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술 게임(2)
“끄응, 이거야 원. 일이 영 피곤하게 되었다.”
푸저우.
해안가에서 조금 들어가 강 하류를 거슬러 올라가면 나오는 지방정부 청사.
회백색의 콘크리트 건물 안, 창문 너머로 모습을 보이는, 반백 살 정도 살았을 법한 푸저우시 당 서기.
뚱뚱한 체구의 그는 오늘따라 유독 머리가 아픈 듯, 집무실에 앉은 채 표정을 찡그렸다.
“암만 베이징 권력 구도가 바뀌었어도 그렇지… <상하이 캐피탈>이라고 했나? 이거 무슨 이상한 돈놀이 하는 놈들 명령이나 듣게 생겼군.”
“그 베이징의 노괴가 직접 지시한 내용이니, 달리 피할 방법도 없지 않겠습니까? 거기에.”
슬쩍 음흉한 미소를 얼굴에 띄는 부관. 그는 푸저우시 당 서기를 바라보며 목소리를 낮춘 채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거하게 한 건 털어먹을 기회이기도 하고요.”
“기회? 어차피 쫓겨날 놈들인데, 무슨 털어먹고 자시고 할 게 있단 말인가?”
“허허허. 어차피 쫓겨날 놈들이니, 마지막까지 쫓겨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지 않겠습니까?”
“음…?”
“그 큰 공장을 깔아둔 놈들이 얌전히 죽지는 않을 것이고, 결국 손을 내밀 곳은 하나뿐일 겁니다.”
가만히 그의 말을 곱씹는 푸저우시 당 서기.
1초, 2초, 3초,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머리 위에 환한 백열전구 하나가 떠올랐다. 권력의 곁다리일지언정 크게 한 건을 해 먹을 수 있는 광명과도 같은 아이디어가.
“그렇군! 안 되는 걸 되게 한다 약조하고, 종국에는 입을 씻으면 될 문제 아니던가!”
“그렇습니다. 역시 현명하십니다. 당 서기님.”
손바닥으로 제 무르팍을 치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푸저우시 당 서기.
평생 변방에서 돌기만 했던 그였기에, 이번 일로 아예 단단히 팔자를 고치고 싶은 모양이었다. 비서실도 통하지 않고 곧바로 전화기에 손을 댄 채, 어딘가의 전화번호를 찾아 헤맬 만큼.
“당 서기님?”
“가만있어 보게. 내 당장 그 탄약그룹인가 하는 곳의 책임자에게 연락을 넣어야겠어. 전화번호가….”
“그러실 필요조차 없습니다.”
자신 있는 표정을 한 채, 푸저우시 당 서기가 집어 든 전화기를 조용히 내려놓는 부관.
서류 가방에서 일정표를 꺼낸 그는 조심스레 제 상관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그 또한 탐욕스러움에 눈이 벌게진 채로.
“오늘 오전, 그쪽에서 먼저 연락이 왔었습니다. 이유 불문 우선 만나자고 하더군요.”
“허어, 그쪽 푸저우시 현지 법인 총책임자가?”
“아닙니다. 그것보다… 훨씬 위입니다.”
훨씬 위.
그 말에 기대감으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푸저우시 당 서기.
분명… 현지 법인 총책임자보다 윗급이라면 적어도 탄약 전자 사장의 그 미셸이라는 프랑스인이거나, 조금 더 힘을 쓰자면 그룹 본부의 고위 임원급이 올 터.
꿀꺽, 목울대 너머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몸을 앞으로 수그리고는, 마치 아이처럼 부관을 보채는 푸저우시 당 서기.
“어서 말해보게! 어서!”
벌겋게 달아오른 그의 얼굴.
행여나 누가 들을세라, 반 발자국 앞으로 다가간 부관은 잠시 제 상관의 귀를 빌리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마치 월척이라도 건진 것을 자랑하는 것처럼.
“회장, 탄약그룹 회장 한서준이가 사흘 후 비밀리에 직접 입국한다고 합니다.”
“회장이? 직접?”
“예, 그렇습니다.”
“오호라….”
곧바로 머릿속 계산기의 곱셈 표시 옆의 숫자에 0을 하나 더 붙이는 푸저우시 당 서기.
그는 알지 못했다. 자신이 방금 세운 그 계산식에 붙은 0은, 사실 곱셈 표시 바로 옆에 있었다는 것을.
