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장님의 핵몽둥이-115화 (115/300)

115화태평양과 인도양을 잇는(3)

태국 남부 분리주의 군벌.

‘무슬림 독립 투쟁단’의 지도자 핫산.

방콕의 도심 지역을 걷고 있는 그는, 신호를 기다리던 중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160cm 언저리의 작달막한 키. 유독 까무잡잡하고 군데군데 얼룩진 피부. 머리 위에 쓴 촌스러운 터번과 후줄근한 옷차림.

그는 전형적인… 남부지방 이슬람교도 촌뜨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태국 중앙 정부가 그토록 차별과 핍박의 대상으로 찍어 누른.

“이봐, 거기 너!”

그리고, 그 사실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곧바로 걸려 오는 시비.

“이 새끼… 경찰이 검문하는데 개무시를 하고 있어? 이거 제대로 돌았구만!”

경찰 제복을 입은 뚱뚱한 남자.

그는 권총 혁대에 손을 올리고는, 핫산을 향해 소리쳤다.

“…나 말이오?”

“여기 너 말고 수상한 놈이 또 있나? 당장 이리 와. 신분증은 가지고 있겠지?”

신분증이라는 말에, 핫산은 등골을 따라 섬찟한 긴장감이 올라오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의 호주머니 안에는 엉성하게 위조한 가짜 신분증이 들어있었기에.

두근대는 심장을 애써 잠재운 후, 경찰에게 가짜 신분증을 내보이는 핫산.

천운이 따른 걸까?

눈이 좋지 않은지, 안경 초점을 앞뒤로 맞추던 경찰.

그는 내용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핫산의 가슴팍에 신분증을 내던지며 말했다.

“역시 남부 촌뜨기 놈이었군. 알라 같은 사막 귀신이나 믿는 촌놈이 수도 방콕까지는 왜 왔나?”

“…….”

“왜 기어 올라왔냐고! 대답!”

본래 계획대로라면 최대한 조용히 왔다가 일만 끝내고 조용히 사라질 예정이었던 핫산.

그러나, 그가 믿는, 그리고 그의 품 안에 들어온 사람들이 믿는 신에 대한 모욕.

오로지 신념 하나만으로 살아가는 핫산은 가만히 굴종의 자세를 취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신을 욕되게 하지 마시오.”

“허어, 이 새끼 봐라?”

왼쪽에 찬 진압봉을 뽑은 경찰.

대놓고 모욕과 멸시를 주려는 걸까?

그는 뭉툭한 진압봉 끝자락으로 핫산의 배를 꾹꾹 누르며,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지금, 정부의 동화정책에 거부한다 이건가? 너도 이슬람 테러분자야?”

“…….”

“네놈도 테러분자냐고 물었다. 대답!”

경찰이 나아가는 만큼, 점점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는 핫산.

횡단보도 인근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그는, 바로 옆 호텔 건물의 딱딱한 벽에 등이 닿고야 말았다.

충분히 겁박을 준 것이라 여겼는지, 만족스러운 표정의 경찰.

이참에 건수를 잡았다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는 진압봉을 허리춤에 다시 차고는, 곧바로 철제 수갑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 새끼, 이거 안 되겠네. 너, 잠깐 나 좀 따라와.”

“아니!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 거요?”

“오늘 시험 하나 해 보자고. 어디 몽둥이로 두들겨 맞아도 사막 귀신이 구하러 오는지.”

대놓고 반군 용의자 혐의를 씌워 볼 생각인 경찰.

혹여나 잘 풀리면 성과로 남아 진급에 유리해지고, 잘 풀리지 않은들 남부 촌뜨기 하나 족친 걸로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터.

“이럴 수가…!”

이 어처구니없는 위기에 당황해하는 핫산.

경찰서에 끌려간다면 위조 신분증이 탄로 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진짜 자신의 신분마저 밝혀질 수 있는 상황.

하필이면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은 순찰 중인 경찰들이 깔린 고급 호텔 인근이었기에, 그는 어디론가 도망치지도 못할 터.

‘큰일이다… 하필이면 이런 때에.’

고뇌의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점점 다가오는 수갑. 별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핫산은 두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 끝인 건가 싶은 그 순간. 캄캄한 암흑 속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

“잠깐!”

