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보복 게임(2)
딱딱한 대리석 바닥. 그 위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인 옌룽.
그의 앞에는 매끄럽게 날을 간 진검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모든 것이 제 불찰입니다, 주군.”
철컹, 스산한 소리와 함께 칼집에서 빼어나온 칼날. 옌룽은 칼손잡이를 제 주인 쪽을 향해 건네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따라서, 실패에 대한… 책임을 이렇게나마 지고자 합니다.”
늦은 밤, 천장 위의 전등 빛을 받아 반짝이는 칼날.
조금 맥 빠진 눈을 한 제임스 왕 이사는 그 앞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어리석은 소리다, 옌룽. 너 또한 알고 있지 않은가?”
구둣발 앞코로 날 선 진검을 옆으로 치워버리는 제임스 왕 이사.
그의 큰 키만큼이나 긴 그림자가 눈앞에 드리우자, 옌룽은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주군….”
“불의의 타격에 자책할 필요는 일절 없을 터. 그럴 바에야 상황을 수습하는 것이 우선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차분한 모습의 제임스 왕 이사.
싱가포르에서 결렬되었던 협상 결과를 보고했을 때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의외라는 듯한 옌룽의 표정이 납득으로 바뀐 것은 뒤이은 제임스 왕 이사의 말 한마디가 있은 후였다.
“다행히 베이징의 노괴는 이번 일을 장기 계획이라 여기던 모양이다.”
그때 생각을 회상하면 철렁한 것인지, 가슴팍을 쓸어내리는 제임스 왕 이사.
무슬림 독립 투쟁단의 핫산. 그가 탄약그룹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 전해지자마자, 제임스 왕 이사가 가장 먼저 행한 것은 베이징행 항공권을 끊는 것이었다.
‘송구합니다. 저희 쪽에서 실수가 있었습니다. 후처리를 바로 하여 반드시 성공시키겠습니다.’
베이징의 권력 중심지, 중난하이로 한걸음에 달려갔던 제임스 왕 이사.
최고 권력자의 정치적 스승 노릇을 하는 베이징의 노괴. 제임스 왕 이사는 그의 앞에서 바닥에 코가 닿을 만큼 고개를 숙였다.
‘허허허. 나도 들었다네. 방심하고 있다가 코가 깨졌다지?’
‘…면목 없습니다. 장 대인.’
앞발로 쥐의 꼬리를 잡아둔 채, 오묘한 웃음을 지으며 어떤 처분을 내릴지 궁리하는 베이징의 노괴.
장 대인이라 불리는 그는 금박을 입힌 부채를 탁자 위에 가볍게 툭툭 치며, 자신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한 이 시간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긴장감이 제임스 왕 이사의 척추를 따라 올라온 그 순간. 갑작스레 바깥에서 인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대인,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이야기 나누시는 중인 것은 알기는 하오나, 워낙 급한 일이오니….’
보좌진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 그녀를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며 수염을 쓸어 넘긴 장 대인이 대답했다.
‘괜찮네. 무슨 일일꼬?’
‘전국 인민위원회 상무위원장께서 긴히 기별을 보내셨습니다. 급한 일이라 하는데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이런… 위에서 또 문제의 안건을 추진하다 막힌 모양이로군. 하여간, 그 자리에 올라가도 일 처리는 풋내기라니까.’
혀를 끌끌 차는 장 대인.
베이징 중앙 정계와 관련된 몇 마디 대화가 더 오간 후, 보좌진을 돌려보낸 장 대인은 그 자리에서 방치되고 있던 제임스 왕 이사에게 말을 꺼내었다.
‘뭐, 남방은 단기필마로 결판이 날 전장은 아니지 않은가. 계속 지켜는 보겠네.’
‘…하해와 같은 장 대인의 드넓으신 배포에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피식, 그 굴종의 모습에 만족스럽다는 듯 웃음 짓는 베이징의 노괴.
날 선 앞발을 쥐의 꼬리에서 떼어 준 고양이는, 꽁지가 빠져라 도망치려는 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낮게 그르렁거렸다.
‘차후 정산 기간에 실망만 시키지 말게나. 자비와 인내심은 그리 쉽게 베풀어지는 것이 아님은 알고 있겠지?’
‘…….’
‘그럼 살펴들 가게나.’
* * * *
쿵쾅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자리를 떠나던 제임스 왕 이사.
