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장님의 핵몽둥이-127화 (127/300)

127화대탈출(2)

청와대 본관, 대통령 집무실.

황금 덩어리 하나를 통으로 조각한 봉황새 한 쌍 아래 의자에 비스듬하게 앉은 대통령.

“허어, 이보게 박 정책실장. 이게 현실에서 가능한 일이긴 한단 말인가?”

거리낌 없이 경탄의 표현을 아끼지 않는 그의 손에는 보고서 한 장이 들려 있었다.

국가정보원을 필두로 한 중국에 파견된 정보기관 연합체가 작성한 보고서를.

“그저 귀로 이야기를 듣고 눈에 사진 몇 장을 담았을 뿐인데, 그 생생함이 꼭 무슨 영화를 보는 것만 같구먼.”

“…저로서도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의 부분이 있습니다. 특히 지금 보시는 그 부분.”

조심스레 한쪽 손바닥으로 대통령의 눈길이 닿는 부분을 가리킨 박동희 정책실장.

거기에는 누군가 혈기 넘치는 젊은이 하나가 웬 몽둥이 하나를 꺼내 들고는, 3,000여 명의 사람들을 통제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탄약그룹 경호실 인력들에 의해 반쯤 피떡이 된 중국 쪽 사람들의 모습과 함께.

“현지 협조 세력의 배신까지 전부 염두에 두고 있었을 줄이야… 거기까지는 예상치 못했습니다.”

“그러게 말일세. 파견 나간 정보기관 직원들이 죄 바보가 되어 버렸어.”

이미 현지 보따리 상인들을 총괄할 협조 세력이 배신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던 정보기관 연합체.

미리 그 보고를 받았음에도, 대통령은 결정적인 일이 생기기 전까지 지켜보라는 말 외는 다른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절반은 혹시 있을 사후 수습 과정에서 탄약그룹의 목에 큼직한 목줄을 걸어두기 위해서.

나머지 절반은… 한서준이라는 개인의 예측 불가능한 대응 방안이 궁금해서.

그리고 지금, 대통령의 그러한 목적 가운데 이루어진 것은, 오로지 후자 하나뿐이었다.

“깡 하나만큼은 좋은 친구지. 자네도 그리 생각허지 않은가? 한서준이 손바닥 위에서 놀아 본 사람이니.”

“크흠, 각하….”

“허허허. 이 사람, 또 그런다. 또.”

우물쭈물한 모습의 박동희 정책실장. 대통령은 그 모습이 퍽 재미있는 모양인지, 개구쟁이처럼 웃음 지었다.

“뭐, 되었네. 자네를 놀리는 것은 이쯤 하지. 그래서, 그 보고서 내용 말미에 그것.”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른 정보기관 연합체의 보고서.

거기에는 나사못 단위로 쪼개져 홍콩으로 밀수출된 반도체 정밀기기가, 한국행 선박에 선적되는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이내 돋보기용 안경을 벗어 던지고는 손가락으로 그 사진을 가리키는 대통령.

“관세청장에게 일체의 귀찮은 통관 절차 없이 곧바로 수입 신고 완료토록 하라 지시하게. 편의도 좀 봐주고.”

“예, 알겠습니다. 각하.”

“괜히 후임 정부에서 트집 잡지 않게끔, 기밀문서 걸어두는 것 잊지 말고. 아아, 그리고 한 가지 더.”

꾸벅, 고개를 조아리고 바깥으로 나서려는 박동희 정책실장을 붙잡은 대통령.

잊었던 사실을 떠올린 듯, 그가 물음 하나를 던졌다.

“베이징 쪽 움직임은 어찌 돌아간다고 했던가? 그 크라 운하와 일대일로 관련해서 말이야.”

“그것이… 일단 중난하이에서 고함을 질렀다고는 합니다. 그 장 대인이라는 영감이 말입니다.”

“고함을?”

고개를 갸웃거리는 대통령.

분명 그 장 대인이라 불리는 베이징의 노괴는 굉폭한 성격은 아니라 알고 있었다.

노회하고 교묘한 너구리 같은 그가 사자후를 터트렸다는 소식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대통령. 그 심기를 알아챈 박동희 정책실장은 곧바로 부연 설명을 해나갔다.

“예, 각하. 그것이 어떻게 된 것이냐면 말입니다….”

* * * *

“멍청한 놈! 고작 탄약그룹 놈들의 눈알 하나 제대로 돌리지 못해서 실패나 하다니!”

