나. 바깥쪽 문 앞에는 수행원들조차 대동하지 않은 채, 홀로 과일 바구니를 든 잉탁 총리가 서 있었다.
“총리님? 여긴 어떻게…?”
“애초에 그 폭탄 테러 이후, 저는 쭉 이곳 태국 왕립 병원에서만 있었으니까요.”
잠자는 숲속의 공주라도 된 것처럼, 내가 정신을 잃었던 시간은 꼬박 하루하고 반나절.
일국의 국가원수 위치에 있는 사람이, 그것도 쿠데타 후처리라는 중차대한 작업을 미루고 내가 깨어나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짓는 잉탁 총리.
기왕 은혜를 입힐 것이면 확실하게 입히자고 벌였던 일이기는 한데… 이거 효과가 어지간히 강한 모양이었다.
“정치적 동반자 역할을 넘어 생명의 은인까지 되신 분을 두고서, 저만 혼자 가버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한 발짝 한 발짝 나를 향해 다가오더니, 이내 내 손을 움켜쥐는 잉탁 총리. 꽉 잡은 그 손에는 평소와 다른 감정이 격하게 실려 있었다.
불필요한 미사여구 따위 없이, 그저 풍겨오는 느낌만으로도 나는 그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이 사람… 은원관계 하나는 확실한 사람이구나 싶은 것을. 특히나 이런 식의, 단순 비즈니스 관계를 뛰어넘는 경우에는 더더욱.
“그럼 이제… 따로 이야기를 나누시겠습니까? 그때 못다 한 이야기에 더해 한 회장님께 진 빚을 갚는 것까지 전부.”
* * * *
‘성의를 더 보이게. 더 큰 성의를.’
환청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제임스 왕 이사의 귓가를 울리는 정치 노괴의 목소리.
새로운 권력자의 스승인 베이징의 거물. 그 음흉한 노인은 노골적으로 엄지와 검지를 둥글게 말아 보였다.
세상 모든 탐욕을 모조리 빨아 마시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어르신이. 아니, 그 미친 작자가 원하는 것은… 단순히 돈으로만 생각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낮말과 밤말을 어떻게든 들어대는 새와 쥐. 그들의 소굴인 베이징을 떠나 상하이에 도착하자마자, 옌룽은 솔직한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주군께서 속해 계신 상하이 쪽 세력, 새로운 권력인 베이징에 굴종하는 모습을 명백하게 보이라는 것이 골자가 아니겠습니까?”
“나 또한 알고 있다.”
차에서 내려 상하이 푸둥 지구의 고층 건물로 들어선 두 사람.
통유리로 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양쯔강의 반짝이는 야경을 바라보는 제임스 왕 이사.
“제 놈들의 위신을 세울 것, 그와 동시에 막대한 부를 바칠 것.”
자신들의 세력이 일군 그 빛나는 진주 위의 흙탕물이 눌어붙은 더러운 손.
중국의 중앙 정계 한복판에 있는 탐욕의 항아리. 그 밑 빠진 독에 한가득 물을 채우지 않는다면, 조만간 저 아름다운 진주는… 그들의 손아귀에 넘어가게 될 터.
유리창에 손바닥을 올린 제임스 왕 이사. 그는 바깥 풍경을 움켜쥐기라도 하듯 손아귀 가득 힘을 주었다.
“베이징 돼지들은 요구사항도 참 많지. 뱃속에 이어 허영심까지 채워주어야 하지 않은가.”
“…주군 말씀이 참으로 옳으십니다.”
유리에 비친 제 주인의 표정을 곁눈질하는 옌룽. 제임스 왕 이사의 얼굴에는 분노와 패배감이 실타래처럼 한데 엉겨 있었다.
평소 감정의 기복이 거의 없던 그였기에, 더욱 깊어 보이는 이마 자락에 팬 골.
“저 아름다운 상하이를 돼지 먹이로 줄 수는 없다. 그리고, 굳이 바깥에서 먹이를 구해야 한다면.”
그리고, 베이징이라는 태산을 넘지 못한 그 분노와 패배감의 물결은 뚫려 있는 곳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집무실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긴 제임스 왕 이사. 그는 늘 그러하듯, 습관처럼 소파 위에 누워 천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목재를 깎아 조각한 동아시아 지도. 대륙 바깥으로 빠져나온 동쪽과 남쪽의 두 반도를 향해.
“탄약그룹. 그리고 크라 운하. 이 정도면 베이징에 던져 줄 제물로서 적합할 것이다. 거기에 한서준 그놈에 대한 징벌까지도 같이.”
