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서토에서 생긴 일(4)
간만에 다시 듣는 제임스 왕 이사의 목소리는 탁했다. 마치 철편으로 무언가를 긁어내듯, 무겁고 중후한 목소리.
“직접 만나는 것은 처음이군요. 한서준 회장.”
전화 통화가 아닌, 직접 실물로 본 제임스 왕 이사의 모습.
그의 표정은 차분했다.
투박한 사내의 외양 아래 가려진, 냉철한 늑대 한 마리를 보는 것처럼.
야트막한 언덕 위, 가만히 사냥감의 움직임을 기다리다가 때가 되는 순간 곧바로 아래를 향해 질주하는 늑대.
마치 적합한 사냥터를 점찍은 것처럼 내게 천천히 다가와 손을 내미는 제임스 왕 이사.
나는 힘줄이 잔뜩 돋아난 그 손을 아무런 망설임 없이 맞잡았다.
“반갑습니다. 제임스 왕 이사님과는 초면입니다만… 꼭 10년 이상을 알고 지내온 구면 같네요.”
이전 삶에서까지 쌓아온 기나긴 세월.
나는 그의 칠흑색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회귀 전, 갈기갈기 찢긴 탄약그룹의 가장 맛있는 부위만을 발톱으로 집어 바다 너머로 날아가 버린 제임스 왕 이사.
그의 발톱은 여전히 녹슬지 않았다. 그저 거칠어진 숨을 돌린 후, 다른 무기를 들어 나를 노릴 뿐.
“10년이라. 서로 등에 칼을 꽂지 못해 안달이 난 사이이니, 그럴 법도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맞잡은 손에 지나치리만큼 힘을 가하는 제임스 왕 이사.
손아귀가 터져나갈 듯 강한 압박이 전해졌지만, 나 역시 이에 영향을 받거나 하지는 않았다.
단지 그가 가한 힘보다 조금 더 강하게 올가미를 조일 뿐.
“탄약그룹이라는 들짐승은 야심이 지나친지 소화하지 못할 고기 조각을 통으로 삼키려 들더군요.”
그르렁거리듯 낮은 목소리로 하던 말을 이어나가는 제임스 왕 이사.
그는… 아마 이곳, 만국기가 바람에 나부끼는 UN 본부를 전장으로 선택한 모양이었다.
자신이 확실하게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는, 그래서 이길 수 있는 전장을.
“거기 붙은 뼈가 스스로의 목구멍 안쪽을 뚫을 정도로 거세게 찌르리라는 것을 알면서까지.”
“들짐승이라. 제임스 왕 이사님께서는 마치 본인이 사냥꾼이라도 되시는 모양입니다.”
“변방의 짐승이 날뛰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활을 쏴 잡을 수 있으니, 사냥꾼이라 봐도 무방할 겝니다.”
자신감에 찬 듯. 아니, 어쩌면 그 스스로 자신감에 차야만 하는 어조로 내게 다짐하듯 말하는 제임스 왕 이사.
갑자기 강가에서 불어닥친 거센 바람. 해안가의 파도처럼 몰아치는 만국기의 흔들림 속에서, 그가 건넨 마지막 말은 일종의 선전포고 그 자체였다.
“그것도 자기 구역이던 동쪽뿐이 아닌, 이곳 남쪽까지 쏘다니는 젊은 노루라면 더더욱.”
“그렇다면… 오늘 이 자리에서 끝을 봐야겠군요. 당신이나 나나.”
허공에서 마주친, 나와 제임스 왕 이사 두 사람의 시선은 이제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
서로 간의 기 싸움이 소강상태에 들어갈 때였다. UN 본부 건물 앞, 큼지막한 전광판을 가리키는 제임스 왕 이사의 손가락.
화면 안에는 녹색 석재를 이어 붙인 연단 벽 앞에 선 중국 대사의 모습이 비쳤다.
“시작하나 봅니다. 탄약그룹의 몰락과 한 회장 당신의 패배를 알리는 신호탄이.”
콧잔등에서 흘러내리려는 안경을 고쳐 쓴 중국 대사. 쇳소리 섞인 스피커에서는 둔탁한 그의 목소리가 서서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마치 승리의 고지를 점했다는 듯, 나를 향해 웃음 짓는 제임스 왕 이사.
“이 자리에서 똑똑히 지켜보시길. 크라 운하, 남방을 건 이번 판에서 승리는 내 쪽이 가져가는 것을.”
* * * *
“어흐흐흑, 따흐흐흑.”
대저택이 즐비한 평창동.
그곳에는 마치 막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처럼 서글픈 목소리를 내는 이가 있었다.
