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조금 일찍 시작된 일대일로(2)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탄약그룹 회장, 한서준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무슬림 독립 투쟁단의 단장직에 있는 핫산이라고 합니다.”
어색하게 맞잡은 두 손.
핫산은 앞에 선 이 젊은 동양인 남성과 눈인사를 하면서 생각했다.
얼마 전 방콕에서 만났던 <상하이 캐피탈>의 옌룽이라는 남자.
분명, 그때 그와 만나서 나누었던 이야기와 지금 이 상황이 연관되어 있다고.
“잠시 자리에서 기다려 주시지요. 사제님과 잠깐 할 이야기가 있으니.”
“신경 쓰지 마시고 천천히 말씀 나누시지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내실로 들어가 사제가 뒤따라오기를 기다리는 핫산. 잠깐의 자투리 시간 동안 그는 방금 만난 한서준이라는 사람에 대해 곱씹기 시작했다.
운동을 오래 해서인지, 곱상하게 생긴 외모와는 달리 손바닥에 박힌 까끌까끌한 굳은살의 감촉.
“한서준 저 사람은… 지난번 쿠데타 때 잉탁 총리 곁에 있던 자였다. 분명 내게 온 이유가 있을 터.”
확신을 담은 악수는 자신에게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거절할 수 없는 제안. 아니, 유일한 선택지를 제시하겠노라고.
“<상하이 캐피탈>과 탄약그룹이라.”
탁자 위에 올려둔 그의 검은 손.
잔향처럼 머문 악수의 감촉을 느끼며, 그는 방콕에서 옌룽이라는 남자와 만났던 일을 회상했다.
* * * *
‘저희 <상하이 캐피탈>은. 아니, 저희 윗선에 있는 중국 공산당은 무슬림 독립 투쟁단이 곧 새로운 국가의 정부가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새로운… 국가 말이오?’
호텔 방에 들어간 후, 그 중국인 사내가 처음으로 내뱉었던 그 말.
이제껏 수십 년간 꿈꿔왔던 일이었지만… 감히 가능하다 여기지 못했던 새로운 국가의 수립.
그 욕망에 자기도 모르게 목울대가 꿀렁거린 핫산. 그런 그의 모습을 본 옌룽은 잔잔한 미소를 얼굴에 걸고는 하던 말을 마저 이어나갔다.
‘애초에 선례가 없는 것도 아니지요. 저희 측은 가능하리라고 봅니다.’
‘선례?’
‘파나마. 파나마 운하 하나 때문에 나라가 만들어지지 않았습니까.’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파나마 운하.
분명… 미국은 이 알짜 운하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신생 국가 하나를 만든 적이 있었다.
‘크라 운하 또한 못할 것은 없지 않습니까? 상황은 비슷합니다.’
웃음과 함께 준비해둔 차를 내놓으며 말을 이어나가는 옌룽.
‘국제적 물동량이 오가는 주요 길목. 주민들의 독립 의지. 그리고.’
혹할 만한 내용, 타당한 전제조건, 그가 말하는 모든 것은 이치에 닿았다.
단 한 가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묘한 거부감 하나를 제외하고는.
‘믿을 만한 뒷배의 존재.’
‘믿을 만한… 뒷배라.’
‘저희 <상하이 캐피탈>과, 그리고 중국과 함께 하시면 이루어질 일입니다.’
톡, 톡. 생각에 잠긴 채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들기는 핫산.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머릿속에서 대략적인 계산을 끝마친 그가 옌룽을 향해 물음을 던졌다.
‘반대급부의 값이 싸지는 않을 텐데 말입니다.’
‘그렇다고 꼭 비싼 것도 아니지요. 합당한 지원에 맞는 합당한 대가가 따를 뿐.’
도자기 잔에 담긴 차를 한 모금 마신 옌룽. 좀 더 노골적인 협상가의 모습으로 변한 그가 천천히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그저 무슬림 독립 투쟁단이 세울 나라에 중국이 바라는 유일한 것은.’
손을 들어 남향으로 나 있는 유리창 너머를 가리키는 옌룽.
고작 힘 빠진 손가락질에 불과했으나, 핫산은 그 안에 든 의미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자신의 고향이기도 한 그곳에 천지가 뒤집힐 대격변이 조만간 찾아올 거라는 것을.
