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조금 일찍 시작된 일대일로(5)
“연 12%, 연체 시 24%의 금리. 거기에 공사 인력은 설계부터 현장 잡부까지 전부 중국에서 파견. 그에 따른 담보는.”
평소보다 낮고 탁한 핫산의 목소리. 방금 전, 하늘 위로 솟구쳐 올라 첫눈처럼 바닥에 떨어진 계약서의 내용은 그의 입을 통해 하나하나 낭독되었다.
무표정 속에 담긴 분노를 여실히 드러낸 핫산. 그는 옌룽을 노려본 채로 입을 열었다.
“크라 운하, 단순 운영권을 넘어 소유권 그 자체.”
“…….”
“계약서 행간에 숨은 내용은 제게 이리 말하고 있습니다. 어디, 달리 하실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갈기갈기 찢긴 계약서 조각에는 영어로 작성된 복잡한 법률 용어의 향연이 그려져 있었다.
숙련된 변호사나 관료라도 아차 하는 순간 속을 만큼 교묘하게 파인 함정.
‘생각만큼 머저리는 아니었나 보군. 아니, 어쩌면… 이 무슬림 놈의 참모 역할을 자처한 놈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안을 너무 쉽게 여긴 스스로를 자책하며, 옌룽은 거만함의 가면을 벗어던졌다.
그러고는, 마치 중국 고유의 경극(京劇) 배우처럼, 순식간에 친절함이라는 가면을 갈아낀 그의 모습.
“설마 저희 쪽에서 크라 운하를 집어삼키기라도 할까 봐 염려하시는 겁니까? 그건 지나친 걱정이십니다.”
옌룽은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뜻밖의 결과에 대응하기 시작했다.
비록, 예상치 못한 상황이나 개의치 않았다. 그의 머릿속 보따리에서는 곧바로 그럴싸한 변명이 즉각적으로 나오고 있었으니까.
“지나친 걱정이라. 계약서 내용대로라면 나는 그리 보지 않습니다만.”
“하하… 엄연히 국영화라는 카드가 있다는 사실을 저희도 알고 있습니다. 핫산 단장님께서 건국하실 국가 역시 마찬가지이고요.”
여차하는 순간, 크라 운하를 집어삼킬 생각은 당신네들도 마찬가지가 아니냐고 말하는 옌룽.
상대의 논법을 파훼했다는 사실이 즐거웠던 걸까?
거짓된 친절로 한껏 치장한 가면을 쓴 그는 그저 듣기 좋은 말만을 나열해가며, 자신의 주장을 이어나갔다.
“아까 말씀하신 그 이자율 조항은 일종의 상호 신뢰가 담긴 신사협정의 일종으로….”
“그만, 거기까지.”
그 순간, 한쪽 손을 들어 올린 핫산. 더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 그는 계약서 내의 또 다른 독소조항을 열거하기 시작했다.
성배 안에 넣은, 자신의 목을 조르기 위해 준비된 끔찍한 독약을.
“크라 운하 인근 경비를 위한 중국 인민해방군 파병. 무슬림 독립 투쟁단 간부 자녀의 중국 유학.”
“…….”
“여차하는 순간 정권을 갈아버릴 생각도 있으시겠군. 그것도… 중국에 있는 간부 자녀들의 목숨을 인질로 잡고서.”
탁, 탁. 발끝으로 땅에 떨어진 종잇조각을 뭉개는 핫산.
새하얗던 종이 뒷면에 찍힌 시커먼 군홧발 자국. 치솟아 오르는 분노를 가득 발끝에 가득 담은 그가 옌룽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중국에서 온 정책고문단 측이 모든 행정 사무를 틀어쥐시겠다? 마치 식민지를 경영하는 총독부와 비슷하게?”
“크흠….”
“이 계약서, 너무 속이 뻔히 보이는 것 아닙니까? 옌룽 본부장.”
째깍, 째깍. 순식간에 찾아온 정적에 그저 시곗바늘 소리만이 가득한 방 안.
그 어색한 침묵의 시간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단호한 모습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핫산.
“당신들과는 끝이요. 이제 더는 논할 것조차 없군.”
갈기갈기 찢겨 나간 그의 얕은수가 적힌 종잇조각을 뒤로한 채, 점점 멀어져가는 그의 모습.
이미 과녁을 향해 쏘아진 화살은, 시위를 벗어나 전혀 생뚱맞게도 자신의 가슴팍을 향해 되돌아오고 있었다. 곧이어 다가올, 실패라는 상처를 예견하며.
