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조금 일찍 시작된 일대일로(1)
큰 자본이 왔다 간 곳은 항상 흔적을 남긴다.
진흙으로 뒤덮인 뻘밭에 찍힌 거인의 발자국처럼, 제아무리 조용히 왔다 가려 한들 존재를 감추기란 어려운 법.
그리고 그것은… 크라 운하 공사가 진행될 태국 남부지방도 예외는 아니었다.
“뭐든지 크게 크게 하나 봅니다. 중국 쪽 애들은.”
“그러게 말이여. 땅덩이가 커서 그른가? 아무튼, 이택규 그 양반이 발로 뛰니까 좋구만. 흐흐흐.”
이제는 정보원으로 직업을 바꾼 이택규 전 사장. 나는 그가 보내온 보고서에 첨부된 사진 목록을 한 장 한 장 들여다보며 말했다.
“이거… 사이즈로 봐서는 그냥 단순히 자금 지원 수준이 아닌 것 같지요?”
“여차하면 바로 괴뢰정부도 만들 기센데? 기업 하나가 하기는 어렵고, 중국 쪽 정부 기관도 발 하나는 걸쳤나 본다야.”
남부 분리독립 군벌 집결지 인근의 배 한 척 없이 한가롭던 항구의 사진. 그리고, 그와 반대로 갑자기 물동량이 급증한 같은 항구의 모습.
붉은색 붓으로 휘갈겨 쓴 듯한 필기체의 한자가 적힌 여러 선박은, 무언가 대규모의 물품을 내려놓고 또 가져오기를 반복하는 모양새였다.
“거기에… 갑자기 인근 지역 쓰레기장에서 식료품 포장지 배출이 늘었어. 메이드 인 차이나 쓰여 있는 쌀국수 봉다리 같은 거.”
“인근 주민들 옷차림도 바뀌었습니다. 중고 군복이 민간 시장에 많이 풀렸네요.”
“그러면 반군 기지에는 신삥 군복이 대량으로 들어왔다는 뜻이여. 아주 짜장 애들,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따로 없다야.”
지역 전체에 걸쳐 전반적으로 풍부해진 물자. 그것도… 외부에서 근래 들어 급격하게 공급된 티가 나는 상황.
김원철 아저씨는 선박 사진이 들어간 폴라로이드 사진을 손가락으로 집어 들고는 내게 말을 꺼냈다.
“그래도, 얘들이 전문 정보기관 쪽은 아닌 것 같은디. 왜냐면, 여기 보니까 좀 허술한 부분도 있걸랑.”
“선박 관리가 특히 그렇죠.”
“그렇지. 은근 또 맹탕이더라고. 물자를 적재한 선박 번호. 이걸 따로 조작하거나 하진 않았걸랑.”
탄약 조선 해양의 정보조직을 통해 조회한 선박 번호.
항구에 입항해 있는 여러 척의 선박들 전부는 소속 선사가 동일했다. 딱 봐도 뒷배에 누가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Shanghai marine union. 국적은 마카오계 선사인데… 여기 최대 주주 리스트가 재미있더군요.”
내 책상 위, 전문 투자기관에서 사용하는 투자 프로그램.
몇 번의 클릭만으로도 곧바로 각 회사의 지분 현황을 볼 수 있는 이 프로그램은 내게 경보음을 울리고 있었다.
그동안 상처를 치유하느라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던 사나운 승냥이 한 마리가… 다시 나를 향해, 탄약그룹을 향해 발톱을 들이밀고 있다는 것을.
-[지분 현황]
<상하이 캐피탈> 92%
5%
3%
“하여간 이 인간들도 징하다 징해. 어떻게 이렇게 자꾸 이렇게 악연으로 엮인다냐.”
“그러게 말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네요.”
과거 회귀 이전, 공중 분해된 탄약그룹의 알짜 계열사를 먹어 치웠던 <상하이 캐피탈>.
그 후, 등에 날개를 단 그들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요란하게 승전고를 울리고 다녔다. 비단 중국이나 한국에서만이 아닌… 전 세계 바닷길을 따라서.
“분명 그때는 스리랑카나 태평양 섬나라 같은 소국부터 시작했던 것 같은데….”
일대일로(一帶一路).
중국판 해외 식민지 개척으로도 불리는 그 작업의 선봉장에는 분명 <상하이 캐피탈>이 있었다.
