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대탈출(1)
지킬 의사가 없는 가짜 약속. 그리고 지급할 의사가 없는 가짜 백지수표.
어느 중고 거래 플랫폼에서나 일어날 법한 이 환장할 거래는 거나한 술자리와 함께 확정이 되었다.
“진작 당 서기님을 찾아뵐 걸 그랬습니다. 괜히 좁은 한국에서 속만 태웠으니….”
“허허. 이제라도 와주신 것이 어디입니까. 일단 한잔 쭉 드시지요. 쭉.”
엉성하게 그려진, 웃음을 그린 가면. 아무래도 그 가면은 뒤통수를 칠 때 사용하는 모양이었다.
지금 이 독한 백주(白酒)를 목구멍 너머로 넘기는 순간에도, 나와 푸저우시 당 서기 모두는 서로를 언제 배신하는 것이 최적인지를 탐색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나는… 이미 선입금이라는 형태로 시작부터 배신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어, 그래. 공안부장. 나 당 서기야. 포위 병력 싹 풀고 바로 애들 철수시켜.”
8자가 연달아 적힌 백지수표를 신줏단지라도 되는 양 고이 모시고 있는 푸저우시 당 서기.
바람이라도 불면 날아갈세라, 수표를 꽉 쥔 그가 가장 먼저 한 것은 바로 지역 공안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선입금을 내게 주는 것이었다.
“빼라면 빼지 뭔 말이 그리 많나! 어딜 네깟 놈이 윗선 지시를 거역해! 책임은 내가 지니 빨리 포위를 풀어!”
나름 고객을 위한 쇼맨십까지 장착된 건지, 공안부장에게 역정을 내는 모습까지 연출하는 당 서기.
부(富)에 눈이 멀어 세상 모든 것이 8자로만 인식되는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것인지조차 모르는 모양이었다.
“아이고, 우리 한 회장님. 방금 보셨다시피 약속은 지켰습니다. 허면, 입금은 언제쯤 될는지…?”
손바닥을 비비는 푸저우시 당 서기. 대답을 아낀 나는 피식 웃으며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간은 어느덧 밤 아홉 시. 예정된 일정대로라면 분명 새벽 세 시는 되어야 보따리 상인 일동이 공장에 도착할 터.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그때까지 눈앞의 이 뚱뚱한 중늙은이를 묶어 두는 것이다.
몸에 흐르는 혈액 한 방울까지 술 냄새가 날 만큼, 인사불성으로 만드는 식으로.
“저희 탄약그룹, 한국에서 기업 이미지로는 가장 화끈하다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쿵, 곧바로 탁자 위에 올려진 술병을 내리친 나.
그것을 신호로 김원철 아저씨와 유세나 보좌관 또한 허리띠를 풀고 술이 가득 차 있던 잔을 비웠다.
이제부터, 아침 해가 뜨기 전까지 이 중늙은이를 담글 것이다. 그가 그토록 좋아하는… 접대 술로.
“오늘 화끈하게 마셔 봅시다. 아침이 되어 깨어나신다면, 가장 먼저 아랫사람에게서 들으실 소식이 입금 관련 내용일 테니까요.”
* * * *
베이징 중심부에서 조금 떨어진 고급 호텔. 아침 해가 떠오르고 이름 모를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눈을 뜬 제임스 왕 이사.
각진 턱에 하얀색의 면도 크림을 바른 그는, 늘 써오던 투박한 일체형 면도칼을 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날이 잘 섰군.”
서걱서걱, 면도 크림 특유의 화한 느낌과 함께 잘려 나가는 수염 자국들.
얼굴 한가운데 고속도로라도 난 것만 같은 그 모습을 보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제임스 왕 이사.
“사소한 생채기도 없이 깔끔하게 잘려 나갈 것이다. 탄약그룹도, 한서준 그놈도.”
세면대 수채로 빨려 들어가는 수염 조각. 덥수룩하던 감정의 털 뭉치를 찬물에 흘려보낸 그는 곧바로 호텔 밖을 나섰다.
경쾌한 발걸음. 평소 베이징에 들를 때와는 전혀 다른 이 모습은, 그가 푸저우에서의 성공을 확신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자금성 인근, 중앙 권력의 심장 중난하이에 도착한 그는,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중화 대륙 내의 반도체 투자가 공염불이 된다면, 놈이 크라 운하에 온전히 집중하기 어려울 터다.”
단순히 숫자상의 손실뿐만이 아니다. 저 반도체 제조용 정밀기기에 든 탄약 전자의 최신 기술 또한 중국 공산당 산하의 국영기업에 넘어가게 될 터.
