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보복 게임(1)
청와대와 비밀통로로 연결된 궁정동 안가.
삼엄한 경계 속, 두꺼운 커튼으로 가려진 방 안에서는 상아로 만들어진 장기 말이 나무판에 닿는 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장이야.”
“허어… 멍군을 외칠 만한 퇴로가 보이지 않습니다, 각하.”
“외통수니 당연한 노릇이지. 어디 더 둘 수가 있으면 두어 보게나.”
“아이고, 항복입니다. 정말이지 도저히 당할 재간이 없습니다요.”
두 손, 두 발을 모두 들고 오늘따라 과하게 항복의 의사표시를 하는 박동희 정책실장.
그 모습이 퍽 우스웠던 모양이다. 호쾌한 너털웃음을 감추지 않는 대통령.
“이 사람, 괜히 또 그런다. 무슨 복실이 배 뒤집는 것 따라 하기라도 하는 겐가?”
“백 판. 아니, 천 판을 두어도 역시 저는 대통령 각하 발끝도 못 따라가나 봅니다. 어찌 이리 대국을 보시는 눈이 넓으신지….”
보드게임 종류라면 가리지 않는 대통령. 그는 유달리 바둑보다 장기를 더 좋아했다.
오로지 자신의 왕 하나만을 지키기 위한, 그리고 상대의 왕 하나만을 먹어 치우기 위한 게임.
자잘한 당리당략이나 셈하는 정치보다, 큰 것 한방으로 사안을 묵직하게 밀고 나가는 것 또한 그 이유 가운데 하나였으리라.
“큰 정치를 하려면 판을 크게 보아야 하는 게야.”
“그 말씀이 참으로 옳습니다.”
“그래. 그러려면… 다 둔 다음에도 복기는 필수인 것이고.”
초(楚)와 한(漢), 양쪽 장기 말을 모두 제 쪽으로 가져간 대통령.
그는 대국을 두며 두었던 모든 기보를 암기하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곧바로 경쾌한 파열음을 내며 나무판 위를 강타하는 상아제 장기 말.
“그러니, 이번 크라 운하 쪽에 있는 그 태국 남부 군벌 건. 그것 역시 마땅히 처음부터 복기함이 현명한 처사일 터.”
붉은색 루비로 음각된, 한(漢)의 장기 말 가운데 병(兵)을 잡고는 한 칸 전진하는 대통령.
첫 시작답게 가벼운 움직임이 그 무게만큼이나 가벼운 긴장감과 함께 나무판 위에 맴돌기 시작했다.
이내 까끌까끌해진 턱수염을 손바닥으로 매만지며, 그가 눈을 빛냈다.
“시작은 별것 아니었다. 한서준이 그 하룻강아지가 범 앞에서 감히 으르렁거리더군. 목숨 아까운 줄도 모르고 말이야.”
대통령은 많고 많은 장기 말 가운데, 상(象)을 잡고는 손을 위로 올렸다.
가장 많은 범위를 이동할 수 있는 패. 단조롭기 짝이 없던 장기판 위의 세력 구도가 변한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때 한서준 회장은… 참으로 사리 분별을 못 했습니다, 각하.”
“그래. 해서, 내 한번 시험을 해 보았지. 내가 두었던 수에 하룻강아지가 어찌 반응할지 말이야.”
장기 말의 바닥 면이 정확히 닿음과 함께 방 안 가득 울려 퍼지는 소리.
몇 차례 초록색과 붉은색 말이 장기판 위를 오가고 난 후, 갑자기 사각에서 날아와 자신 앞에 선 상대의 포(包).
“그런데, 그게 퍽 재미지더군.”
피식, 새어 나온 잔웃음.
대통령은 예측하지 못했던 수를 복기하는 것에 묘한 희열을 느끼기라도 한 것인지, 곧바로 입가를 씰룩거리며 말했다.
“궁성을 지키는 윤학길이를 날리고, 자네는 옴짝달싹 못 하게 아예 궁지에 몰렸었고. 기억은 나나?”
“각하….”
“한서준이 그 친구는 수를 큼직하게 두었다. 그저 이곳 한국뿐이 아니라, 태국이라는 이역만리 타국에서도 말이야. 그러니.”
복기를 거듭한 결과, 어느새 난잡하게 얽힌 대국의 모습.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입가에 걸친 대통령은, 곧바로 손을 뻗어 상대의 궁성 안 초(楚)를 집어 들었다.