“…후회하실 텐데? 이 제안이라도 받지 않는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태국 중앙군에 토벌될 운명이 아니요?”
그러고는 악다구니를 쓰듯, 떠나는 그를 붙잡은 옌룽.
저주가 섞인 그 말에 심경에 변화가 인 것일까? 핫산은 그 자리에서 멈춰선 채 뒤돌아 입을 열었다.
“토벌된다? 내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그 자리에서 웃음보를 터트리는 핫산.
얼마나 그 자리에서 분노의 실소를 터트렸을까? 이윽고, 그는 무언가 잊고 있던 생각이 떠오른 듯, 품 안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 옌룽의 발치 쪽을 향해 던졌다.
“그래… 그랬었지. 이보시오, 옌룽 본부장. 내 하나 잊은 게 있었군.”
“지금 이 무슨 결례를…!”
“결례야 그쪽에서 먼저 저지른 것이고. 뭐, 배웅은 필요 없소. 애당초 기대조차 않긴 했다만.”
작별 인사조차 없이 떠나가 버린 핫산.
금속제 경첩이 맞물리는 소리가 들림과 함께, 옌룽의 눈은 바닥을 향했다.
처참하게 찢긴 계약서 종잇조각 위,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편지 한 장.
“이건…?”
전장에서 패배한 장수처럼, 축 처진 어깨를 한 옌룽은 곧바로 봉투를 뜯어 안의 편지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발신인 란에 적힌, 마치 그를 향해 조롱을 던지는 것만 같은 한서준이라는 이름.
“이… 이놈이!”
솟구쳐 오르는 혈압을 간신히 누그러트린 옌룽. 그리고, 곧바로 그의 눈동자에 일곱 자의 제목이 숨 쉴 시간조차 주지 않은 채, 후속타를 갈겨대었다.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
여수장우중문시.
고구려의 장수 을지문덕이 수나라의 우중문을 조롱하기 위해 쓴 시.
그대의 귀신같은 전략이 하늘에 닿았다는 둥, 지극히 얄미운 반어법으로 쓰인 내용은 옌룽의 안구를 마구 자극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 붉은 글씨로 강조된 다섯 글자.
깨알 같은 노란색 스마일 스티커가 함께 붙은 그 글귀를 본 옌룽. 그의 손은 어느새 사시나무 떨리듯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知足願云止(지족원운지)
만족함을 알고 그만 돌아가는 것이 어떠할까?
“한서준…! 이 미친 인간이 감히 내게 이딴 식의 모욕을!”
* * * *
“으허허. 으흐흐흐. 우리 회장님이 이런 걸로 짜장 애들 맥일 거라곤 난 상상도 못 했잖어.”
다시 돌아온 서울.
경박한 웃음소리와 함께 회장 집무실 내부를 쩌렁쩌렁 울리고 있는 김원철 아저씨.
아저씨의 취향을 저격한 것은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뿐만은 아니었다.
맨 마지막 구절 바로 옆에 붙은, 노란색 스마일 스티커. 꼭 술에 취한 김원철 아저씨처럼 생긴 그 스티커가 어지간히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이거, 바로 이거지. 사람을 놀려먹을 때는 이렇게 속을 살살 긁어 놔야 제맛이걸랑.”
“제가 또 옆에서 보고 배운 게 거진 이런 것들 아니겠습니까.”
“흐흐흐. 내가 괜히 우리 마귀할멈… 아니, 서 이사장님한테 소금 맞아가면서 깐족거리는 게 아니여. 매 버는 재주도 재주라니까.”
물론 아직 내가 저 매 버는 재주를 따라갈 도리는 없다. 저건 진짜 타고난 거니까.
오늘도 얄미운 얼굴로 초코케이크를 우걱거리는 김원철 아저씨. 딸그락 소리와 함께 텅 빈 접시 위에 포크가 포개지자, 아저씨는 곧바로 배를 땅땅 두들기며 내게 입을 열었다.
“아무튼, 인자 큰 산 하나는 넘은 거네? 그 핫산인가 핫바지인가 하는 양반이 우리 손을 잡았으니 말이지.”
“거한 보증인이 둘이나 있으니까요. 우선 우리 탄약그룹, 그리고.”
보증인.
핫산이 속한 무슬림 무장 투쟁단, 그리고 남부 지역 이슬람교도들이 피의 배신을 당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는 두 개의 안전핀.
