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장님의 핵몽둥이-114화 (114/300)

114화태평양과 인도양을 잇는(2)

‘총리님께서 크라 운하를… 단지 맥거핀에 불과한 것이라 여기신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맥거핀.

중요하지 않지만 중요한 것처럼 관객의 이목을 끄는 장치.

화려한 연극 무대 뒤편, 메가폰을 잡은 권력자들에게 있어 크라 운하는 무언가를 위한 맥거핀에 불과했다.

한국의 대통령에게는 선거 승리를 위한, 태국 총리에게는 쿠데타 방지를 위한.

그렇기에 병실에 앉아 겸연쩍은 얼굴로 눈치를 보던 잉탁 총리에게 있어, 내가 내뱉은 말은 분명 환영할 만한 것이었다.

‘하하하… 그 부분까지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장님.’

‘일국의 국가원수라면. 태국 남부의 분리독립 이슈를 아는 사람이라면, 크라 운하는 그저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다 여길 테니까요.’

‘이거 참… 정말 송구한 부분이 있습니다.’

애초에 가능하리라 여기지조차 않은 크라 운하.

그렇기에 잉탁 총리는 내게 미안한 감정이 있는 듯, 조금 저자세로 나섰다.

호크아이 시스템으로 군부 통제의 길을 열어줬을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기에 더더욱.

‘해서, 본래는… 군부 강경파를 묶어두는 작업이 끝나면, 공사를 중단하려 했습니다. 물론 탄약그룹에 대한 적법한 피해 보상까지도요.’

‘피해 보상이라.’

본래 계획과는 달리, 강경파의 쿠데타 강행으로 인해 생각보다 일찍 쓰임을 다한 크라 운하라는 맥거핀.

그의 입장으로는 연극 무대 위에 덩그러니 남겨진 나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상황.

깍지 낀 두 손으로 턱밑을 괴며, 잉탁 총리는 내게 무언가 결심한 듯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한국 내의 정치적 부분까지 고려해드리겠습니다. 크라 운하의 공사 중단 타이밍을 회장님께서 정해 주시겠습니까?’

‘흠….’

이 협상 과정에서 나는 지금 유리한 지대에 있는 상황. 그렇기에 지금은… 아직 내가 원하는 패를 꺼낼 타이밍이 아니다.

조금 더 애를 태우고, 조금 더 저쪽에서 바닥에 깔린 카드를 오픈할 때까지 기다릴 뿐.

대답 없이 눈짓으로 약간의 압박을 가하자, 잉탁 총리는 조금 위축된 듯 내게 추가적인 조건을 꺼내 들었다.

‘물론 계약서에 따른 보상뿐만 아니라… 태국 내의 다른 사업권까지, 원하시는 충분한 사례가 뒤따를 것입니다. 말씀하시죠.’

눈동자 너머로 전달되는 진심 어린 호의. 물론 그 호의에는 의뭉스러운 계산식 또한 있을 것이다.

필요하지만 여론 탓에 들이지 못하는 외국 자본. 분명 잉탁 총리는 탄약그룹에 그 역할을 맡게 하려는 듯했다.

그러나….

‘제가 원하는 사례. 정말 말씀드려도 될는지요?’

‘그럼요. 물론입니다. 얼마든지 편하게 말씀해주시지요.’

다른 외국계 기업들처럼 단순히 유통이나 먹으려 들려고 이곳까지 왔다면 그만한 바보짓도 없을 터.

내가 굳이 이곳 태국 정계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그리고 심지어 목숨을 잃을 위험을 감수하고서 얻고자 하는 것.

그것은… 내가, 그리고 탄약그룹이 향후 수십 년간 독점권을 지닌, 대체 불가능한 무언가를 손에 넣는 것이었다.

‘방콕 관광산업 인프라 조성 사업부터 차세대 국가 통신망 구축 사업까지, 전부. 회장님께서 이 부분에 부담 가지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그렇기에… 잉탁 총리가 열거한 달콤한 꿀 냄새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돌릴 수 있는 나.

환자복을 입은, 조금 불편한 몸을 앞으로 기울인 나는, 마침내 결단을 마치고 바닥에 깔린 패를 뒤집었다.

‘제게 다른 사업권은 필요치 않습니다.’

‘필요치 않으시다고요…?’

놀란 모습을 감출 생각일랑 없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는 잉탁 총리.

예상 밖의 대답에 그는 조심스레 자세를 고쳐 앉고 내게 반문했다.

‘회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 개인적으로는 하던 일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덮는 것은 그리 선호하지 않아서요.’