지금 이곳. 자신의 본거지인 상하이에 온 지도 제법 시간이 많이 흘렀음에도, 그때의 감정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랫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도록,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 한 줄기를 닦아내며 그가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이는 지금으로선 다행인 상황일 수도 있긴 하지만… 차후 베이징의 노괴가 문제 삼고자 하면 능히 문제가 될 수 있을 터.”
칼날 위를 걷는 듯, 차오르는 긴장감. 그 칼날은 그에게 어떤 행동을 요구했다.
반드시 실행에 옮기지 않고서는, 조여오는 숨통에 호흡조차 할 수 없게 될 수 있기에.
“꼬투리를 잡히긴 전, 먼저 장 대인의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주군. 언제 노괴의 마음이 바뀔지 모르니….”
“물론 겸사겸사 묵직한 견제구를 던져, 탄약그룹과 한서준의 숨통을 조를 필요도 있다.”
머릿속에서나마 일단락된 상황. 심호흡을 크게 내뱉은 제임스 왕 이사는 아직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옌룽을 일으키며 물음을 던졌다.
“이 두 가지 모두를 충족할 방법. 무엇이 있겠는가?”
그리고, 마치 이 물음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제 주인이 건넨 손을 맞잡고 몸을 일으키는 옌룽.
곧바로, 구석으로 멀찍이 떨어진 진검의 칼날 면에 그의 자신감 넘치는 눈빛이 비쳤다.
“제게… 복안이 있습니다. 주군.”
“복안?”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나가는 옌룽.
싱가포르에서 겪었던 그 수모.
여수장우중문시, 자신을 실패한 패장으로 묘사한 그 편지를 읽고 난 후부터. 그리고 그 편지 말미에 붙은 노란색 스마일 스티커를 본 후부터, 그는 생각했다.
반드시… 자신에게 최악의 수모를 안겨준 탄약그룹과 한서준의 등에 칼을 꽂을 것이라고.
“분명, 크라 운하라는 대형 프로젝트에는 탄약그룹의 전사적 역량이 집중될 터이니, 최대한 발목을 잡아 이를 분산시켜야 합니다.”
“계속 말해보도록.”
“마침 요 몇 년 사이, 탄약그룹의 선대 회장이 중국에 설비 투자를 많이 했었습니다.”
푸저우에는 외국계 전자기업의 공장이 여럿 들어서 있었고, 그 가운데에는 탄약 전자 또한 그 일군을 이루는 것들 가운데 하나였다.
상당히 큰 규모의 반도체 공장. 이제껏 중국 내에서 잘 굴러가던 그 공장에 갑작스레 먹구름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거기에 최근 탄약그룹이 인수한 철화 반도체. 그 또한 푸저우에 건설 예정인 공장 부지를 대규모로 임차한 상태입니다.”
“푸저우 반도체 공장이라….”
탐탁지 않은 반응의 제임스 왕 이사. 물론 이론상으로는 완벽한 계획이었다. 어디까지나 이론상으로는.
푸저우는 그가 속한 파벌이 쥔 도시가 아니었기에. 이를 위해서는 여러 껄끄러운 마찰이 필요했던 상황.
그렇기에 말꼬리를 흐리며 장고에 돌입한 모습. 그러나….
“그래, 그렇군! 이제 더는 의미가 없게 되었지!”
자신 앞에 선 옌룽의 미소를 본 제임스 왕 이사. 그는 막 머리에서 떠오른 섬광을 정리해 입 밖으로 내뱉었다.
“이제는 중앙 권력 구조가 바뀌었으니, 푸저우 또한 우리 쪽에서 건들 수 있게 되었어.”
“역시 주군께서는 영민하십니다. 금세 함의를 알아채시다니 말입니다.”
품속에서 만년필 한 자루를 꺼내 든 제임스 왕 이사.
곧바로 책상을 향해 몸을 움직인 그는, 크림색 종이 하나를 꺼내어 검은 잉크로 서명을 마쳤다.
“좋다. 남방에서의 본격적인 공격을 가하기 앞서, 미리 복부에 몇 대 타격을 넣고 가는 것이 현명할 터.”
그는 서명한 종이를 옌룽에게 내밀었다.
