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장님의 핵몽둥이-140화 (140/300)

140화음지에서 올라오는 이들(5)

무언가 권모술수 탓에 가족 간에도 숨이 턱턱 막힐 것만 같은 재벌가 집안 분위기.

그러나 여기도 나름 사람 사는 곳이기 때문일까?

어찌 보면 영 맹탕이다 싶을 정도의 가족 구성원들도 때때로 존재하기 마련이다.

특히나 심심하면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재벌가 개노답 3형제’ 소리를 듣는 데에 익숙한 김범호는 더더욱.

“아, 진짜. 이제 좀 사람같이 살겠네.”

여의도 K 호텔.

전등 불빛 아래에서 자그마한 플라스틱 쪼가리를 이리저리 비추어 보는 T그룹의 사고뭉치 김범호.

마치 해방 노비가 얻게 된 공명첩이라도 되는 양, 그는 살짝 눈물진 눈동자로 제 부친에게 새로 받은 신용카드를 바라보았다.

“오오… 아부지, 사랑해용.”

그리고 그 모습을 옆에서 보며 배꼽이 빠지도록 웃고 있는 전직 국방부 장관의 딸 함채은.

눈화장이 번지는 것만으로는 그 표현이 부족하다 여긴 모양이었다.

운동화 신은 발로 탁자를 퉁퉁 쳐대며 몇 분간 행위예술이 있던 후에야, 비로소 그 끅끅거리던 웃음소리가 멈추었으니까.

“아, 진짜. 김범호 너무 웃겨. 어떻게 저렇게 찐따미가 막 자동으로 뿜어나오는 거지? 연출 같은 것 하나 없이.”

“시끄러. 너도 알잖냐. 한서준 그놈 때문에 지난 세월… 이거 없이 내가 얼마나 거지같이 살았는지.”

서윤지와의 불륜 행각, 그리고 마약성 환각제 흡입.

T그룹 회장인 아버지에게 골프채로 거하게 두들겨 맞은 김범호는, 그날부로 모든 신용카드 사용을 금지당했다.

물론 그렇다고 기존의 씀씀이를 쉽게 줄이는 것은 퍽 어려운 일이었지만.

“주변에 빈대 붙어 다니면서 쓸 거 다 써놓고, 하여간 엄살은.”

“아, 그 얘긴 좀 그만하라니까.”

그렇기에, 몇 년 같은 몇 달 동안 주변 인맥들에게 각설이 취급 당하는 것을 면치 못했던 김범호.

탁자 위에 걸터앉은 함채은은 운동화 신은 발목을 까딱거리며, 그 모습이 재밌다는 듯 묘한 표정을 지어냈다. 누군가 기가 막힌 인물 하나를 떠올리며.

“생각해보면, 딱 김범호 엄살떠는 데에 물리치료사로 탑 티어 급은 그 검사 언니였는데 말이지.”

“박은지 검사? 그 미친 싸이코년?”

덤프트럭에 부딪힌 가드레일이라도 되는 양, 찌푸린 표정에 오만상이 깃든 김범호의 얼굴.

물담배 파이프를 입가에 가져다 대며, 그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옘병… 그 또라이 얘기는 꺼내지도 말라니까.”

“어머, 우리 범호 쫄았어요? 얼마나 쫄았는지 어디 팬티 속도 확인해볼까?”

“아, 진짜. 인간적으로 이러지 말자. 박은지 그 여자는 너도 겪어보면 딱 느낌이 온다고.”

또라이 검사 박은지.

자신이 분명 재벌가의 일원임에도 그녀는 일절 주눅 든다거나 눈치 보는 일 따위는 없이 수사에 임했다.

CCTV 바로 앞에서 끓인 물로 수증기를 만들어 화면을 뿌옇게 만든다든가, 그렇게 흐릿한 화면 속에서 약간 더 발전된 공권력을 행사한다든가 하는 식의.

“이년은… 검사 하기 위해 태어난 년이다. 그것도 천상 밑바닥 인생들 족치는 땅깨 검사.”

“아주 박은지 찬송가 납셨네.”

어느덧 조금 많이 길어버린 함채은의 머리칼. 굴곡진 갈색 옆머리를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꼬던 그녀는, 머릿속에서 무언가 떠오른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장난기 반, 묘한 감정 반이 섞인 얼굴로 화두를 던지는 함채은.

“그리고 박은지 혼자만 탑 티어라면 뭔가 좀 아쉽지.”

“뭐, 또.”

“하나 더 있잖아? 김범호 참교육시키는 일타강사 한서준 선생님.”

“그 말 왜 안 나오나 했다, 내가.”

-띠링!

