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술 게임(1)
“철수합니다. 완전히.”
미셸 사장과의 영상 통화가 끝난 후, 나는 김원철 아저씨와 유세나 보좌관의 얼굴을 보고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기계 부품 하나, 나사못 하나 남기지 않고 철저하게 중국 시장에서 빠져나갑니다.”
“음….”
일견 갑작스러워 보일 수 있는 내 결단에, 평소답지 않게 장고의 시간을 들이는 김원철 아저씨.
중국 시장에서 벌어들이는 반도체 매출 규모가 한 해 한 해마다 점점 커져만 가니 그럴 법도 했다.
“좀 아까운디… 아무리 그래도 선대 때부터 투자했던 것까지 다 빼겠다는 거 아니여.”
“과자를 쥔 주먹을 펴지 않는다면, 유리병 입구에서 손을 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중국 반도체 시장이라는 과자.
찐득한 꿀이 잔뜩 묻은 그 과자는 탐욕을 절제하려야 쉬이 절제하기 힘든 것일 터.
그러나… 길게 보아야 한다. 어차피 대립각을 세울 것이라면, 그리고 차후 10여 년 후 발생할 국제 반도체 전쟁을 생각한다면, 미리 이쯤에서 손을 빼는 것이 더 현명할 터.
나는 손가락에 묻은 중국이라는 꿀과 과자 가루를 닦아내고는, 천천히 결단의 말을 꺼내었다.
“크라 운하. 미래의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가지고자 한다면, 그깟 중국산 과자 따위 얼마든지 놓을 수 있으니까요.”
“중국이 돈맛 하나는 기가 멕혔는데 말이여… 쩝, 할 수 없지.”
“이제 아쉬움을 논할 때가 아닙니다. 일단 완전 철수에 필요한 사항부터 논해보시죠.”
워낙 단호하게 이야기해서 그런가, 김원철 아저씨는 더는 다른 반박을 내세우지 않았다.
그저 손가락으로 뒤통수를 가볍게 긁은 후, 머릿속에 켜켜이 쌓인 정보를 말해낼 뿐.
“일단 토지는 상관없어야. 어차피 짜장 애들 국유지니까. 건물은 손해를 좀 본다 치고, 문제는… 기계장치여.”
반도체 기계장치.
비록 중국 공장에 설계에 필요한 핵심 기술이 들어가 있지는 않지만, 마지막 후처리 공정에 필요한 정밀기기는 대량으로 가져다 두었다.
분명… <상하이 캐피탈>은. 아니, 그 뒤에서 뒷짐을 진 채 괜히 짐짓 점잔만 떨고 있는 중국 정부는 이 정밀기기에 눈독을 들일 터.
“아무리 생각해도 짜장 야들이 얌전히 수출 허가를 안 내줄 거란 말이지.”
“항만에서 괜히 조사한다는 핑계로 뜯어보지나 않으면 양반이겠죠.”
“씹고 뜯고 기술까지 맛보고 즐길 것이여. 아무튼, 이걸 어떻게 빼내냐가 관건이다, 이 말이지.”
정상적인 수출은 절대 불가능하다. 애초에 푸저우 쪽 공안에 중앙정치의 압력이 들어왔으니.
톡, 톡. 나는 탁자 끄트머리에 손가락을 몇 차례 튕기며 생각을 이어나갔다.
“흐음.”
“회장님….”
꽃사슴같이 동그란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는 유세나 보좌관.
생각해 보니, 그녀는 매번 험한 일에 얽히기만 했던 것 같다.
합법과 불법의 묘한 경계선에서 굽 높은 하이힐을 신은 채 나와 함께했던 유세나 보좌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내 머릿속에는 자그마한 번개 하나가 튀었다.
무언가 불법 냄새가 나기는 하지만, 이 꽉 막힌 상황을 타개할 만한 상상력이 가득 담긴 백만 볼트짜리 번개가.
“한국으로 수출할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세나 보좌관이 좀 도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말입니까, 회장님?”
“아무래도 좀 위험한 특수작전 비슷한 것이 될 것 같거든요. 베테랑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동공에 지진이라도 몰아닥친 듯, 흔들림을 감추지 못하는 유세나 보좌관.
그걸 본 김원철 아저씨는 도저히 가만히 있으려야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곧바로 고막을 향해 돌진하는 특유의 깐족거리는 목소리.