자신감이 붙었는지 주먹을 불끈 쥔 제임스 왕 이사.
생각한 대로만 된다면… 저 중난하이 최중심부에서 상왕 노릇을 하는 노괴는 그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낼 것이다. 이제까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권력의 편애 그 자체를.
“장 대인을 뵙습니다.”
“고개를 들게나. 굳이 코를 바닥에 처박고 있을 필요는 없으니.”
다행히도 유독 기분이 좋은 모양인 베이징의 노괴.
푸저우시에서 있었던 일에 관해 간략한 보고를 받은 장 대인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긴 곰방대를 내려놓고는 대답했다.
“자네 운신의 폭이 넓어졌구먼.”
“그리되었습니다, 어르신.”
“마침 여유가 생겼으니 시간 낭비허지 말고 잘해 보게. 그래, 탄약그룹이 비실거리는 동안 남방에 돌 하나를 던질 거라고?”
“아무래도 외부의 이슬람 극단주의자 세력을 들이는 편이 낫지 않나 합니다만.”
마치 눈앞에서 보이지 않는 대국을 두는 듯한 표정을 지은 베이징의 노괴.
불쾌하리만치 몽롱하게 피어오른 연기 사이로 장 대인의 눈이 빛났다.
“기회가 있을 때 잘해 보게. 설마 허니 동쪽의 소국 놈들에게 또다시 면을 상할 일이 나오기야 하겠냐만.”
“절대로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대인.”
“되었네. 정산이나 잘하고. 음?”
고개를 옆으로 돌린 장 대인. 문가 주변에는 쭈뼛거리는 모양새의 시동 하나가 선 채, 방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를 손짓으로 부른 베이징의 노괴.
“그래, 무슨 일일꼬?”
“대인, 푸저우시 당 서기 전화입니다.”
“고작 시(市)급 당 서기가?”
급이 맞지 않는다고 여긴 상대의 직보. 언짢음으로 가득한 표정을 재빨리 파악한 시동이 고개를 숙이고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사안이 긴박한 듯하여 이렇게 직통으로 올립니다. 결례를 용서하소서.”
“뭐, 되었다. 그 전화나 이리 다오.”
시동이 들고 있던 전화기를 낚아채듯 받아 간 장 대인.
그 모습을 본 제임스 왕 이사의 등줄기에는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직감이 야기한 소름이 돋았다.
그토록 자신하고 있던 일정. 그 한가운데 위치한 톱니바퀴 하나가 삐그덕 소리를 내며 주저앉는 직감이.
‘푸저우시 당 서기…? 뭐야,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기에 장 대인에게 직통 전화가 연결되는 거지?’
그리고 그런 그의 다급한 마음 따위야 안중에도 없다는 듯, 지극히 평안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 베이징의 노괴.
“그래, 자네가 나를 찾는다고? 무슨 일인가?”
째깍째깍, 시곗바늘이 한 칸 한 칸 움직이는 순간마다 시시각각 변해가는 장 대인의 표정.
가느다란 눈매는 어느새 동그랗게 부풀어 올랐고, 핏기 하나 없던 새하얀 얼굴에는 붉은 홍조가 마구잡이로 피어난 상황.
“뭐라! 자네 지금 그게 사실인가!”
터질 듯한 노기를 이기지 못한 베이징의 노괴는 결국 노기 섞인 고함을 터트렸다.
‘미치겠군.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 거지?’
순간, 제임스 왕 이사 자신을 향한 장 대인의 분노로 가득 찬 눈초리.
노인의 툭 튀어나온 아랫입술은 당장이라도 그를 향해 한바탕 욕설을 쏟아부을 것만 같아 보였다.
그리고 그 사실을 제임스 왕 이사가 안 것은… 곧바로 그의 재킷 안주머니에서 울리는 휴대전화의 문자 메시지 때문이었다.
-주군, 푸저우시 탄약그룹 반도체 공장 안이 텅 비었습니다. 물류 경로를 추적하여 판단컨대….
“당했다…!”
팔에 난 솜털이 거꾸로 섬과 함께 해일처럼 머릿속을 향해 역류하는 혈류.
떨리는 손으로, 화면 아래쪽으로 천천히 스크롤을 내리는 제임스 왕 이사. 거기에는… 자신이 세웠던 계획의 틈을 자그마한 비수로 찌른 듯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보따리 상인들을 이용, 홍콩 쪽으로 밀수가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부디 빠른 지침을 바랍니다.