김범호의 입에서 욕 한 사발이 시원하게 나오려던 찰나, 그의 휴대전화에서 뜨는 알람 소리.

전화가 걸려 온 것도, 문자 메시지가 온 것도 아닌 그 이상한 소리에 김범호는 후다닥 휴대전화를 꺼내어 그곳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야, 김범호. 뭐 하는데 지금?”

“가만있어봐. 배당 큰 거 한 방 터진다, 지금.”

“배당? 너 T 그룹 지분 하나도 없잖아?”

이제는 그룹 지분마저 일절 없이 오로지 현금과 부동산만 가진 김범호.

그렇기에 김범호가 말한 그 배당은 지분에 따른 배당이 아니었다. 사설 도박판에서 쓰는 배당의 용어였지.

“아흐… 아까버라. 이거, 이거 내가 역배에 깔았어야 했는데! 왜 인생을 매번 착실하게만 살아서!”

“지랄도 아주 풍년이네. 너 지금 하는 거 그거지? 사설 토토인가 하는 그거.”

소파에 전화기를 내팽개친 채, 속상해하는 김범호의 등짝을 운동화 앞코로 쿡쿡 찔러대는 함채은.

천외천(天外天)이라고 했던가.

철딱서니 없기로는 자신도 조선 팔도 통틀어 비빌 자가 없는 줄로만 알았건만, 아주 한술 더 뜨는 자가 있을 줄이야. 그것도 바로 코앞에.

“인간아, 철 좀 들어라. 나이 서른이 넘었는데. 됐고, 네 전화 오는 거나 좀 받아.”

“아, 몰라. 지금 3,000만 원 날아갔는데 뭔 철드네, 마네 같은 소리 하고 있어.”

“차라리 그 돈 그냥 나 줬으면, 내가 주변에 예쁜 애들 소개라도 해줬지… 어? 야, 잠깐만.”

김범호의 전화기에서 울리는 우렁찬 벨 소리가 잦아들자마자, 곧바로 함채은의 허벅지 언저리에서 느껴지는 진동.

주름진 치마 주머니에서 화려하게 치장된 휴대전화를 꺼내든 그녀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 우리 자기. 무슨 일이야?”

“자기…? 함채은 너 남자친구 생겼냐?”

질문 따위 상큼하게 무시하는 그녀. 전화기 너머로 무슨 말이 오간 건지, 함채은은 김범호 쪽을 바라보며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엄, 옆에 있지. 무슨 사설 토토에 3,000만 원 꼴았다고 삐져서 바닥에 누워 있어.”

“아, 진짜 쫌…!”

“엉. 바로 바꿔줄게.”

목젖에 손날을 가져다 대고는 ‘넌 뒤졌어. 히히히.’라며 묵음으로 말하는 함채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김범호가 전화를 바꿔 받았다.

“뭐야, 이건… 어, 여보세요. 나 그쪽 여자친구랑 아무 사이 아니니까 괜히 쓸데없이 오해하지 말고….”

순간 김범호의 달팽이관을 강타한, 익숙한 누군가의 목소리.

킥킥거리는 함채은을 눈동자에 담은 채, 식은땀을 흘리는 김범호는 간신히 입 밖으로 그의 이름 석 자를 내뱉었다.

“한서준… 회장님?”

그리고, 이어지는 변명의 행진.

“어, 어…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함채은이 장난친 거야. 무슨 토토 같은 소리를. 그거 불법인데 내가 왜 해.”

“하여간, 김범호 입만 벌렸다 하면 구라가 자동으로 나와. 아까 나한테는 역배에 안 걸어서 후회한다며.”

신이 나서 죽겠다는 함채은의 표정. 그러나 그녀 역시 예상치 못한 부분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말에 대답한 김범호. 그 뒤이은 대답을 들은 함채은의 얼굴은 썩은 폐타이어처럼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했으니까.

“박은지 검사…? 그 여자 소개해달라고? 거, 취향 참 독특하네. 도대체 왜?”

* * * *

“그것까지 자세히 알 필요는 없고. 일단 자리만 만들어 봐. 자연스럽게.”

가타부타 사족을 붙여대는 김범호. 굳이 이상한 대답에 반박하기도 번거로운지라 적당히 뭉개려고 했건만, 참 먹고 싶은 것도 많은 만큼 궁금한 것도 많은 모양이었다.

뭔가 이상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내게 질문을 던져대는 김범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내가 박은지를 왜 사랑해. 됐고, 소개팅 그런 거 아니니까 이상한 오해 하지 말고. 끊는다.”

후우, 탁자가 꺼지도록 내쉰 한숨.