최종 결괏값이 0이 될 것이라고는 가히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그는 부관의 어깨를 툭 치며 탐욕의 웃음을 한가득 지었다.
“흐흐흐… 이거 상상 이상으로 크게 한 건 하게 생겼구먼. 잘했네. 자네만 한 인재가 또 없어.”
“과찬이십니다. 그저 제가 바라는 것이라고는 이번 일로 당 서기님이 잘되시도록 조력하는 것뿐입니다.”
겸손한 척, 고개를 숙였으나 온몸으로 무언갈 말하고 있는 부관.
필시 큰 떡고물이 떨어질 일에 자신 또한 작게나마 숟가락을 들이밀고 싶은 모양이었다.
“흠….”
가만히 부관을 바라보는 푸저우시 당 서기.
비록, 아직 일정 이상의 급에 오르지는 못했으나, 이번만큼은 그에게 금일봉 정도는 챙겨주어도 괜찮으리라.
결심을 마친 당 서기. 그는 호쾌한 표정을 짓고는 부관에게 대답을 주었다.
“좋다! 그 자리에 자네도 책임지고 동석하도록. 어디 한번 거하게 요리해 보라고!”
* * * *
푸저우 중심가의 모 고급 요릿집.
화려한 금색 황룡 두 마리가 엉켜 만들어진 정문을 지나, 흑단 나무 계단을 오르니 그곳에는 숨겨진 방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색으로 여러 번 덧칠한 둥근 테이블. 그 큰 탁자 위에는 도무지 다 먹을 엄두조차 나지 않을 요리와 술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아이고, 만나서 반갑습니다. 제가 푸저우시 당 서기입니다. 말씀으로만 들었는데 회장님께서 연치가 상당히 젊으십니다, 그려.”
큼지막한 새끼 양 통구이 너머로, 나를 향해 고개를 수그리는 푸저우시 당 서기.
뚱뚱한 체형에 전형적인 부패 관료의 인상.
입에 탐욕을 상징하는 사과를 한가득 문 채로 접시 위에 올려진 새끼 양처럼, 그는 자신이 맞이할 운명도 모르고 연신 싱글벙글해 있었다.
“이거, 제가 그간 격조했습니다. 탄약그룹 반도체의 중국 생산 기지인데… 이제껏 당 서기님께 인사 한번 못 올렸네요.”
“뭐, 이제라도 서로 이렇게 얼굴 보고 대화하니 다행이지 않습니까. 비록, 발등에 불이 떨어지시고 난 후에야 이리되어 버린 것이지만.”
친절한 말속에 일부러 불편한 뼈를 섞은 푸저우시 당 서기.
시작부터 기선을 잡고 큰 액수를 부르려는, 전형적인 수법이 내 눈에 들어왔다.
“하하… 일단 그런 복잡한 일은 조금 예열이 된 후에 하는 것이 어떨까요? 제가 당 서기님께 먼저 한 잔 따르겠습니다.”
나는 알코올 도수로 50°가 넘는 백주(白酒)로 도자기 잔을 가득 채웠다.
옅은 과일 향과 더불어 쿰쿰하게 올라오는 곡식 내음.
향만 맡아도 취할 것만 같은, 잔 위에서 찰랑거리는 백주(白酒)를 바라보며, 나는 이곳에 오기 전 비행기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먼저, 작전의 개괄적인 골자를 설명하겠습니다. 쉽게 말해서… 저들을 방심시키고 경계를 허술하게 만든 후, 대탈출이 시작될 겁니다.’
몇 시간 전.
중국을 가로지르는 영공 위.
푸저우 국제공항에 도착하기까지 한 시간여 남았을 때쯤, 나는 전용기 안에서 김원철 아저씨와 유세나 보좌관을 한데 모아 논의를 시작했다.
‘미셸 사장과 이야기는 되어 있습니다. 보따리 상인들 3,000명이 한날한시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겁니다.’
‘아아, 반도체 제조용 정밀기기를 나사 단위로 분해하라는 지시가 이거였구만.’
김원철 아저씨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나.
이미 모든 기계는 보따리 상인 한 명이 등짐으로 지고 갈 수 있을 만한 규모로 소분해둔 상황이다.
문제는 반도체 공장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공안들의 경계 태세.
비록 지금은 꼴에 시간이 며칠 흘렀다고 처음보다 다소 느슨해졌다지만, 방심해서는 안 될 노릇.
