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조금 일찍 시작된 일대일로(4)
“살아날… 방법?”
핫산에게 주어진 고민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의 충직한 부하들은 생각보다는 행동으로 제 존재 가치를 입증하는 자들이었으니까.
-쾅!
“잡아! 절대 죽이지는 말되, 반항할 수 없게 묶어버려!”
이놈들, 반군 딱지를 괜히 달고 있는 것이 아닌지, 행동이 아주 거칠기 짝이 없다.
방 안으로 파도처럼 밀려 들어온 스무 명 남짓의 무장한 사내들.
별다른 핫산의 지시가 있지도 않았건만, 그들은 자신의 충성심을 입증할 기회라도 된 듯, 곧바로 나를 바닥에 넘어트려 포승줄로 묶기 시작했다.
“단장님! 제압 끝났습니다요! 이제 이놈 이거 어떻게 처분하면 되겠습니까?”
“하! 요 서준 한이라는 놈, 생긴 것도 기생오라비처럼 생겨 먹어서 마음에 안 드는군! 꼭 우리 마누라가 보는 드라마에서 나오는 놈 같단 말이지.”
무언가 개인적인 악감정까지 섞인 듯, 단단히 매어진 포박. 밧줄에 매인 손목이 시큰할 정도로 쓰라렸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사소한 아픔 따위에 신경을 쓸 때가 아니다.
땅바닥에 엎어진 상태로 고개를 든 나는 곧바로 핫산을 향해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었다.
그가 결코 거절하지 못할 제안을.
“고도의 자치권을 지닌, 특수 구역의 지방 정부. 그리고 무슬림 독립 투쟁단이 그 지방 정부의 수반이 될 수 있다는 보장.”
“……!”
내가 던진 말에 그 자리에서 얼음 기둥이 된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굳어버린 핫산.
그런 그의 반응을 불쾌함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갑자기 시커먼 검댕이 묻은 손으로 내 혓바닥을 잡아당기는 반군 병사 한 명.
“이놈 이거 아직도 혓바닥을 함부로 날름거리는 것 보소. 너 잠깐 이리로 와, 안 그래도 마음에 안 들었는데, 오래간만에 매타작을….”
“잠깐!”
혓바닥에 감도는 짭짤한 맛이 여느 감자 칩 못지않다 싶다는 생각이 들 때쯤, 한쪽 손을 들어 그의 행동을 제지하는 핫산.
행동이 참 느리기도 하다. 진작 좀 그랬으면 좋았을 것을.
“멈추어라. 우선… 그 상태 그대로 일으켜 세워 의자에 앉히도록.”
선 채로 나를 지긋이 바라보는 핫산. 그의 검은 눈동자는 마치 내게 추궁이라도 하겠다는 양, 내 표정 하나하나를 샅샅이 훑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연 핫산.
“방금 내뱉은 말이 허황된 소리라는 것쯤을 알고 계실 터. 아니 그렇습니까?”
“허황된 것은 저기 저 탁자 위에 있는 중국어로 된 책자 아니겠습니까? 차라리 제가 제의한 것이 현실성이 있지 싶습니다만.”
“하! 말도 안 되는 소리!”
현실성이 있다는 내 말에 분을 터트리는 핫산.
그 또한 중국의 일대일로 계획이 터무니없이 불리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저 태국 정부라는 타는 듯한 갈증에 <상하이 캐피탈>이 건넨 소금물이라도 마셔야 하는 상황이었을 뿐.
“태국 중앙 정부를 어떻게 믿으라는 거요? 고작 탄약그룹이라는 보증인만으로? 그 정도 안전핀에 내가, 그리고 여기 모두가 목숨줄을 믿고 맡기라고?”
“누가 탄약그룹 혼자 보증을 선다고 했습니까?”
“무슨…?”
그렇기에… 그에게 필요한 깨끗한 보증인이라는 청수(淸水).
운 좋게도, 나는 이 상황에 딱 들어맞는 보증인 하나를 알고 있다.
당황해하는 핫산. 나는 그에게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하던 말을 마저 이어나갔다.
“제법 괜찮은 보증인 한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돈도 많고, 힘도 세고, 이슬람 쪽에서 큰형님 소리 듣기 좋아하시는 양반.”
나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그쪽에서도 이득이 되리라 여길 그 보증인은 바로.
“빈 살만 왕세자. 이슬람 종주국인 사우디가 보증인 역할을 할 겁니다. 탄약그룹과 같이.”