“뭐여, 이건… 크흠, 무슨 일이십니까?”

흰 피부. 말쑥한 체형. 손목에 찬 고급 시계와 품질 좋은 원단으로 만든 양복까지.

누가 보더라도 태국 부유층 또는 외국인으로 보이는 그 남자는, 천천히 핫산 쪽으로 다가와 손목을 낚아챘다.

그리고는 경찰을 향해 말하는 의문의 남자.

“그 사람은 내 밑에서 일하는 사용인입니다. 지금 이 자를 연행하려는 이유가 뭡니까?”

“에이… 씨. 똥 밟았네.”

괜히 욕심을 부리다가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경찰.

강약약강의 원칙을 충실하게 지키는 이답게, 그는 간드러진 목소리로 의문의 남자에게 대답했다.

“요새 남부 분리독립주의자 놈들이 하도 테러를 해서 말이요. 수상한 놈이 있으면 죄다 잡아넣으라는 윗선 지시입니다.”

“그건 오해요. 이 자는 그저 우리 회사 일을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아, 그래도 일단 이런 놈은 조사부터 해 봐야….”

괜히 한번 뻗대 보는 경찰.

곧바로 품 안에 들어온 지폐 몇 장에 그는 금방 조용한 사람이 되었다.

“쉽게 쉽게 갑시다. 서로 편하게.”

“크흠, 이러시면 안 되는데… 또 막상 이렇게 사람 성의를 무시하자니, 그것도 민망하고. 이거 참.”

원만하게 해결된 사태.

민망한 듯 마지막으로 내뱉은 엄포와 함께 경찰은 유유히 제 갈 길을 걸어가는 것으로 퇴장을 마무리했다.

“이봐, 이번 한 번은 봐주겠다! 괜히 남부 이슬람교도 티 내지 말고 조심히 다니도록.”

솟아오는 안도감과 함께 핫산을 덮친 모욕감.

손바닥 살이 패일 만큼 꽉 쥔 두 주먹. 그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반드시, 반드시 저 태국 중앙정부 놈들로부터 벗어나고야 말겠다고.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옆에 선 저 미덥지 않은 중국인과 손을 잡는 것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것까지.

“…괜찮으십니까? 핫산 단장님 맞으시지요?”

“예기치 않은 은혜를 입었군요. 이거 첫 만남부터 감사하다는 말씀부터 드려야겠습니다.”

초면임에도 금방 서로를 알아본 두 사람.

의문의 중국인 남성은 아무 스스럼없이 핫산에게 손을 뻗어 악수를 청했다.

진심이라고는 깃털만큼의 무게도 담기지 않은 말 한마디를 내뱉으며.

“뭘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희는 파트너가 되실 분께 늘 최상의 대우를 해드리니까요.”

“최상의 대우라.”

“우선 들어가서 이야기 나누시죠. 아참,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상하이 캐피탈>에서 투자 총괄 본부장 직위에 있는… 옌룽이라고 합니다.”

횡단보도를 지나 바로 옆 블록, 고급 호텔을 향해 걸어가는 두 사람.

그들이 길을 건너자, 신호등에는 초록색 불이 꺼지고 빨간색 불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신호등 아래에서, 이 모든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한 여성.

“계획도 참 촘촘하게 세우네. 원래 중국 놈들은 다 저런 식으로 일하나?”

옌룽의 태국 현지 협조자인 그녀.

먼발치서 핫산을 바라보다가 경찰에게 수상한 이가 있다며 밀고했던 그녀는, 방금 전 옌룽의 연기를 떠올리며 홀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곧바로 울리는 품 안의 휴대전화. [송금 완료]라는 알림과 함께 첨부된 짤막한 문자 메시지를 본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수고했다. 협상 시작부터 쉽게 진행될 것 같다. 약조한 것보다 조금 더 보냈으니 이번 일은 철저히 함구하도록.

* * * *

“옘병… 가만히나 내버려 두면 잊고나 살지. 아주 독한 놈이 골수까지 싹 빼먹으려 작정을 했나.”

최근 몇 달, 밀항선에서 내린 이후 동남아시아 지역을 하염없이 떠돌던 이택규 전 사장.