‘크라 운하. 그것만 온전히 내어주신다면, 단장님이 세울 신흥 국가. 그 창립부터 안정까지 전부 대국이 함께할 것입니다.’
‘…….’
자신도 모르게 길게 이어지는 고뇌.
시곗바늘이 째깍거리는 소리가 심장 박동과 함께 맞추어졌을 때쯤, 옌룽은 그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물론 여기에는 토사구팽 따위는 없습니다.’
핫산의 눈앞에 들어온 작은 홍보물. 맨 아래 중국 외교부 인장이 찍힌 그 종잇조각에는 세계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중국 맨 아래, 남방부터 시작해 동남아시아, 스리랑카를 거쳐, 중동과 동아프리카로 이어지는 진주 목걸이와 같은 항로.
‘일대일로….’
멍하니 그 지도를 바라보고 있는 핫산.
자신에게,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다가올 거대한 물결. 중국이라는 강대국이 일으키는 그 물결은 둘 중 하나를 강요하고 있었다.
올라타든지, 익사하든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난 옌룽.
그는 아무렇지 않게 말 한마디만을 남기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함께하시리라 믿기에 먼저 성의를 보이도록 하겠습니다. 남부지방으로 돌아가시게 되면, 곧바로 바뀐 것을 체감하실 수 있을 정도로.’
* * * *
양쯔강의 강물에 비친 야경이 넘실넘실 흐르는 늦은 밤.
상하이 국제공항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일터로 직행하는 옌룽.
유리 엘리베이터에 비친 그의 얼굴은 승기를 잡아 놓은 것처럼, 자신감 넘치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일이 잘 해결되었나 보구나. 옌룽.”
“주군. 이 시간에 아직 자리에 계셨습니까?”
그리고 그 모습을 먼발치서부터 바라본 제임스 왕 이사. 그 역시 무언가 만족스러운 일이 있기라도 한 듯, 평소와 달리 좀 더 환하고 평안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베이징의 노괴가 지원을 약조했다. 우리 <상하이 캐피탈>이 전면에 나서보라 하더군. 마치… 식민지 시대의 동인도회사처럼.”
“다행입니다. 모든 일이 순리대로 흘러가는 듯합니다.”
간략한 보고서와 함께 제 주인의 앞에 선 옌룽.
그는 태국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브리핑을 시작했다.
“우선 상황은 긍정적입니다.”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 준다니, 그쪽도 어지간히 신이 난 모양이군.”
“워낙 태국 내에서 심각한 차별을 받았으니, 가려운 곳을 긁어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다만….”
조금 말끝을 흐리는 옌룽.
자리에 선 채로, 그는 핫산이라는 남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분명 절반쯤 자신의 말에 넘어온 것 같으나, 극렬 반군의 지도부 위치에 있는 자.
과연 그 남자가 건국 이후에도 중국 공산당 특유의 종속 정책에 순순히 고개를 숙일 것인지는 아직 미지수인 상황.
“이슬람 무장세력 특성상 통제가 여의치 않을 수 있다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아무래도 입에 재갈을 물릴 만한 무언가가 있어야….”
“아아, 그건 걱정할 것이 못 된다. 재갈 따윈 필요치 않아.”
“주군?”
“베이징의 노괴는… 이미 저들을 토사구팽할 생각뿐이니.”
“……!”
지도자의 스승 역할을 자처하는 베이징의 노괴. 그 주름진 얼굴을 떠올린 것이 영 불편하기라도 한 듯, 제임스 왕 이사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국가의 껍데기만 유지한다면, 지도층으로는 누가 되든 상관없다. 그것이 그쪽 생각이다.”
“역시… 살얼음판 같은 베이징 정치판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노괴다운 판단입니다.”
“그저 누가 번국의 왕좌에 앉든, 베이징의 명령에 순종하기만 하면 될 뿐이라는군. 진짜 문제는.”
소파에 앉은 채로 고개를 치켜든 제임스 왕 이사.
늘 그러하듯, 천장에 조각된 목제 지도를 바라본 그가 탄식하듯 말을 내뱉었다.