“태국 쪽 화교 네트워크를 움직여 보겠습니다. 분명 중앙정치에 간섭할 수 있을 만한 여력이….”
장기간의 고지전을 머릿속에서 계획한 옌룽.
분명 평소 자신의 제안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였던 주군이었다. 그렇기에 자신 있게 내놓은 해결책.
그러나.
“그걸로는 부족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조금 더 적극적인, 다소 잡음이 일어도 괜찮을 만큼 공격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도록. 예를 들자면.”
톡, 톡. 상아로 만든 팔걸이에 손가락을 두들기는 제임스 왕 이사.
지도 남쪽으로 향한 시선이 번득이자, 무언가 떠오른 듯 그가 입을 열었다.
“태국 남부 쪽 이슬람 분리독립세력 군벌들이 있지 않던가.”
“주군, 그자들은…!”
예상치 못한 말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옌룽.
그런 그의 반응 따위야 일절 개의치 않다는 듯, 제임스 왕 이사는 하던 말을 묵묵히 이어나갔다.
“그들의 수장과 자리를 한번 주선해 보도록. 여기에는 그 어떤 반론도 허용치 않겠다.”
* * * *
다시 돌아온 한국.
비행시간이 다소 늦어졌기에, 귀국하자마자 바로 집무실에 가는 일은 없었다.
물론 나는 밤늦은 시간에도 업무를 보는 것은 크게 상관없긴 했지만… 유세나 보좌관이 옆에 딱 붙어 있었기에 휴식을 권고받은 상황.
‘하아, 회장님. 퇴원하신 지 열두 시간도 안 되었습니다. 의사가 말한 대로 적어도 내일까지는 쉬셔야 해요. 제발요.’
물론 그런 말이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이 인지상정인 법이다.
회사 근처에 잡아둔, 사랑방 겸 임시 숙소인 오피스텔.
비밀번호 여덟 자리를 누르고 들어가니, 거기에는 술 냄새와 함께 미리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고작 며칠 안 봤다고 반갑게 손을 흔드는 그 남자는.
“오, 폭탄맨.”
“제가 왜 폭탄맨입니까. 태국 폭탄맨한테 죽을 뻔한 피해자라면 또 모를까.”
“이제부터 폭탄주 마시면 폭탄맨 되는 거지. 흐흐흐, 유세나 보좌관 붙어 있으면 술도 못 마셨을 거 아니여.”
다짜고짜 큰 컵 가득 양주에 맥주를 섞어 내 앞에 내미는 김원철 아저씨.
일단 받은 술을 들이켠 나는 셔츠 소매로 입가를 닦고는 입을 열었다.
“크흐, 좀 낫네요. 의사 말은 들어야 하는데, 막상 살다 보면 들을 수가 없습니다.”
“바른생활 어른이는 삶이 재미없는 법이여. 아무튼, 잉탁 총리 그 양반하고 얘기는 잘 풀렸고?”
“보시는 대로. 깽값치고는 나쁘지 않게 받은 것 같습니다.”
나는 머리에 감은 붕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피식 웃음 지었다.
이 정도 부상으로 얻어낸 것이 제법 컸으니까.
에어컨 때문에 몸이 조금 으슬으슬했기에 나는 술 한 잔을 더 마시고 나서야 하던 이야기를 마저 이어나갔다.
“잉탁 총리가 그러더군요. 사실 자신은 크라 운하 공사에 진심이 아니었다고. 그냥 군부 통제용 임시방편이었다고 합니다.”
“그거 저기 청와대 안방의 대통령 양반하고 시각이 비슷헌디. 그 양반도 우리 회장님한테 그랬다며. 크라 운하 그거 부담 갖지 말라고.”
태평양과 인도양을 잇는 크라 운하.
뛰어난 경제성과 막대한 물동량이 예상되는 크라 운하. 그것이 매번 책상 위 서류 단계에 그쳤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급격히 폭이 좁아지는 태국 남부. 약 100km 정도의 운하가 중간에 놓이게 되는 그 순간.
“태국 남부의 분리독립세력. 크라 운하가 생기면 그 군벌 집단이 지리적으로 중앙에서 분리되니까요.”
“그니까 말이여. 그래서 나도 긴가민가했는디… 어떻게 잘 해결이 되었나 보네?”
“제법 괜찮게 해결이 되었습니다.”
살짝 취기가 돈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나.
조금 답답한 느낌에 넥타이를 풀어 헤친 나는 얼음물 한 잔을 들이켜고는 대답을 마저 이어나갔다.
“잉탁 총리 측에서 상당한 편의를 봐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냐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