탄약그룹의 여제, 서태후의 서재에 앉아 가출한 영혼을 간신히 붙들고 있는 사람.
퍼진 슬라임처럼 책상에 상체를 누인 김원철은 맥 빠진 목소리로 서명희 이사장에게 입을 열었다.
“끄어어업! 읏차, 다 되긴 했네요. 이만하면 지배 지분 가지고 우리 이사장님 골머리 썩힐 일은 없을 겁니다.”
“음, 어디 이리 줘 보게나.”
은테 안경을 쓰고는 주름진 손으로 문서를 매만지는 서태후.
몇 차례 다시 읽기를 반복하던 그녀는 이내 만족한 표정으로 김원철에게 말을 건네었다.
“잘 되었군. 거, 봐. 막상 허면 잘허는 놈이 무슨 입이 오리 주둥이처럼 댓 발로 튀어나오고 그랬나?”
“아, 그럼 우리 회장님은 유세나 보좌관하고 같이 뉴욕 가서 하하 호호할 텐데, 같이 못 따라가면 슬프지 않겠냐 이겁니다.”
뉴욕에서 꼭 먹어보고 싶었다는 햄버거 리스트를 읊는 김원철.
그런 그를 바라보며, 서태후는 김원철에게 있어 얼음송곳 같은 말 한마디를 던졌다.
“하여간, 나이 쉰이 넘어도 철이 덜 들었다. 차라리 옆에 박자옥이 그 친구가 있었을 때는 좀 나았건만.”
움찔, 이혼한 전처 이야기가 나오자 용수철처럼 축 처진 어깨가 위로 튕겨 나오는 그의 모습.
“무슨 그런 끔찍하신 말씀을. 제가 방랑벽 든 게, 다 자옥이 때문이라는 걸 모르시네.”
“핑계는. 쓸데없는 소리는 되었고, 테레비에 화면 연결이나 좀 허지. 그 UN인가 하는 것 말이야.”
할 일을 꼬박꼬박 잘하면서도 투덜거림을 잊지 않는 김원철. 서태후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먼저 간 탄약그룹의 선대 회장인 자신의 큰아들을 멍하니 떠올렸다.
늘 큰아들의 곁에서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며, 참모 역할을 마다하지 않던 김원철. 단순히 어린 시절부터의 친우 관계를 떠나, 서태후에게 있어 그는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고인(故人)이 된 큰아들에 이어, 이제는 자신의 손자의 고명대신 노릇까지 충실히 해내는 그였기에.
“하여간, 그렇게 손주 좋아하시는 양반이 평소에나 잘 허시지. 왜 늘상 무게만 잡으시나 몰러. 그것도 똥폼하고 같이.”
“시끄럽다! 테레비 연결 다 되었으면 어여 틀지 않고!”
“아, 예에.”
몇 차례 지지직거리던 화면은 이내 자리를 잡았는지, UN 총회의 연단 한복판을 비추었다.
세계지도를 형상화한 금속제 UN 로고, 그리고 연단 뒤편 초록색 석재로 장식된 벽.
뚜벅뚜벅, 화면 너머로 구둣발 소리가 들림과 함께, 아무도 없던 세계의 최중심부에 누군가가 서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온 대사였다.
“얼레? 순서가 짜장 애들이 먼저였나 보네. 일정이 좀 변했나?”
“혹,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게야?”
“아뇨. 꼭 그런 건 아니지만서도.”
사전에 예정된 것과는 달라진 연설 순서. 중국 대사는 무엇이 그리도 당당한 것인지 유독 자신감 넘치는 어투로 연설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 중국은 동남아시아의 번영과 평화를 위해, 말레이시아를 비롯한 주변국과 적극 공조해 나갈 것이며!
언뜻 듣기에 번지르르한 겉모양새. 그러나 그 얇은 껍질을 한 꺼풀 넘겨 드러난 뻘건 속살에는 그들 나름의 욕망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중화 문명과 이슬람 세계와의 적극적이고 유기적인 협력을 통해, 동남아시아 일대에 긍정적이고 선한 영향력을 끼칠 것을 천명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그 욕망의 포효를 앉은 자리에서 온전히 직시한 김원철.
워낙에 빛날 만큼 똑똑한 머리의 소유자여서일까?
곧바로 복잡한 역학 계산을 마친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맥 빠진 확신이었다.
자신이 곁에서 모시고 있는 한참이나 어린 주군에 대한 신뢰가 가득 담긴 확신이.
“흐음, 어쩌면 이게 더 나을 수도 있겠네. 짜장 애들이 저렇게 먼저 지르고 개망신당하는 게 야코가 팍 죽을 테니까.”