핫산 입장에서 조금 미덥지 않았던 첫 번째 안전핀과는 달리… 두 번째 안전핀은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튼튼하고 또 거대했다.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의 주인 나으리 되시는 분까지.”
내 요청이 있고 난 후, 고작 하루 만에 승낙의 의사를 타진한 빈 살만 왕세자.
그는 내친김에 공사에 필요한 자금을 차관 형태로 지원하겠다며, 아예 크라 운하의 지분에도 손을 뻗었다.
거절하기에는 너무나 큰 액수를 제시하면서.
“잘 됐지. 남부 지역에 들어설 새로운 이슬람 지방 정부, 거기에 갈 차관은 다 빈 살만 아저씨 호주머니에서 나오게 되었으니까.”
“뭐, 그렇게 되었습니다. 여하간에, 이제는 정말 속전속결로 공사뿐입니다. 앞으로는 성원식 본부장이 고생 좀 하겠네요.”
모든 변수가 해결된 것처럼 보이는 행복한 상황.
정글에 있는 성원식 본부장이야 팔자가 고생할 팔자이니 그렇다 치고, 나는 이제야 조금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간만에 찾아온 여유 시간. 내가 이 행복한 시간에 무엇을 할지 생각하고 있는데, 대뜸 나를 향해 김원철 아저씨가 제안 하나를 던졌다.
“자, 그럼 슬슬 햇님도 집에 가라고 손 흔들고 있으니 퇴근들 하자고. 집 가기 전에 어떻게, 잠깐 쏘주나 한 잔 할텨?”
“무슨 또 술입니까. 잘 마시지도 못하는 양반이.”
“아, 그래도 오늘 같은 날 또 적셔 줘야지 않겄어? 안주는 짭짤한 걸로 하자고. 우리 회장님이 맛봤다던 그 반군 병사 손가락처럼.”
갑작스레 들이닥쳤던 반군 병력에 의해 포박당해 있을 때의 이야기를 꺼낸 김원철 아저씨.
그때 그 병사 놈의 손가락은… 어지간히 안 씻고 다녔던 것인지, 진짜 짜기는 했다. 마치 소금 한 덩어리가 혓바닥에 닿은 것처럼.
“…남들이 들으면 무슨 식인종이 회장으로 있는 회사라고 오해합니다.”
“할머니 뼈다귀해장국 간판 걸고 장사하는 곳도 많어. 엄마 손맛 어쩌고 하는 맛집도 많고. 아무튼, 갈 겨 말 겨?”
평소보다 더 강하게 재촉하는 것을 보아하니, 정말 술이 고프긴 한 모양이었다.
나 역시, 긴장이 풀려서인지 오늘따라 괜히 간을 적시고 싶은 상황.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옷걸이에 걸려 있던 양복 상의를 몸에 걸치고는 입을 열었다.
“그럼, 오늘은 좀 일찍 나갑시다.”
“흐흐흐. 어디로 갈까? 좀 조용한 곳이 좋긴 헌디.”
“일단 제 오피스텔로 가는 걸로 하시지요. 잠깐 마시다가 장소를 옮기는 걸로… 어어, 잠시만, 잠시만요.”
갑자기 울리는 진동 소리.
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어 화면을 보니, 거기에는 이제는 익숙해진 이상한 형식의 번호 하나가 쓰여 있었다.
곧바로 전화를 받은 나. 발신인 측에서는 늘 그러하듯, 간략한 용건만을 말하고는 곧바로 통화를 끊어 버렸다.
“아무래도… 오늘 소주는 다른 사람과 마셔야 할 듯싶습니다.”
작게 한숨을 내쉰 나.
아무래도 여유 있게 가만히 앉아 술잔이나 기울일 수는 없는 운명인 모양이었다.
“뭐여, 혹시 여자 사람? 아니, 일만 하던 사람이 언제 뻐꾸기도 날리고 그랬디야?”
“여자…는 아니고요. 아무래도 늘 그렇듯, 저한테 꼬이는 사람은 주로 칙칙한 아저씨들이라서요.”
칙칙한 아저씨들도 임원들처럼 편한 상대라면 좀 나으련만. 요새 나를 찾는 사람들은 죄 대하기 불편한 이들뿐이다.
그것도 지금 내게 전화를 걸어 호출한 그 아저씨는, 다른 사람들보다 유독 대하기 불편하고.
“대통령이 보자고 하네요. 지금 바로. 청와대 근처 궁정동 안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