머리 위에 큼직한 물음표를 띄워 놓은 잉탁 총리.

나는 그에게 이 연극의 시나리오를 바꿔 쓸 것을 제시했다. 맥거핀에 불과했던 무언가를, 주연의 위치에 올리자는 기획을.

‘크라 운하. 계속 진행해봅시다. 조만간 남부의 분리독립 군벌 세력을 처리할 방법을 가져오겠습니다.’

* * * *

“그래서 괜찮게 해결이 되었다고 그랬던 거구만.”

잉탁 총리와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김원철 아저씨는, 머리 위에 백열전구 하나가 올라온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다량의 정보가 갑자기 머릿속에 들어와서일까?

이것저것 테이블 위에 늘어놓은 안주를 주섬주섬 주워 먹는 김원철 아저씨. 대답은 잠시 생각을 충분히 곱씹을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이어졌다.

“크흐, 우리 회장님 깽값 받아내는 솜씨는 알아줘야 해. 앞으로 탄약 보험 블랙리스트에 한서준 이름 석 자 걸어두라 시켜야겄어.”

내가 회장인 계열사에 블랙리스트 고객으로 등극 되는 영예를 안겨주는 김원철 아저씨.

하기야, 향후 완공만 된다면 국제 물류의 신규 허브가 될 크라 운하이다. 고작 머리통에 가벼운 타박상 몇 군데로 얻어낸 거라면 싸게 먹힌 셈이지.

“진짜 잘 풀린 편이여. 잉탁 총리, 그 꽁생원 같은 양반이 거기에 동의한 게 더 신기할 정도로.”

“아마 원래의 잉탁 총리 성격대로라면 동의 따위 없었을 겁니다.”

유리잔 가득 채워진 위스키. 그 찰랑거리는 모습을 본 나는 잉탁 총리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상을 꿈꾸지만 늘 현실에 안주하는 이. 도박이라 판단되는 수는 목숨이 경각에 달리지 않는 이상, 결코 두려 하지 않으려는 자.

목구멍 너머로 그런 모습을 모조리 털어 넘긴 나는, 곧바로 소맷자락으로 입가를 닦으며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이미 그렇게 싫어하던 정치적 모험을 쿠데타 뒤집기로 한번 두었는데, 남부 군벌 처리 작업까지 두 번은 못 할 사람이니까요.”

“그러게 말이여. 그런데 인자 진짜로 어떡하시려고? 그 태국 남부 군벌 애들 싹 토벌하고 후처리까지 할 방법은 있는 겨?”

“글쎄요. 아직 명확한 밑그림을 그려둔 건 아닙니다. 일단 수를 두기만 했으니까요.”

다행히도 당장 행동을 취해야 하지는 않는 상황.

잉탁 총리에게 받은 시간은 내후년 이맘때까지였다. 그 이전에 그럴듯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오면, 크라 운하와 관련한 모든 이권의 절반은 탄약그룹이 가져가게 하겠다는.

“일단 시간은 있습니다. 천천히 정보부터 수집해야지요. 그리고 아직 외부 변수 하나가 들어올 게 남았으니까요.”

“외부 변수?”

사실 단순히 태국 남부의 분리독립 군벌 세력을 토벌하는 것쯤이야 어려운 일이 아니다.

탄약그룹이 생산하는 무기들. 특히나 호크아이 시스템과 연동된 정밀 유도 무기를 이용하면, 반군 수뇌부 따위 얼마든지 잡아낼 수 있는 상황.

그러나… 회귀 이전, 내 기억 속에 자리한 국제 정세.

“중국 쪽에서 어떻게 움직일지 일단 지켜보려고 합니다.”

이제 막 계파 투쟁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 중국. 벽지의 구석에서 잠자던 이무기는 여의주를 물고 바깥으로 나설 것이다.

‘일대일로(一帶一路)’라고 불릴, 패권을 움켜쥐겠다는 야망이 고스란히 그려진 여의주를.

그리고… 분명, 중국이라는 이무기가 가장 먼저 용오름 장소로 택할 곳은, 그들의 바로 뒷마당이라고 할 수 있는 동남아시아. 그 중심에는 크라 운하가 있을 터.

“조금 복잡한 계산식이 될 겁니다. 어쩌면… 탄약그룹 전체의 사활을 걸고 임해야 할 수도 있을 정도로.”

* * * *

태국 남부.

태국의 수도 방콕보다 말레이시아 쪽에 훨씬 가까운 이 지역에는 이슬람 사원이 곳곳에 들어서 있었다.