어쩌면 <상하이 캐피탈>의 제임스 왕 이사나 청와대 안방에서 장기를 두는 대통령처럼, 머리 좋은 양반들 상대하는 편이 더 쉬운 것도 같다.

김범호나 함채은처럼… 예측 불가능한 럭비공 같은 사람들하고 말하다 보면 기가 쭉쭉 빨리는 느낌이니까 말이다.

“거, 참. 힘들게도 돌아간다. 그냥 박은지 검사 연락처 알아내는 거야 얼마든지 하잖어.”

“힘들게 돌아가야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응? 뭔 소리여?”

“또라이 검사라잖아요. 그런 사람한테 갑자기 대기업 회장이 전화해서 만나자고 하면 만나겠습니까?”

“하긴, 매니큐어 바른 가운뎃손가락 빳빳하게 세우고서 썩 꺼지라고 하겠지. 한쪽 눈은 윙크한 채로.”

아마 가운뎃손가락 세우는 모습조차 직접 보여주기는커녕, 휴대전화에 그런 사진 한 장을 전송할 가능성이 더 크겠지.

뭐, 상관없다.

일단 김범호를 이용해서 판만 깔았다 하면… 내가 생각하고 있는 대략적인 톱니바퀴가 찌그덩 소리를 내며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할 거니까.

탄약그룹의 이름에 먹칠하는 일은 피하면서도, 거대 조직폭력단체 하나를 대대적으로 박살 낼 톱니바퀴가.

“뭐, 그런 겁니다. 아무튼,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릴 것 같네요. 우리 한량 김범호 선생에게 나중에 치킨이라도 한 마리 사주던가 해야겠습니다.”

“김범호가 뭐라던디? 걘 어디 가서 사고만 안 쳐도 할렐루야 아니여?”

사고뭉치 김범호. 불륜과 마약에 이어 이번에는 불법 사설 도박까지 하는 모양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엄히 꾸짖든지 적당히 약점을 잡아 원하는 바를 이끌어낼 것이었지만… 이번만은 조금 다르다.

제법 그럴싸한 목각인형 역할을 해줄 것이 기대되기에.

“사고를 좀 치긴 했는데… 이번엔 예쁘게 쳐서요. 아무래도 앞으로 좀 더 친목을 다져야 할 것 같습니다.”

* * * *

“영장 때려요.”

뭔가 인생에 불만이 많아 보이는 박은지 검사.

그 모든 화살을 받아내는 사람은, 바로 앞 책상의 검찰 사무관 아저씨였다. 초등학생 애 셋에 마누라 배 속에 있는 아이까지 합치면 넷인.

“하… 검사님. 영장 말고 차라리 그냥 절 때리시죠….”

“내가 수사관님 때려서 어디다 써먹어요. 됐고, 얼른 영장이나 때리라니까.”

머리가 아픈 듯한 다둥이 아빠의 모습.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항변을, 이 이상한 검사 앞에서 애써 이어나갔다.

“그, 박 검사님… 분명 판덕술 의원 뇌물 수사 건, 부장검사님이 브레이크 밟으라고 하셨던 건데.”

“난 양발운전 하거든. 엑셀도 같이 밟을 거니까 어디 끝까지 가 봅시다. 오른발이 이길지 왼발이 이길지.”

도로교통법 따위는 시원하게 무시하는 발언을 이어나가는 박은지 검사.

최근 맡는 사건들은 변변찮은 것들이었고, 그럴싸한 사건들은 전부 위에서 칼질당한 상황.

폭주 기관차의 철제 엔진 문은 슬슬 그 한계를 다하여 경첩에 균열이 가고 있었다.

“영장 시원하게 때리고, 오늘은 슬슬 퇴근하자고. 맥주 한잔하고 자빠져 자면 딱이네.”

“아직 오후 4시인데….”

“몰라. 나 핸드폰 꺼 놓을 거니까, 혹시 위에서 전화 오거든 당신들도 받지 말고.”

“…….”

눈물이 앞을 가리는 검찰 수사관.

그에게는 이렇게 정신 나간 상사와 함께 세트 메뉴로 묶여 어디 지방으로 좌천당하는 미래가 기다릴 뿐이었다.

‘여보, 얘들아. 아빠가 미안하다….’

그 순간, 불쌍한 검찰 수사관 아저씨의 마음을 하늘이 알아주기라도 한 걸까?

요란한 벨 소리를 내며 울리기 시작하는 박은지 검사의 휴대전화.

“뭐여, 이건.”

절대로 먼저 연락할 리가 없으리라 여겼던 재벌가의 사고뭉치, 김범호였다.

“흐으, 범호야. 누나 많이 보고 싶었냐? 웬일로 다 전화를 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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