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서토에서 생긴 일(3)
“그럼, 여기 이 소녀의 신병은 저희 쪽에서 접수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 이만.”
탄약 전자 미셸 사장으로부터 위구르족 소녀를 인도받은 UN 인권위원회 고등판무관.
비행기에 올라탔으나, 여전히 불안감과 긴장감 탓에 쉬이 굳은 표정을 풀지 못하는 위구르족 소녀. 고등판무관은 그녀에게 막대사탕 하나를 건네며 딱딱한 분위기를 풀려고 애썼다.
“다 잘 풀릴 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정말로… 제가 거기서 증언해도 괜찮을까요?”
“괜찮다고 보장할게. UN의 이름을 걸고서.”
이제 막 고등학교에나 다닐 법한 앳된 소녀.
고등판무관은 그런 그녀를 보며 가여운 감정이 든 모양이었다. 특히나… 미셸 사장으로부터 함께 건네받은 ‘그 영상’을 보고 나서 더더욱.
‘위구르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비록 겉으로는 차분함을 잃지 않았으나, 속으로는 이 잔혹한 사태에 분개하는 고등판무관.
그는 간신히 잠든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무어라 중얼거렸다.
이번 판을 설계하고, 해결하기까지 할 한 남자. 그의 시나리오에 장단을 맞추는 것이 옳은 일이라 여기며.
“비록 전후 사정이 훤히 보이지만… 이번에는 무조건 협조해야겠지. 그 서준 한이라는 남자에게.”
* * * *
“안 돼! 나도 미국 데려가 줘. 가서 본토 햄버거 먹고 싶단 말이야, 제발!”
인천국제공항 출국 게이트에서 울려 퍼지는 김원철 아저씨의 구구절절한 애원의 목소리.
조명 짙은 공항의 빛을 받아 반들거리는 대머리는 오늘따라 유독 환한 빛이 났다.
양복 상의 주머니에서 꺼낸 선글라스. 딱 이때를 대비해서 준비해 둔 보잉 선글라스를 낀 나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유세나 보좌관과 함께 게이트를 빠져나갔다.
뒤를 돌아보며 지은 환한 미소와 함께.
“그럼, 저는 갔다 오겠습니다. 할머니와 함께 평창동 본가에서 오붓한 시간 보내시길.”
“아, 진짜. 회장님아! 나한테 이러기 있기여?”
제아무리 내게 억울함을 토로해 본들 이미 상황은 늦었다.
이 자리에 함께 나온 누군가에 의해, 그 유쾌한 반란은 곧바로 진압이 이루어졌으니까.
“아야야! 귀 좀 당기지 말아요, 이사장님.”
“잘되었다. 이번 기회에 김원철이 네놈 촐싹대는 것도 좀 고쳐 보자.”
곧바로 공항에 함께 뒤따라온 할머니에게 귓바퀴를 잡혀 어디론가 압송되는 김원철 아저씨.
내가 미국으로 가는 동안 우리 불쌍한 대머리 아저씨는, 본가에서 밤새도록 그룹 지분 관리 작업이라는 재미없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그것도 탄약그룹의 서태후, 할머니와 함께.
“깨소금 맛이네요. 속이 막 편해지고 있습니다.”
“…일부러 그러신 거 같습니다만. 그 여덟 살짜리 사우디 공주님 결혼 건으로요.”
전용기 옆자리에 앉아 정곡을 찌르는 유세나 보좌관. 물론 회장의 위엄을 지켜야 하기에, 나는 그 물음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크흠, 그 얘긴 하지 마시고.”
“네에….”
“일단 시간이 넉넉지 않으니 바로 출발합시다. 갈 길이 멀어요, 멀어.”
둔탁한 엔진음을 내며 곧바로 날아오른 비행기.
목적지는 뉴욕시, 맨해튼 한복판에 있는… UN 본부이다.
멀어져가는 한국 땅을 내려다보며, 나는 내 손에 쥔, 새로 발급받은 여권을 만지작거렸다. 푸른색의 외교관 여권을.
“이거야 원. 팔자에도 없는 외교관 신분이라니.”
“대통령이 회장님에 대해 상당히 신경을 쓰는 모양입니다.”
“뭐, 나름 가서 성과를 내고 자기에게도 도움이 될 법한 일을 캐오라는 것이겠죠.”
일전에 한번 테스트를 통과해서일까?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언제부터인지 알아서 편의를 봐주는 대통령.