* * * *
시곗바늘을 조금 앞으로 돌려,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
매섭던 모래바람이 갓 지나간 도심 한복판. 왕궁의 정원을 거닐던 빈 살만 왕세자는 비서관으로부터 건네받은 문서 하나를 바라보며 살며시 웃음 지었다.
“여전히 재미있는 자다. 숫제 전 세계의 정계에 발 하나씩을 걸쳐두려 하지 않은가?”
“배짱 또한 두둑하옵니다. 곧 태국 남부의 분리독립 군벌 거점으로 홀로 떠나겠다 하였나이다.”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는 빈 살만 왕세자. 발걸음을 옮겨 집무실로 향한 그는 책상 앞 의자에 몸을 누였다.
그리고, 곧바로 눈에 들어온 큼지막한 액자 하나. 벽에 걸린 그 액자에는 사우디 쿠데타 이후, 황금 권총을 들고 찍은 기념사진 하나가 들어가 있었다.
빈 살만 바로 옆에서 어색한 표정으로 높이 방아쇠를 치켜든, 젊은 동양인 남성 한 명의 모습과 함께.
“사내가 마땅히 그 정도 배포는 있어야겠지. 그러니 나와 함께 황금 권총을 들 자격이 있었던 것이고.”
“해서… 왕세자 전하께옵서는 한 회장, 그의 제안을 어찌 생각하실는지요?”
피식, 깍지 낀 손을 뒤로한 채 웃음 짓는 빈 살만 왕세자.
크라 운하, 그곳을 관장할, 고도의 자치권을 가진 태국의 이슬람 지방 정부.
사진 속, 황금 권총을 들어 올린 그 남자는 사우디에, 그리고 빈 살만에게 요구하고 있었다.
이번 일에 있어… 반군이 믿을 수 있는 보증인이 되어 달라고.
“마냥 내게 자비만을 구걸하는 것이었다면 실망이 컸을 것이다. 허나.”
이내 자세를 바로 한 빈 살만 왕세자.
손바닥으로 황금으로 조각한 지구본을 빙그르르 돌린 그는, 어느 순간 정방향으로 움직이던 지구본을 잡아챘다.
그리고 그의 시선 끝에 자리한, 중동을 중심으로 양옆으로 펼쳐진 이슬람 국가들.
“서준 한, 그는 내가 처한 사정 또한 잘 알고 있더군.”
“꼭 입안의 혀처럼 전하께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짚어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나이다.”
쿠데타로 정권을 차지한 빈 살만 왕세자. 그가 그 수많은 이슬람 국가들의 큰형을 자처하기 위해서는… 상징적인 무언가를 보여 주어야만 했다.
가령, 세계로 뻗어 나가는 이슬람 세력에 날개를 달아 준다든지 하는 식의.
“새로운 주인을 맞이한 새로운 사우디. 한 번쯤은 이슬람 국가들 사이에서 누가 맹주인지를 인식시킬 필요는 있을 터.”
“참으로 옳으신 말씀이옵나이다. 거기에 크라 운하 자체만으로도 사우디에 크나큰 이익이 될 것이 명확하지 않나이까.”
“그렇지. 물류비용의 절감은 곧 원유 수요 확대를 의미하니.”
책상 위, 만년필 하나를 집어 든 빈 살만 왕세자. 그는 비서관에게 손짓해 결재 서류 하나를 가지고 오게 하였다.
서걱서걱, 다이아몬드로 만든 펜촉이 미끄러지듯 몇 차례 춤을 춘 후, 마무리된 그의 서명.
한쪽 팔로 비서관을 향해 결재 서류를 민 빈 살만 왕세자. 만족한 듯한 표정의 그가 기지개를 켜며 입을 열었다.
“그대로 진행토록 하게나. 맹주로서 그깟 보증인 하나 서는 것쯤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
* * * *
갓 구운 빵처럼, 프린터기에서 뽑혀 나온 종이 한 장에는, 묵직한 잉크 냄새와 함께 온기가 종이에 서려 있었다.
즐거운 듯, 콧노래를 부르며 손에 든 종잇조각을 집어 든 옌룽. 자신이 직접 설계한 것임에도, 그의 눈동자에 비친 계약서 조항은 여전히 경이로워 보였다.
철저히 수탈만을 위한, 그 숨은 의도가 목표한 바가 눈앞에서 그려지는 것만 같았기에.
“이대로라면, 그 무슬림 놈들을 철저히 식민지의 장기 말로 만들 수 있을 터.”
겉으로 보기엔 번지르르한 조항들.