“오! 토끼 도박 우먼, 간만에 출동하는 겨?”
물론 호기롭게 시작된 그 깐족은 유세나 보좌관의 안구에서 발사된 레이저 빔에 막히고 말았지만.
“크흠. 아니, 그 저번에 토끼 가면 보니까 복슬복슬하니 따땃해 보여서 말이여. 부러워서 그래, 부러워서.”
“진짜… 김 비서실장님, 자꾸 그러면 저도 가만 안 있어요.”
“아니, 뭐 그런데 사실 틀린 말인가. 우리 회장님이 이런 말 할 때마다 거하게 사고가 하나씩 난단 말이지. 안 그랴?”
나를 향해 눈을 글썽이는 김원철 아저씨.
딱히 저 상황에서 구원의 동아줄을 뻗어줄 생각은 없긴 하지만… 사실 아저씨가 한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번 건. 정말 기존에 벌였던 일만큼이나 거한 사고가 날 예정이니까.
헛기침 소리로 목을 푼 나는, 유세나 보좌관을 향해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뭐, 이번엔 맞긴 합니다.”
“회장님…?”
“그렇다고 저번처럼 지하 카지노 같은 곳에 데려가는 건 아니니, 그건 안심하셔도 되고요. 뭔가 좀 더 센스 있게 갈 거니까요.”
센스 있는 해결책. 그것은 먼저 상대를 정확히 아는 것에 기인한다.
중국 지방행정은 개판이다.
암만 <상하이 캐피탈>이 푸저우 지방정부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고 한들, 그것은 중앙정부의 압박에 잠시 눈치를 보는 것일 터.
그렇다면… 의외로 일견 거대해 보이는 이 둑에 허술한 구멍 하나를 내는 것은 간단할 것이다.
“회장님, 어떤 해결책이신지?”
기대에 찬 눈을 한 유세나 보좌관. 미안하지만 둑에 구멍을 내는 일은 아무래도 유세나 보좌관이 나와 함께 해야 할 성싶다.
일부러 눈동자에 신뢰를 듬뿍 담아, 나는 그녀에게 뜻 모를 물음 하나를 던졌다.
“술 좀 잘하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주 못하지는 않습니다만….”
겸손도 심하다. 분명 내가 알기로는 이 방에 있는 사람 전부 소주 다섯 병은 기본으로 깔고 간다.
물론, 거기에는 유세나 보좌관 또한 포함이고.
“푸저우의 높으신 분들이 술을 그렇게 좋아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어디 한 번 실컷 먹여 봅시다.”
“네?”
“푸저우 지방정부의 수장을 회유하는 척 기만전술을 펼칠 겁니다. 바로 그날.”
어차피 잠시 눈치를 보는 지방정부라면, 필시 내 쪽에서 던지는 유혹의 강아지풀에 반응할 것이다.
뇌물과 술이라는, 결코 잡을 수 없는 신기루에 취한 채로.
“실컷 먹여 놓고 자빠트린 동안, 현장에서 나사 하나까지 분해한 반도체용 정밀기기는 홍콩을 향한 밀수 열차에 실려 달려갈 겁니다.”
* * * *
청와대 관저.
평소 새벽녘 찬 공기가 어스름하게 깔릴 때부터,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는 대통령.
그러나 오늘, 무슨 일인지 대통령은 관자놀이를 매만지며 해가 중천에 걸리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말마에 가까운 짧은 신음을 토해내며.
“각하, 각하? 대통령 각하?”
“끄응. 그래, 박 실장. 지금 시간이 벌써… 허어, 오래 기다렸겠구먼.”
벽 한쪽에 놓인 큼직한 괘종시계를 바라보며 눈을 비비는 대통령,
비록 숙취에 전 모습이었지만, 그는 무언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묘한 헛웃음을 짓는 그에게 조심스레 물음을 던지는 박동희 정책실장.
“아닙니다, 각하. 저도 방금 왔습니다. 혹시, 몸 상태는… 어떻게 좀 괜찮으신지요?”
“음, 나도 나이가 든 모양인가 보네. 조금만 주량을 넘기면 이리도 머리가 깨질 것 같으니. 허나.”
찬물 한 잔을 빈속에 들이켠 대통령. 그는 어젯밤 궁정동 안가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회상하며 길게 기지개를 켰다.
“아주 간만에, 취해도 좋을 만큼 재미있는 자리였지.”