광저우에서 카지노에 빠졌다가 자기 인생도 같이 수렁에 빠지게 된 그는, 자기가 한때 둥지를 틀었던 중국에 다시는 발을 들이지 못하게 되었다.

“닝기리… 그때 그 폭동 생각만 하면 아직도 가슴이 철렁해부러.”

그나마, 워낙 생활력 하나는 억척스러운지라, 연고조차 없는 이역만리 타국에서도 그럭저럭 밥은 먹고 사는 그였다.

문제는 그 타국이라는 곳이… 그 많은 동남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하필이면 태국, 그것도 남부지방이었다는 것.

“한서준이 이 썩을 놈은 도대체가 직업이 몇 개여. 재벌 회장에, 도박꾼에, 인자는 첩보 영화감독이라도 된 겨?”

입이 댓 발로 튀어나와 툴툴거리는 이택규 사장이었지만, 막상 따지고 보면 나쁜 조건의 계약은 아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 넓은 풀빌라. 기존에 살던 허름한 여관방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안락한 공간.

현지 정보 수집원 역할을 맡은 대가로 주어지는 쾌적한 삶.

곧바로 침대에 드러누운 이택규 전 사장은, 얼마 전 자신이 올린 보고서 내용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태국 남부지역의 최근 중국 자본 진출과 그 영향력 확대에 관한 분석.

팔락, 침 바른 손가락과 함께 한 장씩 넘어가는 서류 뭉치.

직접 보고 느낀 현장의 목소리를 수리적 방법론으로 분석한 데이터.

나름 대기업 계열사의 사장까지 올라온 사람답게, 이택규 전 사장이 작성한 보고서의 내용은 제법 알찬 구성으로 되어 있었다.

“크흐, 명필이여, 명필. 암만 내가 썼지만서도 어쭙잖은 놈들은 이만한 보고서 못 쓴다니께.”

드넓은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는 이택규 전 사장. 멍하니 천장을 바라본 그의 입에서 묘한 감탄사 하나가 자기도 모르게 새어 나왔다.

“그나저나 한서준이 고놈은 참말로다가 희한해부러.”

이전 주인이었다가 한때는 원수가 되어 버린, 그리고 지금은 조금 애매한 협력 관계 비슷한 것이 된 자.

얼마 전, 그에게서 연락을 받았던 이택규 전 사장은 귓가에 잔향처럼 내려앉은 그 목소리를 떠올렸다.

‘조만간 지금 계신 태국 남부 지역으로 중국 쪽 자본이 움직일 겁니다.’

중국과 태국, 양쪽 모두에 있어 본 이택규 사장이었기에, 그를 정보원으로 쓰려고 단단히 작정한 모습이었다.

‘으메, 회장님. 그것은 또 머선 소리시당가? 이 깡촌에 춘장 놈들이 뭐 하러 온다요?’

‘별다른 설명 없이도 곧 알게 될 겁니다. 상황을 잘 살피면서 정기적으로 보고나 잘 올리십시오. 그럼 이만.’

‘회장님! 회장님? 하, 냅다 끊어부렀네.’

그러나… 그를 정보원으로 쓰기에는, 회장은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마치 예지몽이라도 꾸어서 미래를 엿보고 오기라도 한 것처럼.

“…꼭 짜장 애들이 여기에 돈 보따리 싸 들고 올 거라고 예상이라도 한 것 같단 말이여.”

의구심이 드는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그런 것 따위야 이제는 마음속에 묻기로 결심한 이택규 사장.

탁자 위, 굴러다니는 조간신문에는 그가 그런 판단을 하기로 결심한 이유가 기사로 나 있었다.

-[1보] 지난번 군부 강경파의 쿠데타 진압에 탄약그룹 서준 한 회장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잉탁 총리는 향후 탄약그룹과의 협력을 기대한다는 뜻을 밝혀….

본거지를 떠난 이곳 태국에서도 점점 손댈 수 없을 만큼 커가는 탄약그룹과 한서준 회장.

점점 승승장구해가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이택규 전 사장. 그의 마음속에서 이미 복수심이나 경쟁심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에이, 몰러! 옘병할… 그냥 단순하게 살아야 쓰겄다. 괜히 저 괴물 같은 놈하고 척질 바에, 적당히 떡고물이나 받아먹고 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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