그렇기에… 내가 급하게 생각해 낸 방법은 단 하나, 술이었다. 그것도 아침까지 술자리를 이어가면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의 센 독주.
‘적당한 핑계와 함께 공안만 물려달라 요청할 생각입니다. 선입금 조로 뇌물을 좀 고여 준다면, 바로 행동할 것이고요.’
‘어차피 그쪽 짜장 놈아들도 우리 뒤통수칠 생각뿐이니, 그 정도 들어 주는 시늉이야 얼마든지 낼 수 있다?’
‘하룻밤만 시간이 주어진다면 되는 겁니다. 딱 하룻밤만.’
하룻밤.
짙게 내려앉은 어두움이 가신 후, 동이 트기 직전까지. 야간열차를 탄 3,000명의 보따리 상인들은 홍콩으로 밀수출을 나설 것이다.
마치 대규모 탈출 작전에 육박하는 어처구니없는 규모. 그렇기에 나는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세나 보좌관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요청했다.
‘그러니 잘 부탁합니다. 유세나 보좌관.’
‘뭐… 뭐가 말입니까?’
뭔가 괴상한 생각을 한 듯, 흠칫 양쪽 어깨를 들어 올리는 유세나 보좌관.
갑자기 무슨 반응인지는 모르겠다만, 일단 나는 유세나 보좌관을 믿기로 마음먹었다.
전날 소주 6병을 마시고 나서도, 다음 날 멀쩡하게 출근해 일을 마치는 그녀였으니까.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적당히 분위기만 좀 띄워 주십시오.’
‘아, 아아… 그런 거였군요.’
공항 가까이 다가간 듯, 점점 아래쪽으로 머리를 향하는 비행기.
조금씩 몸이 내려가는 느낌을 받으며, 나는 독백하듯 하던 말을 마저 이어나갔다.
‘술에 취한 채, 그리고 묘한 아름다움에 취한 채. 놈들이 아예 정신 자체를 잠시 술잔 속에 놓아두게끔.’
* * * *
“이봐! 빨리빨리 올라타! 게으름이나 부릴 놈은 당장 꺼져라! 뭉그적거리기나 하는 게으름뱅이 놈들이 무슨 돈을 번다고!”
수백 년 전 목화밭의 흑인 노예를 부리듯, 한쪽 손에 짧은 채찍 하나를 들고 선 사내.
그의 핏줄 선 팔뚝 아래, 휘둘러진 채찍에서 들리는 파공음이 보따리 상인들의 귓가에 닿자, 그들은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 예…! 알겠습니다요!”
“아이고, 저거 맞았다간 진짜 뒤지게 아플 것이여… 이봐요, 앞에 양반들! 거, 좀 빨리 올라탑시다!”
3,000여 명이나 되는 대규모의 인원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만큼, 어쩔 수 없이 발생한 혼잡.
벌써 두 시간이나 지연된 연착 탓에, 보따리 상인을 총괄하는 담당자는 입이 바싹바싹 마르기 시작했다.
“후우, 무조건 홍콩에까지 넘겨야 잔금을 제대로 받는 것인데… 일단 출발이라도 되었으니 다행인 것인가?”
벌써 어스름하게 깔리기 시작한 밤공기는, 오렌지빛 노을을 밀어내고 하늘 위를 남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열차 맨 앞칸에서 토해낸 검은 연기. 낡은 화물차의 바퀴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보따리 상인을 총괄하는 담당자의 손목시계의 바늘 또한, 째깍째깍 소리를 내며 예정 시간에 맞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봐! 기관사! 이리 와 봐!”
“예, 사장님! 무슨 일이십니까요?”
“이거, 이 고물딱지 열차. 푸저우시까지 언제쯤 도착할 것 같나?”
“어디 보자… 대략, 내일 새벽 4시쯤에는 도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암만 순식간에 일을 처리한다 치더라도, 동이 틀 때까지는 생각보다 빠듯한 시간.
총괄 담당자는 기관사의 앞주머니에 지폐 다발 뭉치 하나를 찔러주며 힘주어 말했다. 반드시 이 사업을 성사하리라는 욕망으로 가득 찬 눈을 빛내며.
“새벽 3시. 그때까지는 무조건 도착하게 만들도록! 엔진이 망가진다면 수리비는 별도로 지급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