-퍽!

끄트머리에 용 두 마리가 조각된 칠흑같이 어두운색의 벼루.

가운데에 먹물을 머금고 있던 벼루는 허공을 가로질러 바로 앞에 앉아있던 이의 머리에 직격했다.

흘러내리는 붉은색 피만으로는 모자라다 여긴 것인지, 머금고 있던 검은 먹물까지 흘러내리게 하면서.

“자네, 살고 싶지 않은가?”

“…….”

뚝, 뚝. 제임스 왕 이사의 머리칼을 타고 떨어지는 검붉은 액체들.

비참하리만큼 굴욕적인 그의 모습을 앞에 둔 베이징의 노괴는 특유의 거슬리는 목소리로 그르렁거렸다.

“베이징 친청 교도소! 죽은 자나 다름없는 몰락한 정치범들이 가는 그곳에 들어가고 싶은가, 이 말이다!”

괴성에 가까울 만큼 거세게 몰아치는 장 대인의 격노.

그러나, 그 앞에 고개를 숙인 제임스 왕 이사의 주먹 쥔 두 손에는 일절 작은 떨림조차 있지 않았다.

베이징의 노괴. 그의 보여주기식의 격노는 마치 가공된 재료처럼, 지극히 인위적인 모양새를 띠고 있었기에.

‘역겨운 노괴 같으니. 내게 책임을 덮어씌우지 못해 안달이 났군.’

사실상 푸저우시 당 서기의 감독과 통제 과정에 있어, 책임을 져야 할 장 대인.

그의 작위적인 분노 표출을 정치인의 언어로 해석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자네, 괜히 덤터기를 쓰기 싫걸랑 어서 내게 이 상황을 타개할 해답을 내놓게.’

그렇기에, 이 폭압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천천히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던 제임스 왕 이사.

머리칼에 떨어지는 검붉은 액체를 닦아낸 그는, 차분히 굳게 닫혔던 입을 열었다.

“대안은 언제나 준비되어 있습니다. 장 대인.”

“…시덥잖은 것이라면 분명 상응하는 대가가 따를 게야.”

“그런 것 따위는 염려치 마십시오. 애당초 대인께서 계획하셨던 토사구팽의 연장선에 지나지 않으니.”

이대로 책임을 뒤집어쓰고 정치범 수용소행 버스에 올라탈 생각은 없는 제임스 왕 이사.

씰룩거리는 얼굴 근육으로 대답을 재촉하는 베이징의 노괴를 향해, 그는 하던 말을 마저 이어 나갔다.

“남방의 이슬람 군벌 지도부를 친중 쪽으로 갈아 치우면,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크라 운하를 장악케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일입니다.”

“하! 내뱉는 말 따위야 얼마든지 번지르르하게 할 수 있는 법일세. 구체적인 각론을 말하게!”

탁, 탁, 금박을 입힌 부채로 탁자를 마구 내려치는 베이징의 노괴.

비록 그가 내는 역정의 목소리는 쉬이 사그라지지 않았으나, 이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은 모두 알고 있었다.

제임스 왕 이사, 그가 여기서 어떤 말을 내뱉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모든 일정이 달라지리라는 것을.

“말레이시아 정보기관. 그들과 일정을 잡아 주십시오.”

“뭐라?”

생각지도 못한 제삼자의 등장에 눈썹 산 한쪽을 으쓱거리는 장 대인. 손에 든 부채의 움직임이 멈춘 것을 확인한 제임스 왕 이사는 속히 자신의 주장을 펼쳐나갔다.

“크라 운하가 개통되면, 아래쪽 항로를 끼고 있는 말레이시아는 필시 거북해질 것입니다.”

“크흠….”

“그러니, 그쪽에서 내세우는 꼭두각시 세력을 번국의 우두머리로 옹립하심이 합당할 것입니다.”

애써 연출한 무표정으로 해결책을 가지고 온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베이징의 노괴.

정원에 놓인 대나무 통에 물이 받아졌다 다시 비워지는 짧은 시간, 모든 정치적 계산을 마무리한 그는 제임스 왕 이사에게 물음을 던졌다.

그 자신도 답을 알고는 있지만, 그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기 위한 형식상의 질문 하나를.

“가능하겠나?”

“가능하게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피식, 그제야 비로소 가면 아래 짓고 있던 교묘한 웃음을 내보이는 장 대인.