마치… 상대의 왕일지언정, 반드시 자신의 패로 쓰고 싶기라도 한 듯이.
“두고두고 곁에 둘 만큼, 한서준이는 이용 가치가 충분하다. 그리 결론 내리는 것이 맞지 아니한가?”
“지극히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각하. 버르장머리 없는 풋내기조차 품으시는 그 혜안, 어찌 탄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허허. 이 사람 참. 내 무슨 말을 못 하겠구먼.”
아부의 신이 몸에 빙의한 듯, 스스로 전자동 인간 비데를 자처하는 박동희 정책실장. 그 모습은 어지간한 항문외과 전문의가 처방한 치료제 못지않았다.
비록 입에 발린 말일지언정, 퍽 듣기 좋았던 모양이다. 겉으로는 손을 절레절레 흔들지만, 내심 웃음을 감추지 않는 대통령.
“되었네. 되었어. 슬슬 올 때도 되었다 했는데, 아랫사람들에게 미리 주안상이나 좀 깔아두라고 해 봐. 거하게 말일세.”
“예…?”
약간의 포도주 외에는 술을 절제하는 것으로 유명한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오늘따라 왠지 모를 과음이 있을 것을 미리 주지하는 모습.
평소와 다른 그의 모습에 머리 위에 큼지막한 물음표 하나를 띄운 박동희 정책실장.
그 모습을 본 대통령은 무언가가 기대되는 듯 콧노래를 부르며 대답을 주었다.
“싹수가 있는 놈과는 술자리도 거하게 해야 하는 법이니 말이야.”
* * * *
“부르셨습니까, 대통령님. 무슨 일이신지요?”
그냥 가정집처럼 보였던 궁정동 안가 내부는 흡사 군 벙커를 방불케 할 만큼 철옹성처럼 삼엄했다.
굽이굽이 좁고 긴 복도를 여러 바퀴 지나, 수십여 개의 문 가운데 하나를 여니 나오는 넓은 방.
그 안에는, 이미 차려진 주안상 앞에 앉은 대통령이 앉아 있었다.
“그래. 생각보다 조금 늦었군. 그래도 명색이 대통령인데, 면도 안 서게 누구 올 때까지 기다리게나 하고 말이야.”
내게 짓궂은 농을 던지는 대통령.
참… 언제 보더라도 늘 한결같이 까탈스러운 양반이다. 그렇게 효용성을 여러 차례 입증해 주었건만, 여전히 매 순간 내 그릇을 시험하려는 모습.
“제가 조금 늦기는 했습니다만.”
그렇다고 여기서 마냥 패배한 개처럼 꼬리를 말고 굽히고 들어간다면, 그 역시 줏대 없는 이라는 낙인이 찍힐 터다. 마치 병풍 옆에 서 있는 박동희 정책실장처럼.
‘하여튼, 저 양반 성격 하고는….’
뒤이을 내 말을 기다리는 대통령.
때마침 구석 어딘가에 굴러다니는 상아로 만든 장기 말과 나무판 하나가 내 눈에 들어왔다.
마치 대놓고 나더러 보라는 듯, 놓인 그 기물들.
나는 대통령의 의중에 맞추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선을 내어주셨으면, 기다림의 미학이 뒤따르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호오, 한 회장도 장기 좋아하나?”
기다렸던 대답이 나오자 만족스러운 듯,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지은 대통령.
앞으로 나아가 방석에 앉은 나는, 그가 천천히 술잔 가득 따르는 전통주를 받으며 대답했다.
“나무판 위에 두는 장기도 좋아하긴 합니다만, 실제 사람을 움직여 두는 장기가 가장 재미있더군요.”
“하! 한 회장은 정치를 했어도 잘했을 걸세.”
“과찬이십니다.”
“허허. 아직 본론은 꺼내지도 않았는데, 벌써 과하다 하면 아니 되지 않겠나?”
비워진 술잔에 다시 가득 따른 전통주. 달큼한 곡식 향이 내 코를 거쳐 쌉쌀한 맛과 함께 목구멍 너머로 넘어갔다.
그리고 취기와 함께 남은 그 잔향은 뒤이은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크라 운하. 기어코 짓고 말 거라지?”
“그룹의 명운을 건 사업이니, 반드시 성공시켜야지요.”
“어깨 위에 짐이 퍽 무겁겠어. 그런데 말이야, 내 어디선가 한 회장이 운동을 좀 한다 들었네. 쇠 드는 걸 그리 좋아한다고?”