문제는 역사가 바뀐 것인지, 그 시작이 태국의 크라 운하에서부터 도화선이 타들어 갈 것만 같다는 점.
“응? 뭐라고?”
턱에 손을 괴고 고민하는 내가 퍽 희한해 보였나 보다. 머리 위에 물음표 하나를 띄워 놓은 김원철 아저씨.
“그런 게 있습니다. 하여튼, 저쪽 사람들이 움직였다면, 저희도 빨리 조치를 취해야겠네요.”
“뭐, 그렇지. 그런데 아예 중국 정부 뒷배를 업고 저러는 놈들인데, 어떻게 방법이 있긴 할는지 모르겄네.”
“<상하이 캐피탈>이야 당연히 대화가 안 통하겠죠. 이래서 선입견이 무서운 겁니다. 조금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어요.”
내 말을 듣고는 무언가 묘한 침묵을 고수하는 김원철 아저씨.
본래대로라면 <상하이 캐피탈> 측과 협상이든 협박이든 최대한 줄다리기를 해 보는 것이 우선일 터였다.
군벌이라는 집단은 뭐랄까… 함부로 다가가선 안 되는, 뭔가 제대로 된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이들이니까.
“어… 그러니까, 회장님아? 그 말은 대화가 통할 만한 상대를 찾아서 직접 이야기를 나누시겠다?”
“재벌 회장도 따지고 보면 장사꾼이니까요. 저들이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것만 알면 사고팔지 못할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툭, 탁자 위에 올라간 서류뭉치 하나. 이번 크라 운하 건으로 대통령에게도 협조를 약조 받은 차였다.
비단 수출입은행의 이자 감면 같은 금전적인 부분만이 아닌… 아예 국정원의 정보망을 일부 이용할 수 있는 권한까지.
까만 피부, 무언가 빈한해 보이는 인상의 핫산이라는 이름의 남자.
서류에 적힌 ‘무슬림 독립 투쟁단’의 리더의 인적 사항을 바라보며, 나는 하던 말을 마저 이어나갔다.
“그러므로 이번 아이템의 순이익은 남부 분리주의 군벌을 우리 편으로 회유하는 게 되겠네요.”
이제까지 역사에 없던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작업. 아니, 태평양과 인도양을 잇는 아예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일.
그 정도의 대규모 사업을 벌이는 데에 있어… 이만한 위험 정도는 충분히 감내할 수 있으리라.
“목표는, 그들을 중국 품에서 떼어내는 것부터 크라 운하 완공까지. 전부, 다.”
“흐흐흐. 성원식 본부장하고 양택수 부회장님은 이 계획 알면 또 까무러칠 것이여. 또 목숨줄 함부로 버리러 간다고.”
태국 군부 강경파 우두머리의 자폭 돌격 이후, 유독 잔소리가 많아진 두 사람.
회장의 몸은 회장 한 사람의 몸이 아니라며, 부디 그룹을 위한다면 안전에 해가 되는 일은 하지 말라는 말이 벌써부터 귓가에 맴돌기 시작했다.
“두 분은 김 비서실장님이 알아서 해결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럼, 저는 이만.”
* * * *
청와대 별채.
황금색 긴 털을 휘날리며 혓바닥을 길게 내뺀 골든리트리버 한 마리.
하늘에 내던진 원판이 빙글빙글 날아 잔디밭을 향해 날아가자, 곧바로 그 개는 쏜살같이 뛰어가기 시작했다.
“지치지도 않나 보군.”
“복실이가 대통령 각하가 아니면 당최 다른 직원들과 놀이를 하지 않으려 합니다.”
“새끼 때부터 내가 끼고 살았으니, 그럴 수밖에.”
저 멀리서 원판을 물고 달려오는 개.
일명 복실이라고 불리는 그 개는 꼬리를 흔들며 곧바로 대통령의 바지에 얼굴을 비볐다.
“그래, 그래. 잘했다. 아빠는 이제 일할 시간이야. 알겠지?”
워낙 영민해서일까?
사람 말을 곧장 알아듣는 듯, 살짝 풀죽은 표정을 짓는 복실이.
그러나 이내 제 주인의 바쁜 삶을 이해하기라도 한 건지, 복실이는 곧바로 자리에 엎드려 얌전한 모습을 보였다. 그저 등허리에 손길이 닿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여기며.