“저기 저 동쪽 변방 놈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베이징이 우리를 내세운 것처럼, 탄약그룹의 한서준이를 내세운 것 같더구나.”
“탄약그룹 한서준…!”
옌룽에게 찾아온 불쾌한 불안감.
탄약그룹, 한서준. 분명 대국의 입장에서는 동쪽 소국의 이름 없는 기업과 그 수장에 불과한 자들이었으나… 그에게는 유독 여러 의미로 특별했다.
“좀 더 적극적인 행보를 보여야 할 것 같습니다, 주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승승장구하던 <상하이 캐피탈>. 아차 하는 순간, 마치 솜씨 좋은 유술가가 기술을 건 것처럼 그들의 힘을 이용해 그들의 팔다리를 꺾어버렸기에.
그런 제 수하의 불안감을 공감하기라도 하는 건지, 고개를 끄덕인 제임스 왕 이사. 생각을 마친 그는 옌룽을 향해 지시를 내렸다.
“가능한 한 일정을 최대한 당겨보도록. 저쪽이 움직이기 전에 상황을 굳혀야 한다.”
“예, 주군.”
* * * *
같은 시각 탄약그룹 본사 꼭대기 층. 회장 집무실.
늘 그렇듯 심드렁한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김원철. 그러나 평소와 다르게, 그의 두 손가락은 코르크 마개처럼 귓구멍을 꼭 막고 있었다.
원인은 바로 그의 옆에 선 유세나 보좌관 때문이었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한 채, 대성박력으로 목청을 드높이는 그녀.
“아, 진짜! 김 비서실장님! 그걸 그냥 보내면 어떻게 해요!”
“음머? 아 회장님이 무슨 다섯 살짜리 애여? 물가에 내놓는다고 같이 떠내려가게? 흐흐흐.”
“하아, 생각해 보니 회장님도 문제예요. 저번에 쿠데타 현장에서 폭탄 테러 당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비서실 내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이미 견원지간 비슷한 무언가로 유명했다.
굳이 따지자면 유세나 보좌관이 개 쪽에 가까운 셈. 그 이유는 지금처럼 워낙 잘 짖어대서였다.
“아, 괜찮아. 괜찮아. 이번에는 위험할 일 하나도 없을 것이여.”
나무 위에 매달린 원숭이. 아니, 어쩌면 나무늘보에 더 가까운 김원철.
팔짱을 낀 채로 자신을 노려보는 유세나 보좌관에게, 그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 그 웃음에는 그저 장난기만이 아닌, 무언가 확신 비슷한 것이 담겨 있었고.
“흐음….”
그 묘한 기류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조금 차분해진 채로 김원철을 떠보기 시작한 유세나 보좌관.
“뭘 그렇게 자신감 있게 말하고 그러세요?”
“흐미, 눈치도 빨러.”
“빠를 수밖에요. 이런 일이 어디 한두 번인가. 아무튼, 그렇게 확신하는 데에는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겠죠?”
허리에 손을 올린 채 대답을 재촉하는 유세나 보좌관.
그런 그녀의 모습과 대비되는 능글맞은 얼굴을 한 김원철. 그는 새초롬한 표정을 짓고는 한쪽 손을 올리며 대답했다.
“아, 배고파.”
“아, 진짜. 쫌.”
“아까 그 한정판 쿠키 사 가지고 왔다는 거 남지 않았나 몰라? 흐흐흐.”
얄미워 죽겠다는 감정을 꾹꾹 누른 채, 자기 자리로 가 한정판 쿠키를 가지고 온 유세나 보좌관.
회사 근처 핫 플레이스 제과점에서, 매일 월요일 오전에만 살 수 있는 쿠키는 곧바로 김원철의 뱃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우, 이거 맛있다야.”
“하아, 맛있으면 대답이나 해 주시죠. 도대체 그 확신하는 이유가 뭐예요?”
“확신할 만도 허지. 왜냐면… 이번 건은.”
입가에 묻은 과자 가루를 물티슈로 닦아낸 김원철.
깍지 낀 두 손을 머리에 얹고 의자에 몸을 깊게 묻은 그는 자신감 넘치는 어투로 유세나 보좌관에게 대답을 주었다.
“사실상 그쪽 반군 애들이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우리 회장님 하나뿐이걸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