* * * *
처음에는 웬 장비나 하후돈 같은 양반이 저기 섰나 싶었다.
초한지 시절의 장수처럼 생겨 먹은 중국 대사. 타고난 외양처럼 우렁찬 목소리로 연설을 마친 그는, 형식상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자리에서 내려왔다.
특히나… 말레이시아를 비롯한 동남아 지역 이슬람 국가들의 지지를 받는 채로.
“상황 파악은 얼추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설계한 자가 자신임을 뽐내듯, 내게 한 발짝 가까이 다가와 입을 여는 제임스 왕 이사.
“암만 한 회장 당신이 동분서주한들… 이길 수 없는 판에서 몸부림치는 것은 헛수고에 불과할 뿐입니다.”
제임스 왕 이사 자신이 그린 거대한 퍼즐 그림. 그 마지막 조각이 끼워졌다는 사실에, 그는 감정이 격해진 모양이었다.
상기된 얼굴로 나를 향해 승리를 확신하는 그의 모습.
그러나….
“나는 이길 수 없는 판에서 싸우는 짓 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뭐라…?”
오로지 시선을 정면에 위치한 화면에 고정한 채,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입을 여는 나.
나는 알고 있다. 그가 그린 큰 그림, 그리고 그 그림에 맞춰 하나하나 이어 붙인 퍼즐 조각은 잘못된 무언가를 향해 경보음을 내고 있음을.
“잘 보십시오.”
손가락을 들어 화면을 가리킨 나.
이제부터… 나는 이어 붙인 퍼즐 뭉치를 토막 내고 새롭게 위치를 재조정할 것이다.
언뜻 보기에 잘 그려지지 않을 수 있는, 나만의 큰 그림. 나는 그 모든 것을 다시금 이을 비장의 퍼즐 조각 하나를 품 안에서 꺼내 그의 눈앞에 흔들어 보였다.
-사우디아라비아 특명전권대사 마호메트입니다. 그리고 제 옆에 있는 작은 소녀는… 위구르에서 왔다고 합니다.
이슬람 세계 전체의 역린을 건드릴, 위구르라는 퍼즐 조각을.
-연설에 앞서, 이제부터 신장 위구르 자치주 우루무치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증언을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중국 공안의 민간인 학살 영상부터 보고 가시죠.
* * * *
베이징 중난하이, 장 대인의 저택.
평소 중국 내무부장이 노괴의 저택에 방문할 때마다, 들리던 호통 소리는 오늘은 왠지 존재하지 않았다.
정원 연못에 비치는 원형 파동도, 그 위에서 놀라 날개를 푸드덕거리는 청둥오리의 움직임도 전부.
“잘했네. 자네도 이제 좀 일머리가 잡히나 보구먼.”
“…부족한 모습을 칭찬으로 채워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 대신, 푸근한 목소리로 전해오는 노괴의 칭찬.
보고서를 모두 읽은 장 대인은 붉은색 펜을 들어 세부 내용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바로 이 점, 나는 여기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구먼. 폐 군사 시설을 먼저 이용한다는 부분.”
생각보다 시일이 오래 소요되는 강제 수용소의 건립. 그러나 기존 폐 군사 시설에 약간의 개보수를 거친다면, 임시로 사용할 시설로는 그걸로도 충분했다.
“일단 잡아다 넣는 것이 가장 중요하거든. 괜히 생각할 시간을 주면 엉뚱한 반기를 드는 것이 사람이니.”
“시위 당시 체포된 이들의 성인 직계 가족 위주로 잡아들였습니다.”
“잘했네. 반동분자 핏줄은 쭉 이어지는 법인 게야. 뭐 추가로 보완하자면 이런 게 있겠구먼.”
직계 미성년자 가족까지 수용소에 넣으라는 베이징의 노괴. 점점 더 잔혹해져 가는 지시에 온건파에 속하는 내무부장은 속으로 괴로워했다.
‘이러면… 분명 차후에 탈이 단단히 날 것인데.’
그리고 그 순간, 벌컥 하고 열린 바깥 문.
오늘따라 내무부장은 무슨 신기(神氣)라도 있었던 모양이다. 창백한 얼굴로 급히 들어온 시동의 입에서, 그가 우려하던 내용이 곧바로 쏟아져나왔으니까.
“장… 장 대인! 급보입니다!”
“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 무슨 일이기에 이런 결례를 저지르느냐!”
노기를 띤 베이징의 노괴.
그러나 그 붉은 노기가 곧 허연 당혹감으로 바뀌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금 UN에서… 위구르 학살 건으로 난리가 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