그 능구렁이 같은 정치인은 내게 이제는 제법 많은 기대를 걸고 있는 모양이었다.
‘한 회장, 자네 UN 본부에서 큰 판을 벌일 거라지? 자네가 각본을 맡고, 사우디의 빈 살만 왕세자가 연출을 맡았다더구먼.’
‘대통령님께서는 그건 또 어찌 아셨습니까…?’
‘자네 곁에는 늘 국가정보원 요원들이 함께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나. 밤이든 낮이든 언제나 말일세.’
뭔가 등골이 싸할 만큼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너털웃음을 짓던 대통령.
무심한 듯 따뜻한 이 중늙은이 사내는, 마치 오다 주웠다는 것처럼 내게 수첩 비슷한 무언가를 던져 주었다.
‘여하간, 이게 있으면 좀 판에서 날뛰기 편할 것 같더군.’
‘이건….’
바로 만든 듯, 따끈따끈하게 뽑혀 나온 외교관 여권 하나를.
‘기대하고 있겠네. 거기 UN 본부에 로열석 하나는 내가 맡아두었으니, 어디 이번 연극도 재미있게 해 봐.’
부담 아닌 부담을 잔뜩 안기고는 그대로 일정이 있다며 휙 떠나버린 대통령.
아직도 빳빳한 여권 겉표지를 매만지며, 나는 그저께 있었던 이 일을 회상했다.
물론… 그까짓 부담스러움 따위야 이번 일을 하는 데에 있어, 아무런 거리낌조차 되지 않지만.
“회장님? 회장님?”
“아아, 그래요. 무슨 일입니까.”
생각의 바다에 빠졌던 나를 조금 흔들어 깨운 유세나 보좌관.
“너무 깊이 생각하시는 것 같아서요.”
“아아, 그렇네요. 그런데 무슨 일로?”
“음… 이제는 이번 일정이 어떻게 될지 제게도 말씀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그간 빈 살만 왕세자 측의 요청 때문에 유세나 보좌관에게는 세부 사항까지 공유되지 않았던 이번 계획.
아무래도 외교 이슈가 될 예정이기에 더더욱 보안에 신경을 써야만 했다.
하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는 상황. 나는 토끼처럼 동그랗게 눈을 치켜뜬 그녀에게 천천히 대답했다.
“일단, 혹시 트롤링이라고 아십니까?”
“트롤링이라면 그 온라인 게임 같은 거 할 때, 이상한 사람들이 괜히 이상한 짓으로 사람 성질 긁는 것 말씀하시는….”
장황하게 설명을 하려다가 갑자기 무언갈 깨달은 듯, 허벅지를 탁, 하고 치는 유세나 보좌관.
뒤이은 말 한마디는 세상 그 무엇보다 직관적이었다.
“그러니까, 김원철 비서실장님이 장난칠 때 짓는 그 표정 말씀하시는 거죠?”
“…뭐, 대충 맞긴 합니다.”
“윽.”
워낙에 하도 당한 게 많다 보니 벌써부터 흔들리기 시작하는 그녀의 동공.
그 떨림을 애써 진정시킨 나는 마침 나온 기내식을 먹으며 하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UN 본부가 있는 뉴욕으로 트롤링을 하러 간다고 보면 됩니다.”
“잠시만요. 그러니까 지금, UN 본부에서 트롤링을 하시겠다고요?”
“네, 뭐. 재미있을 것 같지 않겠습니까?”
“그게 무슨…!”
마치 게임을 할 때 키보드를 두드리는 듯한 시늉을 하는 나.
상상하지 못했던 어리둥절한 모습의 유세나 보좌관에게, 나는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 한마디를 덧붙였다.
“게임 속 트롤링이라 생각하면 편할 겁니다.”
“게임… 말입니까?”
“네. 전 세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사우디아라비아 대사라는 아바타로 저지르는, 신나는 트롤링 말이죠.”
* * * *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 중심부의 궁전.
기도를 알리는 목소리가 메아리와 함께 잦아들자, 곧바로 바닥에 깔린 카펫 위에서 머리를 든 빈 살만 왕세자.
툭툭, 무르팍의 먼지를 털고 일어난 그는 곧바로 비서관에게 물음을 던졌다.
“우리 측 대사는 지금쯤이면 미국에 도착했겠지?”
“그러하옵니다, 저하. 가장 먼저 서준 한 회장부터 만난다고 하옵니다.”
“좋다. 내 의중을 잘 알고 있는 자를 임명하니, 돌아가는 일이 편하게 되는군.”