“어쩌면 사람보다 나은 것 같기도 합니다. 대통령 각하.”
“사람이 이놈 반만 했어도 내가 윤학길이를 내치는 일은 없었겠지. 아니 그런가? 박 실장.”
“하… 하하. 그렇… 습니다.”
대통령의 뼈 있는 말 한마디에 어색한 웃음을 짓는 박동희 정책실장.
그리고, 그런 곤혹스러운 모습을 보고서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위쪽으로 올리는 대통령.
얼어붙은 분위기를 다시 전환하기 위해 그는 의도적으로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허어, 우리 박 실장은 윤학길이 이야기만 나오면 이렇게 얼어붙는단 말이지.”
“…아, 아닙니다. 각하.”
“되었네. 복실이 반만 하면 되는 게야. 정 진심으로 충성을 못 하겠다면, 성과라도 내면 되는 것이고. 그 왜 있잖나.”
복실이를 쓰다듬으며 말허리를 끊은 대통령.
그는 무언가 재미있는 일이라도 떠오른 양, 묘한 표정을 지으며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 그 탄약그룹 한서준이처럼 말이지.”
“태국 쿠데타 진압과 크라 운하… 말씀이십니까?”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대통령.
그는 국가정보원에서 올라온 보고 내용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정부 부처에 요구하라고 미리 언질을 주긴 했다만,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정보를 요구한 탄약그룹의 수장.
“아예 판을 크게 키울 생각인가 보더군. 박 실장, 자네도 국정원장 통해 들어서 알고 있지?”
“중국 쪽을 지나치게 건들게 될지 조금 우려스럽습니다만.”
“아아, 그 일대일로 계획.”
이미 정부 최고위층에서는 파악하고 있는 중국의 대외 팽창 계획.
비록 가시화되고 있는 상황은 아니었으나, 대통령은 일정 부분의 견제는 필요하다고 여기는 듯했다. 직접적이고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견제 방식으로는.
“일단은 괜찮네. 중국 놈들도 자기들이 직접 시작하긴 애매하니, <상하이 캐피탈>을 통해서 간을 보는 것일 터.”
후덥지근한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손에 쥔 원판을 만지작거리는 대통령.
비록 충성심을 기대할 수는 없으나, 성과 하나는 확실하게 물어다 줄 개 한 마리. 그 정도만으로도 대통령에게 있어 충분히 품에 안고 갈 만한 가치는 있으리라.
복실이를 한번 쓰다듬고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그럼 우리도 한번 간을 보자고. 우리 쪽 장기 말로는 탄약그룹 한서준이를 내세워서 말이야.”
* * * *
태국 남부의 한적한 시골 마을.
보잘것없는 작은 항구 하나를 끼고 있는, 도시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규모의 촌락은 최근 들어 유례없는 활기를 띠고 있었다.
“이것저것 물자가 들어오니까, 확실히 먹고살기가 좋긴 해.”
“뭐, 죄 중국산이긴 한데. 그래도 이게 어디인가. 이런 궁벽한 곳에 이만하면 감지덕지여.”
시장 근처. 길가를 오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귀에 담으며, 마을 중앙의 이슬람 사원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핫산.
사람들의 긍정적인 목소리와는 반대로, 그의 마음속 깊은 곳은 찝찝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너무 섣불리 결정한 것이 아닌가? 저자들이 나중에 어떤 청구서를 들이밀지도 모르는 것인데.”
<상하이 캐피탈>의 옌룽.
며칠 전 방콕에서 이야기를 나눴던 그의 목소리는 아직도 핫산의 귓가에 잔향처럼 남아 있었다.
친절함과 예의로 갖추어진 언변, 그리고 ‘무슬림 독립 투쟁단’의 그 누가 보더라도 혹할 만한 조건들.
정식으로 손을 잡기 전임에도, 계약금 조로 내민 그들의 지원 또한 너무나도 달콤했다.
“후우, 우선 사제님과 논의해 보고 결정을 내려야겠군.”
어느새 도착한 이슬람 사원.
신발을 벗고 그 안으로 들어간 핫산은 가장 안쪽의 나무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니…! 당신은…?”
마땅히 사제 홀로 있으리라 여긴 그곳에서는… 누군가 다른 사람 하나가 자리에 함께해 있었다.
환한 피부의, 큰 키를 가진 말쑥한 동양인 남성. 그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핫산에게 손을 뻗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