“한서준 회장… 말씀이십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대통령은 침대맡에 놓인, 반으로 접힌 목제 장기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상아로 만들어진 장기 말 하나를 집어 들고는 입을 여는 대통령.
“뭐, 그 젊은 친구가 어찌 움직일 것인지 이제 관전하기만 하면 되는 게지.”
청와대 내에서 인간 비데라는 별명을 가진 사나이답게 충성심을 보일 기회라면 몸을 사리지 않는 박동희 정책실장.
나름 주인의 복심을 알아차렸다 여긴 것인지, 그는 사뭇 당당한 목소리로 대통령에게 대답했다.
“허면, 국정원 측에 따로 협조 지시를 내리면 되겠습니까?”
“아니, 아니. 그러지는 말게나.”
“예?”
딸그락, 탁자 위에 놓인 장기 말. 초록빛 에메랄드 박을 음각으로 박아 넣은 초(楚)는, 전등 불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치 스스로 움직여 만들어 나갈 판에서 자신이 어떤 모습을 보일 건지 기대하라고 말하는 것처럼.
“가만히 두고 지켜보기만 하게. 한서준이 그 친구… 어떤 행보를 보일지 기다리는 재미가 있는 자니까.”
* * * *
중국 광둥성부터 홍콩까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를 오가는 보따리 상인들.
밀수의 귀재라 할 수 있는 그들은, 최근 요 며칠 새 이상한 소문이 떠돌고 있다는 소식을 귀에 담고 있었다.
“옘병, 이 짓거리도 오래는 못 하겠네. 당장 집에서 애새끼는 밥 달라고 징징대는데, 받는 돈은 푼돈이니 원.”
허름한 식당.
빗물이 식탁 위로 들이치는 천장 아래에서, 허술한 식사로 끼니를 때우는 보따리상들.
“그 있잖아. 우리 구역 쪽 대장한테 들은 건데, 푸저우로 가면 큰 건수가 있다던데?”
늘 있는 고된 삶에 대한 푸념.
그러나 그들 가운데 누군가가 띄운 운에, 보따리상들의 대화 주제는 순식간에 다른 것으로 옮겨졌다. 푸저우라는 큰 건수로.
“나도 들었네. 무슨 코쟁이 백인 물주 하나가 보따리상 수백 명을 모은다나, 어쩐다나.”
“크흠, 거 조금 위험하지 않나? 듣기로는 단가가 세긴 해도, 안에 내용물이 뭔지를 모르니 난 좀….”
외부에 일절 발설되지 않고, 그들 사이에서만 돌고 있는 푸저우 건.
대관절 무슨 물건을 운반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평소 단가의 열 배에 달하는 수고료에 구미가 당기지 않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차피, 이대로 있으면 굶어 죽는 것이여.”
딱딱한 빵, 고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허여멀건 국.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보따리상은 탁자 위로 젓가락을 내려놓고는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가겠네. 어차피 요사이 건수도 줄어서 손가락만 빨게 생겼는데 잘 된 것이지. 자네는 어쩔 텐가?”
“나야 뭐… 일단 애새끼 밥도 먹여야 하고. 열 배라고 하잖나. 그럼 좀 멀어도 가긴 가야겠지.”
열 배라는 단가 앞에 결의를 다지는 보따리 상인들. 그런 그들의 목소리를 언제 들은 것인지, 암흑가 골목에서 소리 없이 다가온 사내 한 명.
“지원자들?”
허름한 간이 식당 앞에 선 그는, 보따리 상인들을 보고는 엄지손가락으로 바깥을 가리키며 말했다.
“10분. 그 안에 다 먹도록. 바로 출발할 거니까.”
“예… 예! 알겠습니다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허겁지겁 뱃속에 음식을 밀어넣는 보따리 상인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뒤로 한 채, 바깥의 차량에 올라탄 의문의 사내는 품 안에서 전화기를 꺼내었다. 자신의 위에 있는 누군가에게 보고를 올리기 위해서.
“예, 사장님. 여기 인력은 오늘 자로 한 마흔 명쯤 더 들어갑니다.”
중국어 억양이 섞인, 어색한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사내.
전화기 너머의 백인이 조금 다급한 듯 무어라 물음을 던지자, 그는 곧바로 대답을 건네었다.
“걱정하지 마십쇼. 여기 보따리들은 호적도 없어서 공안이고 나발이고 추적도 못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