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술 게임(3)
“우리 푸저우시 쪽에서 귀사를 위해 딱히 해드릴 만한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어떤 것을 해서도 아니 될 터고요.”
푸저우의 고급 요릿집.
술잔이 두어 바퀴쯤 돌았음에도 상대방의 신경전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유려하게 깎아낸 나무젓가락을 들어, 내 눈앞에서 까딱거리는 푸저우시 당 서기.
기름기가 잔뜩 묻은 나무젓가락만큼이나 번들거리는 그의 콧잔등은, 탐욕을 주체하지 못하는 양 연신 씰룩거리고 있었다.
“베이징의 새로운 권력이 어찌나 서슬 퍼런지는 여기 계신 한 회장님도 잘 아실 겝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대놓고 제 몸값을 띄우고 있는 푸저우시 당 서기.
하기야, 애초에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쯤은 나 역시 잘 알고 있는 상황. 나는 일단은 그가 연주하는 장단에 적당히 춤을 춰 주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갑자기 이런 식의 행정처분은 너무 과합니다. 아예 공장 자체를 돌릴 수가 없지 않습니까?”
“중앙정부에 감히 대항하지 못할 저희 쪽 사정도 생각해 주셔야 할 노릇 아니겠습니까? 애초에 저는.”
쿵, 주먹으로 탁자를 가볍게 내리친 푸저우시 당 서기.
연극인 티가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드러난 그는, 자기도 무안한 듯, 작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었다.
“이런 부정한 자리 자체도 영 불편합니다그려. 크흠.”
숱이 얼마 있지도 않은 턱수염을 쓸어내리는 그의 모습.
분명 저 게슴츠레한 눈동자에는 이번 기회로 한몫 단단히 챙기려는 것이 보였으나, 무언가를 간신히 억제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바로 옆에 앉은, 저 부관이라는 사람의 조언을 받아서.
“허허. 한 회장께서 이해를 좀 해 주시지요. 저희 당 서기님께서 신조로 삼으시는 것이 오로지 청렴 하나뿐이라서 말입니다.”
“…제가 거기까지는 차마 헤아리지 못했네요.”
“그러니, 조금 민망한 이야기들은 제가 듣고 답하겠습니다. 뭐랄까, 최소한의 유도리라는 건 아무래도 실무진에게 있으니까요.”
나는 맞은 편의 두 사람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전형적인 역할 분담.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고, 누구의 승인을 받아내야 할지 알 것 같다.
‘영감은 뒤에서 점잔을 빼시겠고, 흙탕물은 이쪽 젊은 친구가 알아서 손에 묻히겠다는 건가.’
이내 고개를 끄덕인 나.
나는 잠시 입안에 이름 모를 음식 몇 조각을 집어넣고는 재빨리 판단을 내렸다.
어차피 저런 식으로 역할 분담이 되어 있다면, 저쪽이 원하는 것은 뻔하다. 그렇다면… 애당초 초장부터 블러핑을 크게 지르는 편이 나을 터.
어차피 주지 않을 특혜, 그에 비례해 어차피 주지 않을 뇌물.
품 안에서 가죽 지갑을 꺼낸 나는 그 안에 든 하얀 수표 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
상대편이 보았을 때… 도저히 판을 따라오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구미가 당길 법한 패 한 장을.
“조금 아쉽습니다. 저 나름의 최선을 다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점이.”
“무슨 말씀이신지?”
“그러니까… 말하는 것보다 보여드리자면, 이런 겁니다.”
탁자 위에 놓인 백지 수표.
곧이어,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그 수표 위에는 백금으로 된 만년필 촉이 미끄러지듯 춤을 추었다.
가장 먼저 적힌 숫자 8. 중국인들에게 있어 부(富)를 상징하는 숫자는 멈출 줄 모르고 계속해서 연달아 옆을 채워갔다.
“본래 그만하라 하실 때까지 부(富), 그러니까 8자를 적어 넣으려 했습니다만.”
“아니, 아니. 잠시만요, 한 회장님….”
“뭐, 이리도 강경하게 나오시니, 제가 취할 수 있는 방안은 결국 하나 아니겠습니까?”
8자가 빼곡히 들어선 백지 수표.