* * * *
새벽 3시가 조금 넘은 시각.
모두가 술에 젖어 코알라처럼 변해버린 그 자리에서 빠져나온 나는, 잠시 화장실을 간다는 핑계로 바깥으로 향했다.
이미 안쪽은 강제로 띄운 흥겨운 분위기에 점입가경인 상황.
‘붙습니다! 붙습니다! 이거 진짜 붙습니다! 촤합!’
도대체 어디서 그런 걸 배운 건지, 빛나는 이마 위에 연어회 조각을 붙이면서 흥을 돋우던 김원철 아저씨.
그것을 시작으로 풀어진 분위기는 이내 푸저우시 당 서기의 긴장마저 풀리게 했다.
첫 만남부터 힐끔힐끔 유세나 보좌관을 곁눈질하던 그는, 아예 대놓고 옆자리로 옮겨 나름의 수작질을 시작했을 정도니까.
‘크흠, 아가씨는 어떻게… 애인은 있는가?’
‘…지금은 딱히 만나는 사람은 없습니다만?’
불끈 쥔 주먹을 탁자 밑으로 내리고는 ‘참을 인(忍)’ 자 세 개를 가슴에 새기던 유세나 보좌관.
‘먼저 간 우리 와이프 젊은 시절을 쏙 닮았네그려.’
‘…….’
‘아, 먼저 갔다는 게 죽었다는 게 아니고, 그냥 이혼했다고. 그냥 그 뭐랄까, 아가씨 같은 분이 내 취향이거든. 허허허.’
입술을 꾹 깨문 그녀의 눈은 의외로 갈 곳을 잃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로지 나를 향해 시종일관 고정되었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결혼해! (짝!) 결혼해! (짝!) 잘됐으면 좋겠다!’
이 상황이 너무 웃겨서 죽겠다는 듯, 중간중간 경박한 박수 소리와 함께 환호성을 외치던 김원철 아저씨.
유세나 보좌관이라는 어린 양을 제단 위에 올린 이 술자리에서, 가장 먼저 뻗어 버린 것은 단연 푸저우시 당 서기였다.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유세나 보좌관에게 청혼하던 그의 눈은 이미 초점을 잃은 지 오래였다.
‘당 서기님, 당 서기님.’
‘어어… 유세나 보좌관? 사랑해요.’
‘아니, 저는 한서준 회장입니다. 잠시 화장실 좀 갔다 오려고 합니다.’
‘어, 어. 갔다가 와요. 올 때 아이스크림 하나 사다 주면… 사랑해요, 유세나 보좌관.’
올 때 멜론 맛 아이스크림을 약속하고서, 화장실을 간다고 나가버린 나는 곧바로 경호 인력들과 함께 차에 올라 반도체 공장으로 향했다.
그저 외주 준 보따리 상인들에게 맡겨도 될 법한 것을 내가 굳이 챙긴 이유는 미셸 사장과의 대화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저쪽 사람들을 온전히 믿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회장님.’
나사 단위까지 하나하나 해체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조립만 했다 하면 막대한 기술력을 뿜어낼 정밀기기.
그렇기에, 이들을 총괄할 누군가가 반드시 필요한 상황.
물론 김원철 아저씨나 미셸 사장에게 맡길 수는 있었지만… 적어도 첫 포문만큼은 내가 직접 열고 싶었다.
<상하이 캐피탈>을 넘어, 중국 공산당과 직접 반목할 그 신호탄을 쏠 포문을.
“곧 보따리 상인들도 도착할 것 같습니다, 회장님.”
내게 보고를 올리는 경호실장.
소포장된 정밀기기를 지키는 경호 인력들은 하나같이 권총으로라도 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무장 상태의 필요성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딸깍거리는 전등 스위치와 함께 나지막이 읊조리는 누군가의 목소리.
“저 물건들, 홍콩에 굳이 안 보내고 빼돌려도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것이야.”
“허어, 그런 방법이…!”
“어차피 그 미셸 사장인가 하는 사람은 정신도 없고, 돈은 아침 해가 뜨면 바로 들어올 게 아닌가. 우리를 감독할 고위직은 아무도 없… 어어?”
곧바로 허리춤에서 육모방망이를 뽑은 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작게 웃음 지었다.
그리고는 까닥거리는 손동작과 함께, 100여 명의 경호실 인력들에게 내려진 명령 하나.
“저쪽 지휘부 바로 진압하고, 보따리 상인들 통제 시작합니다. 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