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누구를 위한 신인가(1)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양옆으로 야자수가 반기는 도로 위, 붉은색 중국 국기가 달린 검은 승차 뒷좌석에서는 두 사람이 어두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장 대인께서는 왜 이런 번거로운 방법을 쓰시는지, 자네도 숙지했으면 하네.”
왼편 상석에 탄, 중국의 신임 외교부장 왕룽. 안경 너머로 곁눈질하듯 옆을 힐끗 바라본 그는, 오른쪽에 앉은 제임스 왕 이사에게 말했다.
“일대일로 계획은 아직 시간을 필요로 하니 말이야. 당과 정부가 앞에 나서기 힘든 일 아니겠나.”
“<상하이 캐피탈>이 과거 제국주의 시절 동인도 회사 역할을 해야 함은 알고 있습니다.”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왕룽 외교부장.
전형적인 엘리트 외교관 출신인 그는 콧잔등 위의 안경을 쓸어 올리고는 앞쪽을 바라보았다. 중국-말레이시아 순방 회담 장소인 쌍둥이 마천루를.
“비록 지금은 민간의 탈을 쓰고 있더라도, 자네 어깨 위에 걸린 짐은 퍽 무겁다는 걸 명심하게.”
“염려치 마십시오. 세워둔 계획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으니.”
끼익, 어느새 회담 장소 앞에 선 승용차. 차 문을 닫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가며, 왕룽 외교부장이 제임스 왕 이사에게 말했다.
“먼저 다른 외교적 현안에 대해 논하고 있겠네. 호출하는 대로 바로 들어오도록.”
* * * *
제임스 왕 이사에게 기다림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방 안에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만날 수 있었던 검은 피부의 말레이시아 외교 당국자. 그는 크고 거친 손바닥을 내밀며 거침없이 악수를 청했다.
“왕룽 외교부장께 이야기 들었습니다. 비공식 관계인 만큼, 겉치레는 필요치 않으니 본론부터 말씀하시죠.”
급류를 타듯 순식간에 진행되는 논의. 빠른 진행을 원한다는 말레이 쪽 인사와는 달리, 제임스 왕 이사는 그의 눈을 가만히 응시할 뿐이었다.
‘욕심이 많은 자다. 앞으로… 일국의 정점에 오르고 싶을 만큼.’
권력욕이 높기로 정평이 나 있는 그는 분명 말레이시아의 총리를 목표로 할 터. 그러기 위해서는 외교 당국자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업적을 쌓는 것이 필수적인 상황.
판단을 마친 제임스 왕 이사는 곧바로 이야기의 핵심부터 말하기 시작했다.
“태국이 관장하게 될 크라 운하. 말레이시아의 국익에 하등 쓸모가 없지 않겠습니까?”
“…계속해보시오.”
관심이 동한 모양이었다. 턱 끝으로 제임스 왕 이사를 가리키며 자세를 고쳐 앉은 말레이 쪽 외교 당국자.
“그러니 크라 운하는 중국과 말레이시아가 상호 통제 가능한 세력이 관장해야 함이 옳은 것이지요.”
“상호 통제 가능한 세력이라.”
구미가 당긴 듯 웃음 짓는 그의 모습을 눈에 담은 제임스 왕 이사.
곧바로, 그는 준비해온 직설적인 방안을 제시했다.
“돌려 말하지 않겠습니다. 말레이시아 정보부가 기르는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 그들을 태국 남부로 보내십시오.”
“그놈들을…?”
“필요한 모든 스폰서는 중국 측에서 서겠습니다. 비용 부담부터 국제 여론전까지 전부.”
태국과 국경을 접한 말레이시아.
그렇기에 그들은 음지에서 몰래 이슬람 테러 단체를 지원하고 있었다.
평소 하는 것이라고는 경전 읽는 것 외에는 밥벌레에 불과했던 그들을 써먹을 기회까지 함께 따라온 셈.
반색한 표정의 말레이시아 외교부 당국자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홀로 중얼거렸다.
“과연, 그렇군. 그것보다 합당한 방법은 없으니.”
그러고는 일절 지체 없이, 즉각 제임스 왕 이사에게 건네는 대답.
“좋습니다. 저희 정보부 측과 논의하여 긍정적인 답안을 드리겠습니다.”
“현명한 선택, 절대 후회 없으실 겁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맞잡은 두 손. 물론 그 손아귀에 담긴 감정과 계산식은 처음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달라진 상황.