‘전권 위임서’라는 활자가 맨 위에 찍힌 그 종이. 거기에는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지겠노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코를 찌르는 묵직한 잉크 냄새. 전장의 시작을 알리는 냄새를 맡은 그는 곧바로 제 수하에게 출전 명령을 내렸다.
“옌룽, 당장 가능한 모든 방안을 총동원하도록. 일전 남방에서의 책임은 이번 성과로 지게 될 것이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주군.”
* * * *
푸저우. 이제는 합작법인이 된 탄약-철화 반도체의 중국 공장은 쉴 새 없이 바빴다.
점점 발전하는 IT 산업에 발맞추어 장밋빛 미래를 꽃피운 반도체 전망. 특히나 자체 생산 기술이 미미하지만, 수요는 넘쳐나는 중국이었기에 그 이윤은 더욱 높았다.
“아니!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거요! 도대체 우리가 무슨 규제를 위반했다고… 으악!”
그런 꿈 같은 상황은 하루아침에 물거품처럼 터져 버리고 말았다.
대낮부터 무장한 인원을 끌고 탄약-철화 반도체 공장에 찾아온 공안.
위압감이 드는 제복 차림의 그들은 평소보다 훨씬 고압적인 태도로 현장 관리자의 가슴팍을 밀치며 소리쳤다.
“닥쳐라! 무슨 문제가 있는지, 어떤 법령을 어겼는지는 이제부터 확인하면 그만이다.”
“그게 무슨…!”
반도체 공장 바닥에 쓰러진 채, 망연자실해 있는 현장 관리자.
공안 간부는 그런 그의 모습 따위야 아무런 상관조차 않는다는 듯, 곧바로 아래 직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봐! 수색 시작해! 전부 다 털어도 상관없다!”
“예, 알겠습니다!”
와장창, 거친 구둣발이 공장 전체를 짓밟았다.
사무실 안쪽, 사내 중요 서류가 보관되어 있던 캐비닛은 금세 빈 금고로 전락했고, 몇몇 생산 설비까지 외부 먼지로 인해 오염된 상황.
“허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 것이지….”
쑥밭으로 변해버린 공장을 보고는 망연자실해 있는 현장 관리자.
넋이라도 나간 듯, 입을 벌린 채 허탈해하는 그의 어깨에 누군가가 손을 올렸다.
“김 형! 김 형! 정신 좀 차려 봐요!”
“박 소장?”
철화 반도체 출신 박 소장.
표정으로 보니, 그 역시 비슷한 일을 당한 모양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속에 쌓인 이야기를 앉은 자리에서 풀어내는 박 소장.
“그 미친 짜장 놈들이 갑자기 공장 건설 예정 부지에 들이닥쳤지 뭐요! 그러더니 허가가 취소되었으니 싹 다 꺼지래!”
“그건 또 무슨 소리여? 이미 몇 년 전부터 기반 공사까지 싹 끝냈는데.”
“여기 터진 거랑 똑같은 이유지! 아이고, 이제 어떻게 하나… 이거 아무래도 윗대가리 놈들이 엮인 것 같은데.”
평소 뇌물이나 받아먹던 공안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기에, 달리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작금의 상황.
때마침, 중국 현장을 시찰 중이던 탄약 전자의 미셸 사장 또한 다급히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이럴 수가…!”
“미셸 사장님!”
처참한 반도체 공장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한 미셸 사장.
그는 반쯤 울부짖는 현장 관리자들을 진정시키며, 해결 방안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좋습니까… 이 난리통에 수습할 방법도 보이지 않으니.”
“일단, 상황을 정리하고 있으십시오. 내가 곧바로 회장님께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자신의 선에서 해결될 일이 아니기에 곧바로 윗선 보고 절차에 돌입한 미셸 사장.
직통 핫라인 전화를 들고 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인 그는, 현장의 참사를 생생하게 보이기 위해 영상 통화를 켰다.
“회장님? 미셸입니다. 지금 중국 반도체 공장에서….”
“알고 있습니다.”
“회장님…?”
분명 난장판이 된 모습을 보고 있건만, 유독 차분한 모습의 회장.
뒤이어, 그의 입에서 예상 밖의 지시가 내려졌다. 너무나도 자신감에 찬, 목소리와 함께.
“상황은 이미 파악하고 있습니다. 일단은 귀국하지 말고 거기서 대기하십시오. 놈들의 뒤통수를 쳐버릴 계획이 머릿속에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