차관 제공, 중국군의 주둔, 정책 고문단 파견 및 지도층 자녀의 중국 유학까지.
큼직한 고깃덩어리 앞에 분명 굶주린 들개는 정신을 잃고 침을 질질 흘린 채로 달려들 것이었다.
“아니, 설령… 이 미끼에 독이 발려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한들, 당장은 받아먹을 수밖에 없을 터.”
탁자 위, 기존의 태국 중앙 정부가 남부 지역 이슬람교도들에게 가했던 차별 대우의 모습이 담긴 사진 여러 장.
사진 속에는 모든 개발과 특혜로부터 철저히 소외되고 남은 것은 오로지 가난뿐인 풍경만이 담겨 있었다.
“이런 궁벽한 곳에서 짜낸 군자금도 슬슬 바닥을 보일 것이고.”
팔락, 손을 뻗어 아래쪽의 또 다른 사진을 집어 든 옌룽.
거기에는 최근 몇 달 전, 태국 남부지방에서 있었던 중앙군의 훈련 모습이 있었다.
“이 병력으로 군부 강경파의 쿠데타를 진압했다지? 그렇다면 이미 태국 중앙정부는 한서준이와 같은 편이라 보아도 되겠군.”
점점 성과를 거두고 있는 중앙군의 압박. 그렇기에 옌룽은 오해라는 실체를 지닌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무슬림 독립 투쟁단은, 그리고 그들의 리더인 핫산이라는 자는, 자신들 <상하이 캐피탈> 이외에는 달리 손잡을 곳조차 없다는 사실을.
“옌룽 본부장님, 핫산 단장이 10분 이내로 도착하신다고 합니다.”
“도착하는 대로 지체없이 내게 올려보내도록.”
비서에게 명령을 내리고는 창밖을 바라보는 옌룽.
지난번 방콕에서의 불미스러운 일 때문이었을까?
굳이 싱가포르로 약속 장소를 변경한 핫산.
창밖으로 펼쳐지는 고층 건물과 그 사이사이에 보이는 푸른 바다. 그리고 바다 위에 떠 있는 개미 떼 같은 선박들.
그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눈에 담은 옌룽은 손에 쥔 와인 잔을 찰랑거리며 무어라 중얼거렸다.
“현재 동남아시아의 물류 중심에서 미래의 새로운 중심을 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
목구멍으로 포도주를 넘기자 곧바로 상기되는 그의 얼굴. 얼마 지나지 않아, 핫산이 도착했음을 알리는 비서의 목소리가 옌룽의 귓가에 닿았다.
“들어오시라고 해라.”
탁자 위에 유리잔을 내려놓은 옌룽. 곧바로 경첩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검은 피부의 익숙한 사내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 오십시오. 다시 뵙게 되어 참으로 기쁩니다.”
“…반갑소. 일단, 굳이 불필요한 서론보다 먼저 본론으로 들어가고 싶습니다만.”
평소보다 더 두근대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옌룽은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당장이라도… 저 어수룩한 반군 수괴가 가져다줄 막대한 이권을 품을 준비가 되었다는 것처럼.
“우선 앉으시지요. 구체적인 계약 조건을 준비해두었습니다. 단장님께서도 충분히… 받아들이실 수 있을 정도의.”
계약서를 건넨 옌룽.
손끝을 막 떠난 종잇조각에 적힌 것은 지극히 불공정한 계약 내용이었음에도, 그는 자신이 있었다.
독이 든 성배임을 알면서도, 핫산 저자는 반드시 들이켜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
“어찌, 계약 조건이 마음에 드시는지요?”
길어지는 핫산의 고민. 그 느릿한 반응이 퍽 답답했는지 대답을 재촉하는 옌룽.
그가 그토록 원하던 그 대답은 얼마 지나지 않아 들을 수 있었다.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정반대의 모습을 한 채로.
“역시나 그랬군. 그가 말한 것이 옳았다.”
“핫산 단장? 아, 아니…!”
쩍, 쩍! 힘이 잔뜩 들어가 핏줄이 선 손으로 갑자기 계약서를 찢어발기는 핫산.
여덟 조각으로 나뉜 종잇조각이 하늘 위로 솟구쳤다가, 이내 첫눈처럼 바닥을 향해 내렸다.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옌룽. 예상치 못한 상황에 가면을 벗은 그가 절규하듯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이 무슨 결례를…!”
그리고 분노한 그의 앞에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간 핫산.
행동과는 달리 차분한 얼굴의 그는 천천히 대답을 건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