“슬슬 움직여야겠네요. 기회가 닿는다면 다음에 또 뵙기를.”
어느덧 벽 한쪽 괘종시계의 큼직한 시침은 두 칸이나 옮겨져 있었다.
서로가 건네는 마지막 인사. 그 끝을 장식한 것은 말레이시아 측의 의미심장한 덕담 한마디였다.
“중국 측이 저희와 손을 잡으니 기쁩니다. 이토록 이슬람에 호의적일 줄은 몰랐는데 말입니다.”
* * * *
“논의는 잘 끝났다지? 베이징에서 자네 목이 잘린 꼴은 볼 일은 없겠구먼.”
회담이 끝나고 호텔로 돌아오는 차 안.
간략한 보고를 들은 왕룽 외교부장은 피식 웃음 지으며 제임스 왕 이사에게 말을 건네었다.
“뭐, 장 대인께서 노기를 거두실 테니 나 또한 좋은 일이기도 하고.”
“계속 잘 풀릴 것입니다.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자신감이 있어서 좋구먼. 그나저나… 허어, 이거 참. 이건 또 무슨 황망한 일이람.”
둔탁한 엔진음 사이로 흘러나오는 왕룽 외교부장의 신음.
손에 쥔 태블릿에 무언가 본국에서 보낸 정보가 막 업데이트된 모양이었다.
눈살을 마구 찌푸리는 그런 그를 조심스레 떠보는 제임스 왕 이사.
“외교부장님?”
“아아. 뭐, 별일 아니네.”
툭, 태블릿의 커버를 덮은 왕룽 외교부장.
미처 꺼지지 않은 화면에서는 희미한 빛이 틈 사이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중국의 맨 서쪽 끝,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발생한 유혈사태에 대해 논하는 보고 내용이 담긴 빛이.
“여하튼, 이슬람 믿는 놈들은 쉬이 믿어서는 아니 되니, 끝까지 주의하는 것 잊지 말고.”
* * * *
“환영하네, 나의 형제여! 어서 들어오게나.”
간만에 찾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
사막 한가운데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초록이 짙은 궁궐 안. 그곳에서는 살면서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환대한 연회가 열리고 있었다.
금박을 덧씌워 만든 황금 백조 조각상의 부리 끝에 걸린 이름 모를 물고기 요리. 찬란한 오색 가지 끝에 매달린 디저트. 보는 것만으로도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드는 낙타 구이까지.
이 모든 것들은 단 한 사람을 위해 마련된 것들이었다.
누구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이리 가까이 오게나. 오래간만에 또 손에 쥐어 봐야지.”
“왕세자 저하?”
어색하게 굳어있는 내 어깨를 팔로 휘감은 빈 살만 왕세자.
지난 추억을 상기하며, 그는 비서관에게 철제 007 가방 하나를 가지고 오게 한 후, 즉각 뚜껑을 열었다.
곧바로 내 손에 쥐어진, 거기에 든 문제의 물건은 바로.
“황금 권총. 오래간만에 보지?”
“…간만에 보네요.”
“언제 만져도 그립감이 참 좋아. 전 세계의 권력 투쟁에 항상 한 발을 걸치려 드는, 자네 같은 상남자에게 꼭 어울리는 물건이지.”
뭔가 이상한 오해를 하는 빈 살만 왕세자.
그러나 내가 아무리 항변을 한들, 소위 ‘한서준 세계 정부 뒷조정 설’이 사그라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주변에 있는 고위급 외교 인사들의 수군거림이 더 심해졌다면 또 모를까.
‘Holy shit! 저 사람이 탄약그룹의 서준 한 회장…? 전장 속에서 빈 살만 왕세자를 옹립했다던?’
‘이번 태국 쿠데타 방지 건도 저 사람 머릿속에서 나왔다고 하는 설이 있어요. 아무래도…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는 인물입니다.’
‘마카오 카지노의 숨겨진 큰손이라는 이야기도 돌던데, 제 아들뻘 또래 나이에 저 정도의 행동력이라니… 정말 대단하군요.’
뭔가 사실이기는 한데, 그렇기엔 또 뭔가 조금 과장되기도 한 쑥덕거림.
그 쑥덕거림이 절정에 다다른 것은, 대추야자로 만든 술에 잔뜩 취한 김원철 아저씨가 옆에서 내뱉은 말 한마디였다.
“끄윽, 왕세자님. 저 김원철입니다.”