얼마 전, UN에 보낼 전권대사를 임명한 빈 살만 왕세자.
의례 매년 돌아오는 UN 총회. 그곳에서 하는 연설은 사실 늘 그러하듯 뻔하디뻔했다.
그저 세계의 평화, 경제적 번영과 같은 뭔가 뜬구름 잡는 이야기들뿐. 그러나….
“서준 한 회장이 짠 각본에 맞춰 대차게 미친 척을 할 모습이 기대되는군.”
“예행연습까지 하지 않았사옵니까. 필시 대사는 연극을 잘 해낼 것이니 염려치 마소서.”
평소와는 사뭇 다를 이번 UN 총회. 빈 살만 왕세자는 발치의 애완용 치타의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분명, 이번에 터질 판은 이슬람 세계 전체를 걷잡을 수 없이 흔들어 놓은 후에, 멀리 떠나버릴 것이라고.
마치 한번 달렸다 하면 미친 듯한 빠른 속도로 멀어져가는 이 금색 치타처럼.
“뭐, 나 역시 이슬람 세계에서 명분과 권위가 서니 충분한 이득이기도 하고.”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빈 살만 왕세자의 다리에 얼굴을 비비는 애완용 치타.
말린 고기 조각 하나를 집어 치타에게 먹이를 주며, 그는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 한 마디를 내뱉었다.
이 녀석과는 달리, 좀처럼 길들이기는 어렵지만, 또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는 누군가를 생각하며.
“서준 한 회장, 재미있는 놈이다. 알면 알수록. 역시 막내 여동생을 아내로 주어 나와 인척으로 엮는 편이 나을라나?”
* * * *
“에취!”
“회장님, 괜찮으세요?”
갑자기 터진 재채기.
아직 그리 쌀쌀하지 않은 초가을이건만, 뭔가 영 싸한 느낌이 척추를 따라 온몸으로 퍼져갔다.
내게 티슈를 내미는 유세나 보좌관. 나는 밖으로 튀어나온 묘한 기시감을 닦아내며 입을 열었다.
“좀 이상한데….”
“회장님? 혹시 감기 기운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그건 아닌 것 같고… 뭔가, 그냥 등골이 서늘하네요. 누가 뒤에서 몰래 내 얘기라도 하는 건지.”
뒤에서 내 이야기를 할 사람이 한둘은 아니겠지만, 뭔가 한층 더 서늘한 느낌.
나는 빨리 코앞에 펼친 풍경을 눈에 담으며 그 느낌을 지워버렸다.
뉴욕, 맨해튼. 허드슨강을 낀 그 중심부에 우뚝 선, 휘날리는 만국기로 장식된 UN 본부 청사의 풍경을.
“막상 오니 긴장되네요. 사우디 대사는 미리 와서 기다린다고 했지요?”
“네, 지금 바로 이리로 오신다고… 아아, 저기 있네요.”
미끄러지듯 정지한 검은색 승용차에서 내린 중년의 아랍인 남성.
나는 그와 가볍게 통성명을 하고는 악수를 나누었다.
“한서준입니다.”
“오! 처음 뵙겠습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왕세자 저하의 특명전권대사 마호메트입니다.”
털이 수북한 양손으로 내 오른손을 꽉 움켜쥔 특명전권대사.
조금 쾌활한 성격인 탓인지, 그는 내 손을 놓을 생각일랑 없는 듯, 오히려 힘을 더 줘가며 내게 감동의 말을 내뱉었다.
“보내주신 각본. 정말 인상 깊게 보았습니다. 이거 제대로… 상대방을 물 먹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연기만 잘해 주십시오. 전 세계의 이슬람교도들의 마음을 마구잡이로 뛰게 만들 수 있도록.”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저 사람들은….”
그 순간, 언제 놓나 싶었던 그의 손이 떨어졌다.
그러고는 곧바로 내 등 뒤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특명전권대사.
천천히 뒤를 돌아 그곳을 바라보니… 거기에는 세 사람이 못마땅하다는 듯, 이쪽을 향해 영 곱지 못한 시선을 내비치고 있었다.
한 사람은 말레이시아 대사. 다른 한 사람은 중국 대사.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실물로는 처음 보는, <상하이 캐피탈>의 제임스 왕 이사.
그들과 내 관계가 어떤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얼굴의 사우디 특명전권대사. 그는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얼굴에 띠고는 내게 하던 말을 마저 덧붙였다.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 저들은 꿈에서조차 알지 못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