하얀색 둥근 돔 지붕을 올린 본관, 그리고 그 주위를 둘러싼 뾰족한 네 개의 첨탑.

때때로 울리는 기도를 알리는 목소리에 생업을 멈추고 카펫에 엎드려 절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까지.

-알라신은 가장 위대하시나니, 증언컨대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도다!

이슬람 사원 안쪽, 가장 깊은 방.

오후 기도 시간이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난 사내들.

복잡한 표정의 그들 가운데, 아직도 바닥에 깔린 카펫에 양 손바닥을 떼지 못한 한 사람이 있었다.

터번을 쓴, 검은 피부의 남자. 험상궂은 표정을 한 채로 이를 앙다문 그는 제 수하들에게 들리게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알라신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셨으면 좋겠군. 저 이교도 중앙정부 놈들의 움직임이 그저 별일이 아니었으면 하는.”

최근 중앙군의 남부지역 대규모 훈련에 신경이 곤두선 이슬람 반군 세력.

아차 하는 순간 훈련을 빙자한 토벌이 될 수 있기에, 그들의 눈은 항시 중앙군을 향해 있었다.

“애초에 저런 더러운 이교도들과 같은 국가로 묶인 것부터가 문제다. 신의 저주를 받을 것들 같으니…!”

그의 심기가 워낙 불편해서였을까?

주변의 그 누구도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상황.

그 무거운 분위기가 깨진 것은, 누군가가 그 자리에 나타난 다음부터였다.

“하이고. 핫산, 자네 또 이를 벅벅 갈고 있구먼, 그래.”

“사제님, 오셨습니까?”

한참을 그렇게 쭈뼛거리는 수하들 사이로 잎담배를 물고 걸어 나온 노인.

소탈한 인상의 그는 늘 있던 일인 것인 양, 핫산이라 불리는 사내에게 다가가 말을 건네었다.

“그래, 그래. 다행히 알라신께서 핫산 자네 기도를 들어주셨던 모양일세, 그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제님?”

“말 그대롤세. 자네가 그렇게 신경 쓰던 이교도 중앙정부 놈들의 움직임. 우리하고는 관련이 없었던 것으로 결론이 났거든.”

툭, 무심하게 그의 앞에 놓인 신문 한 부. 태국어로 쓰인 그 신문에는 바로 어제, 크라 운하 착공식에서 있었던 쿠데타 소식이 실려 있었다.

“이건….”

“중앙군의 남부 훈련 목적은 우리의 토벌이 아니라 군부 강경파 쿠데타 뒤집기였더군. 잉탁 그 친구답지 않게 머리를 잘 썼어. 물론.”

신문 1면에 실린 흑백사진 한 장. 마치 못 볼 것을 보기라도 한 듯, 사진을 본 핫산의 눈가가 금세 찌푸려졌다.

굴비 두름처럼 묶인 채, 진압이 완료된 군부 강경파 세력들.

필시 형장의 이슬이 될 이들의 운명은… 반군인 자신들의 운명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기에.

그리고 핫산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사제는 끊었던 말의 나머지 부분을 이어나갔다.

“그다음 타자가 우리가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말일세.”

“…….”

주먹을 움켜쥔 반군 수괴 핫산.

이슬람 사원 안쪽의 아라베스크 문양을 바라보며, 그는 평소보다 한층 굳은 결의로 다짐했다.

반드시, 반드시 저 이교도들로부터 해방될 그날을 위해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겠다고.

“크흠, 그래서 말인데. 내 잠시 할 이야기가 있다네, 핫산.”

무언가 비밀스러운 이야기라도 할 심산인지, 곧바로 주위를 물리는 사제.

아랫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떠나고 나서야, 그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외부에서… 우리와 이야기를 하고 싶은 자들이 있네.”

“외부에서요? 드디어 같은 이슬람 형제 국가들이 도움의 손길을 뻗은 겁니까?”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도움에 기쁨의 감정을 숨기지 않는 핫산.

그러나 그런 그의 모습과는 달리 조금 곤란하다는 표정의 사제. 고개를 좌우로 가로저으며, 그가 천천히 대답했다.

“그건 아닐세. 같은 이슬람 국가들이 아니고.”

실망한 듯, 고개를 아래로 떨군 핫산.

그러나 풀이 죽었던 그의 모습은 곧바로 이어진 사제의 말에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제3세력의 개입에 복잡한 수 싸움을 계산하며.

“중국, 중국 쪽에서 자리를 한번 만들어 보자고 하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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