“오, 그대도 오래간만일세. 서준 한 회장 곁에서 충실히 보필하고 있다 들었네.”
“제 나름대로 보필은 충분히 하긴 합니다만, 딱 하나는 못 하고 있습니다.”
근처 말술 러시아 쪽 인사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더니 코가 빨개질 만큼 목을 적신 김원철 아저씨.
어차피 이 자리에서 본인이 할 일은 분위기를 유하게 만드는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아저씨는 헤실거리는 미소를 얼굴에 건 채로 빈 살만 왕세자에게 입을 열었다.
“당최 우리 회장님이 여자는 관심에도 없고, 숫제 일하고만 사랑에 빠져서 말입니다.”
“저런…! 훌륭한 사내에게 종종 있는 일이긴 한다만. 내가 우리 서준 한 회장에게 너무 신경을 못 써 주었군!”
아니, 더 안 써줘도 돼.
내 내면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표정을 얼굴에서 지우지 못한 빈 살만 왕세자.
눈알을 위쪽으로 굴리며 잠시 고민의 시간을 가진 그는, 이내 씨익 웃음을 지으며 내게 말을 꺼내었다.
“내 여동생들 가운데 아끼는 아이가 하나 있지.”
“왕세자님의 여동생 말씀이십니까…?”
그의 말이 끝남과 함께 한층 더 높아진 주변의 수군거림. 벌써부터 재계에 쫙 돌 소문이 예상이 간다.
아무래도 김원철 아저씨에게는 한국 돌아가는 순간 업무 폭탄뿐이다. 할머니에게 대신 좀 기강을 잡아달라 부탁해야지.
“그렇지. 나이도 자네보다 어리니 딱 좋을 터.”
“헤에, 우리 회장님 완전 계 탔네. 여동생분이 몇 살인데요, 왕세자님?”
사람 속도 모르고. 아니, 어쩌면 뻔히 사람 속을 알면서 옆에서 분위기를 띄우는 김원철 아저씨.
그 특유의 광대력(力)에 빈 살만 왕세자 또한 만족스러워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곧바로 호쾌한 얼굴로 대답을 주었다. 내가 아는 상식과는 다소… 동떨어진 대답을.
“여덟 살. 남녀가 가문을 바탕으로 혼약을 맺기 딱 좋은 나이 아니겠나?”
“…남편 될 사람이 한국 감옥에 들어가기 딱 좋은 나이지 싶습니다만.”
뭔가 범상치 않은 이슬람식 혼인 개념.
자칫 현행법 위반으로 잡혀 들어갈 뻔했던 위기는, 곁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던 유세나 보좌관의 상황 정리로 인해 마무리되었다.
“자, 슬슬 이 연회도 마무리해야겠군.”
그렇게 어느새 깊어진 밤.
낮의 살인적인 더위와는 정반대의 쌀쌀한 찬바람이 궁정 정원을 방문했다.
타닥타닥, 불꽃 소리를 내며 철제 화로 속에서 타오르는 숯.
홀린 듯,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는 내게 가까이 다가온 빈 살만 왕세자는 바로 옆자리의 의자에 앉았다.
“내 여동생은 한국 민법이 허락하는 나이가 되면 데려가게나. 그때까지 다른 배필을 찾지 못한다면 말이야.”
“그… 아닙니다. 일단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이 사람, 싱겁긴.”
소아성애자 딱지를 달고 감옥에 갈 위기를 간신히 넘긴 나.
빈 살만은 타오르는 화롯불 앞에서 나와 몇 분간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난번 사우디 쿠데타에서의 추억 아닌 추억과 국내에서 돌아가는 소식들. 금융 쪽의 혁신을 가지고 올 <코코아>와 크라 운하에 대한 사업성 문제까지.
“그렇군. 그리하면 투자 건은 대충 마무리되겠어.”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왕세자님.”
“당연한 것이다. 투자자로서 제1 철칙은 투자한 대상에 대한 신뢰이니. 그나저나.”
손에 든 철제 부지깽이로 화롯불을 뒤적거리는 빈 살만 왕세자.
통 안의 작은 불꽃놀이를 눈에 담은 그가 문득 생각이 난 듯, 내게 본론을 꺼내었다.
이슬람 세력의 수장을 맡고 있기에 내게 답해줄 수 있는, 이번 일에 대한 본론을.
“내게 이슬람 세력과 관련해 묻고 싶은 것이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