만년필 특유의 묵직한 잉크 냄새가 아직 채 가시지도 않은 그것을, 나는 앉은 자리에서 힘주어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애당초 여기 적힌 부(富)는 전부 없던 것이 되는 수밖에요.”
“한 회장님…?”
“더 말씀하실 것이 없으시다면,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아무래도 베이징까지 직접 가서 처리해야 할 일인 듯하니.”
네 조각으로 갈기갈기 찢긴 백지 수표. 나는 그것을 새끼 양 통구이의 입가에 세로로 밀어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배웅까지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 이만.”
덩그러니 남겨진, 뒤편의 텅 빈 의자. 그걸 신호라 여긴 모양인지 김원철 아저씨와 유세나 보좌관 또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적당히 어설프지만 그럴싸한, 나름 혼신의 연기를 불태우며.
“우리 회장님께서 이렇게 나오시면 저희 쪽에서도 할 수 있는 게 없어야. 유세나 보좌관? 우리도 슬슬 가자고.”
“저 또한 별다른 방법이 없네요. 일어나겠습니다.”
황룡을 조각한 문고리를 꽉 쥔 내 손. 여기서 괜히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일 필요는 없다.
괜히 연기의 리얼리티를 불어넣고자 해서가 아니다. 어차피… 저기 앉은 두 사람이 원하는 것은 내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딸깍
문손잡이의 닫힘 장치가 열림과 함께 갑자기 뒤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잠깐…!”
초조함을 이기지 못한, 다급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푸저우시 당 서기였다.
“허어, 이거 참… 무언가 서로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그려.”
“당 서기님…!”
자신의 코칭을 어긴 것에 불만이 있는 것인지 작게나마 항의의 목소리를 내어 보는 부관.
그러나…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 앞에 그런 목소리 따위 그저 시답잖게 귓가에서 윙윙거리는 벌레의 날갯짓에 불과할 뿐이었다.
“자네는 가만히 있고! 이 자리에 결례를 가지고 온 것이 누구라 생각하나!”
“…….”
“자네의 처분에 대한 것은 따로 정할 게야. 허나, 우선은.”
금속제 문손잡이에 비친, 비굴할 정도의 미소를 띤 푸저우시 당 서기.
천천히 뒤를 돌아본 내 눈에는 탐욕스러운 돼지 한 마리가 서 있었다.
제 욕망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함정 속으로 서서히 주저앉아가는 돼지가.
“여기까지 귀한 발걸음 해 주신, 우리 한서준 회장님과의 이야기를 끝마친 후에 해야겠지.”
* * * *
“허허, 사실은… 저희 쪽에서도 여러 고민과 갈등과 양심의 고백이 있었습니다.”
다시 앉은 식사 자리.
젠체하던 모습은 어디로 사라져 없어진 것인지, 손바닥을 비비며 내게 웃음을 보이는 푸저우시 당 서기.
“비록 중앙정부에서 내린 지시지만, 우리 시를 먹여 살리는 기업인데 어떻게든 편의를 봐 드려야 하지 않나 싶더군요.”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방해된다고 여긴 부관을 내보낸 후, 그는 친절함의 가면을 쓰기 시작했다. 새끼 양의 입에 문 찢어진 수표 조각에 눈을 고정한 채, 노골적으로 원하는 것을 어필하면서.
“지방정부와 기업의 상생, 제 쪽에서 최대한 힘을 써 보이겠습니다. 그러니….”
자신도 퍽 민망한 모양이었다.
어색한 미소를 입가에 걸고는 말없이 엄지와 검지, 두 손가락만을 비비는 푸저우시 당 서기.
나는 아까 그러했듯, 품 안에서 다시금 수표 한 장을 꺼낸 후 흔들어 보였다.
파놓은 덫 정중앙에 그가 앞발을 내려놓기 쉽게끔.
“필요하신 금액을 적어 주시지요.”
“크흠 이거 참 감사합니다….”
걸신들린 이가 손에 쥔 빵을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우듯, 순식간에 수표 안에 8자를 연달아 써넣는 푸저우시 당 서기.
적당하다 여긴 숫자보다 탐욕이 적어낸 것이 조금 더 큰 모양이었다. 겸연쩍은 듯 내 눈을 피한 채로 다시 수표를 내미는 그의 모습.