어디서 알아본 것인지, 이미 내 운동 취향까지 전부 알고 있는 대통령.
그는 셔츠 아래로 드러난 내 어깨 근처의 근육을 가리키며 하던 말을 마저 이어나갔다.
“그러니, 내 그 위에 짐 하나 더 얹겠네.”
“…내후년 총선 말씀이십니까?”
“타이밍만 잘 맞추어 봐. 정식 개통이 아니라, 가개통 비슷한 것이라도 상관없으니 말일세.”
저번 재보궐 선거에서 큰 기술이 들어갔던 것이 제법 쏠쏠한 모양이었다. 자기 쪽에서 먼저 제안을 던지는 대통령.
물론 따지고 보면 내 쪽에서도 무리는 아니다.
공사야 어차피 최단 시간 내로 끝이 날 것이고, 설령 기한을 넘기더라도 일부 구간 가개통 형식으로 지지율만 올리면 장땡이니까.
“음….”
나는 일부러 고민하는 척을 길게 이어갔다. 속으로 1부터 10까지 천천히 셀 정도로.
그리고는 대통령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힌 그 순간, 나는 곧바로 타이밍에 맞게 그에게 말을 건넸다.
말속에 단단한 뼈 하나를 심어둔 채로.
“대통령님께서 백지장을 같이 맞들어 주신다면, 제가 짐을 들기에 조금 수월하지 않을까 합니다.”
공짜는 없다.
그저 한없이 빨리는 관계는 사양이다.
대통령이 나와의, 탄약그룹과의 암묵적인 공생을 원한다면… 그 또한 내게 합당한 무언가를 건네야 할 터.
“그간 신용이 좀 쌓였으니, 내 이번엔 선금을 좀 줌세.”
“선금이라면…?”
다행히도 그는 그런 부분에 있어 사업가적 마인드가 출중한 자였다.
이런 대답이 나올 것을 알고서, 미리 준비해둔 것일까?
고개도 돌리지 않고서, 병풍 옆에 선 박동희 정책실장에게 말을 꺼내는 대통령.
“이봐, 박 정책실장! 그거 좀 가지고 와 봐!”
“예, 대통령 각하!”
어딘가에서 가져온 묵직한 서류 가방 하나.
지퍼 중앙에 걸린 비밀번호 자물쇠를 푼 대통령은, 내게 푸른색 ‘2급 기밀’ 딱지가 붙은 문서 하나를 내밀었다.
“나는 말이지. 누가 점찍어둔 내 먹잇감에 눈독을 들이면 심기가 불편하거든. 특히나.”
국가정보원 해외공작부서 로고가 박힌 기밀문서.
거기에는 최근 중국 정계 내부의 권력 이동 현안과… 그에 파생된 <상하이 캐피탈>의 움직임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무언가 경쟁심 내지는 분노 비슷한 감정이 복합적으로 들어왔는지, 눈에 불을 켠 채로 그르렁거리는 대통령. 그는 서류 뭉치를 탁자 위에 거칠게 내던지듯 내려놓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저 말도 안 통하는 다른 나라 놈이 그랬다면 더더욱 그렇고.”
“이건….”
재미있네.
중국 정부의 등을 업은 <상하이 캐피탈> 놈들… 생각보다 앙큼한 꿍꿍이가 있던 모양이었다.
“크라 운하로 엿을 먹은 놈들이 한 회장 자네에게 견제구를 날리려면, 가장 쉬운 방법은 하나겠지.”
중국 지방 정부의 인사이동. 관련된 조례와 규칙의 제정. 그리고…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고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는, 각종 애매모호한 규제의 신설.
모든 것이 가리키는 방향을 마주한 나는, 탁자 아래로 주먹을 쥐었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손등 위로 올라온 혈관. 아무래도… 이제부터 놈들과 다시 정면으로 부딪쳐야 할 성싶다. 아주 격할 정도로.
“자기들 나와바리에 있는 눈엣가시부터 물어뜯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쉽게 발을 뺄 수 없는 것을.”
내 추론이 퍽 만족스러운 듯 웃음 짓는 대통령.
내게 기밀 서류를 건넨 그의 입에서 이 사태의 쐐기를 박는 마지막 말이 바깥으로 흘러나왔다.
“탄약-철화 반도체. 중국 현지 시설. 조만간 놈들이 어떻게든 몰락시키려 들 게야. 그쪽 법이라는 방망이를 마구잡이로 휘둘러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