탁자 위의 종을 울려 시동을 부른 그는, 곧바로 문서 하나를 가져오게 하고는, 만년필을 움직여 거기에 누군가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좋다. 곧 있을 동남아시아 순방 일정에 자네를 특사단 부대표로 넣어 주지.”

“…대인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감사는 무슨.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그쯤 허고.”

자리에서 일어난 장 대인. 그는 굴종을 연기하고 있는 제임스 왕 이사의 어깻죽지를 툭툭 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그 자신의 욕망을 숨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으며.

“이제는 성과를 내게. 그렇지 않으면 솥에 들어갈 개는 자네가 될 터이니.”

* * * *

홍콩의 밤.

아직 중국 공산당의 영향력에 잠식되지 않는 홍콩의 야경은 너무나도 자유롭고 아름다웠다.

물론 그 찬란한 야경보다 더 자유롭고 아름다운 것은 나, 그리고 김원철 아저씨와 유세나 보좌관의 이틀째 연이은 거침없는 주량이었지만.

“유세나 보좌관? 저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

익살스러운 표정을 하고선, 술병 뚜껑 꼬랑지를 빙빙 감아 반지 모양을 만든 김원철 아저씨.

이윽고 음정 따위 일절 신경 쓰지 않고서 입으로 부르는 결혼 행진곡 배경음악이 깔리고는, 마치 프러포즈를 하듯 술병 뚜껑 반지가 유세나 보좌관에게 전달되었다.

“사랑해용.”

“아, 진짜! 김 비서실장님 제발 좀!”

어제, 푸저우시 당 서기와 있었던 술자리를 강제로 떠올리게 하는 김원철 아저씨의 주접.

유세나 보좌관의 학을 떼는 찰진 리액션에 대머리 아저씨는 만족스러운 듯, 웃음을 터트리는 데에 거침이 없었다.

“낄낄낄. 아, 진짜로 그날 웃음 참기 하느라 너무 힘들었잖엉.”

“전 그냥 참기 하느라 힘들었거든요?”

두 사람. 아니, 어쩌면 유세나 보좌관 한 사람의 숭고한 희생으로 인해 잘 마무리된 어제의 술자리.

그렇기에 나는 홍콩에 도착한 후에도 곧바로 귀국하지 않고, 잠시 이곳에 머물며 휴식을 택했다.

“어쨌거나, 두 분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특히 유세나 보좌관.”

나는 잘 구워진 채 발려 나온 오리구이 다리 살을 덜어 그녀 앞에 놓인 접시 위에 올려 주었다.

새로 깐 마오타이 술 한 병이 비워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일단 중국 내의 반도체 공장 리스크는 오늘 자로 없어졌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자축할 일이고요.”

“좀 아깝기는 헌디, 할 수 없지. 이대로 가자고.”

“애당초 크라 운하 자체가 일대일로 전략에 반대되니까요. 중국 공산당 눈치는 앞으로 안 보면 안 볼수록 좋습니다.”

나는 김원철 아저씨와 함께 잔에 담긴 마오타이 술 한 잔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코를 찌르는 살짝 쿰쿰한 향. 아마 오늘을 마지막으로 당분간 현지에서만 마실 수 있는 이 중국술은 맛보지 못할 것 같다.

“크흐, 근데 말이여. 점마들이 가만히 있을까?”

손가락을 들어 야경 너머 중국 본토를 가리키는 김원철 아저씨.

반짝이는 불빛 너머 어두운 그곳은, 이제 더는 발을 들일 수 없는 곳이었다.

“그 일대일로인지 하는 거, 금마들 대전략 아니여? 그러면 분명 머저리처럼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거잖어.”

“가만히 당하고 있을 리가 없지요. 아마… 마지막 수를 쓸 겁니다. 가장 강력하고, 쉬이 뒤집을 수 없는 수를.”

나와 김원철 아저씨의 대화를 듣던 중 불안감이 올라온 모양이었다.

조심스레 우려의 의견을 표하는 유세나 보좌관.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죠? 저쪽에서 무슨 수를 쓸지 예측조차 되지 않는데.”

“저는, 그리고 우리는 그 점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

단호한 내 부정의 말에 고개를 떨구는 유세나 보좌관.

그러나,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하는 법.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나는, 이내 목에 걸린 넥타이를 바로 하고는 자신감이 담긴 어조로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상대가 무슨 수를 둘지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알고 있지요.”

“회장님…?”

“슬슬 이동하시죠. 내일 아침, 바로 장시간 비행을 해야 합니다. 그 예언가 양반을 만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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