‘욕심도 더럽게 많군. 저 튀어나온 뱃속에 무슨 욕망의 항아리라도 들어가 있나 보네.’
흰 백지 위에는 살짝 선을 넘는 금액이 적혀 있었다. 그 자신이 커버할 수 있는 능력을 아득히 넘은 것을 대가로 한 금액이.
물론… 어차피 이 금액이 지급될 일은 영원히 없다. 푸저우시 당 서기가 반도체 공장을 다시 돌릴 수 있게 만들 능력이 되지 않는 것처럼.
“입금은 이틀 이내로 될 예정입니다. 다만.”
“다만…?”
“아시겠지만, 종류를 막론하고 모든 계약에는 계약금이란 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대놓고 먼저 무언가 행동을 하라는 압박.
나는 보란 듯이 검지와 중지 사에 수표를 낀 채, 두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사람을 홀릴 그 행동에 최후의 저항을 하려는 푸저우시 당 서기.
“크흠, 선제적인 조치는 힘이 듭니다. 무릇 무슨 일이든 다 자금 지원부터 선행되어야….”
“거창한 것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그저 약속의 징표, 그것 하나만을 보길 원하는 것이지요. 가령.”
정면으로 바라본 그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무런 스스럼없이 내뱉은 한마디 말.
분명, 자신의 탐욕에 스스로 잡아먹히고 있는 이 자는… 아주 작은 단초만 주어진다면 곧바로 행동에 나설 것이기에.
“지금 저희 공장을 둘러싸고 있는… 지역 공안 병력을 바로 물려주신다거나 말입니다.”
* * * *
“하차! 하차한다! 빨리빨리 내려!”
푸저우시 외곽 기차역.
눈썹달이 희미하게 세상을 비추는, 새벽 3시가 거의 다 된 시각.
3,000여 명의 보따리 상인들은 지휘에 맞추어 일사불란하게 역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덜컹거리는 낡은 차량으로 갈아타고 반도체 공장이 있는 지역으로 신속하게 이동하는 그들.
그 가운데, 맨 앞에서 보따리 상인을 인솔하는 사내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예, 미셸 사장님. 방금 도착해서 이동 중입니다. 간신히 시간은 맞추었습니다. 도착하고 나니, 열차 엔진이 퍼질 만큼.”
덜컹, 험한 산길을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기에 온몸으로 전달되는 진동.
보따리상 총괄 책임자는 뒤따라오는 트럭들을 바라보며 묘한 웃음을 지었다.
“이거 단단히 노 나게 생겼군.”
“수수료만 해도 한 철 장사는 다 할 듯합니다.”
제 상관 옆에 앉아 맞장구를 치는 부하 직원.
창가를 향해 불어오는 바람을 손바닥으로 맞으며 그가 물음을 던졌다.
“그나저나… 저만한 물량을 전부 홍콩으로 빼려면 상당히 애로사항이 따를 텐데 말입니다. 어찌하시려 그러십니까?”
“자네 아직 뭘 잘 모르는군.”
비열한 웃음을 짓는 총괄 담당자 사내. 그 웃음을 따라 얼굴 한쪽에 죽 찢긴 칼자국이 씰룩거리었다.
“어차피 여길 뜨면 관리 감독할 사람이 따로 안 붙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말은 즉.”
어느새 도착한 반도체 공장.
미리 이야기되었던 대로 현장을 지키는 공안은 그 모습을 감춘 지 오래였다.
손가락 끝으로 미리 분해된 반도체 제조용 정밀기기를 가리키며, 그가 하던 말을 마저 이어나갔다.
“저 물건들, 홍콩에 굳이 안 보내고 빼돌려도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것이야.”
“허어, 그런 방법이…!”
“어차피 그 미셸 사장인가 하는 사람은 정신도 없고, 돈은 아침 해가 뜨면 바로 들어올 게 아닌가. 우리를 감독할 고위직은 아무도 없… 어어?”
분명 텅 비었어야 할 공장 내부.
그러나, 전깃불마저 꺼진, 스산하기 그지없는 그곳에는… 누군가 언론에서만 봐왔던 한 남자가 지휘봉을 들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약간의 독한 술 냄새를 양복 상의에서 풍기며.
“한서준 회장…? 저 사람이 왜 여기 현장에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