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장님의 핵몽둥이-142화 (142/300)

142화음지에서 올라오는 이들(7)

이전에 국방부 장관의 딸 함채은을 만나러 갔을 때에 이어, 두 번째로 듣게 되는 경쾌한 엘리베이터 알림음.

어째… 이곳에 올 때면, 늘 예기치 않게 낯선 여자와 낯선 만남을 갖게 되는 것 같다. 그것도 옆에 깍두기처럼 낀 김범호까지 함께.

“어, 왔어? 여기! 여기! 얼른 와 앉어.”

두피에 꿀밤의 부산물이라 할 법한 큼지막한 혹을 달고서, 나를 격하게 반기는 김범호. 큼직한 원을 그리며 흔드는 팔이 꼭 SOS 신호처럼 보인다.

참 이 사람도 언제 철이 들려나 싶다. 나이 서른이 넘었는데 뭐랄까… 저렇게 해맑아서야, 원.

“오래간만이네. 그리고.”

김범호를 향해 짤막하게 건넨 인사 한마디. 나는 곧바로 시선을 돌려 오른쪽에 앉은 여자를 바라보았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구불구불한 흑갈색 머리칼. 위로 꼰 다리 한쪽에 하이힐을 걸고는 발목을 까딱까딱 움직이는 모습.

진한 쌍꺼풀 아래 자리한 검은 눈동자 속에는 묘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

뭔가 잘못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뭐랄까 니트로글리세린 같은 여자?

“우리는 처음 보는 거네요. 박은지 검사님?”

“으흥.”

내민 손이 민망하게도 가만히 앉아 나를 스캔하듯 바라보는 그녀.

어색한 침묵이 그렇지 않아도 무거웠던 공기를 더욱 육중하게 만들 무렵, 마침내 박은지 검사가 입을 열었다. 꼭 무슨 가요 경연 프로그램의 심판관이라도 된 것처럼.

“세숫대야… 오케이, 합격. 허우대도 이만하면 나이스하고… 저 아저씨스러운 양복도 제법 수트빨 받는 걸 보니 옷걸이도 합격. 그렇다면 최종 심사 결과는….”

“저기, 박 검사님?”

“아, 그쪽은 잠깐만 가만히 있어 봐요. 헤이, 김범호? 앞으로 나와서 차렷.”

까딱까딱 움직이는 그녀의 손가락.

그 말을 도저히 거역할 엄두조차 나지 않던 모양이다. 엉거주춤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채, 박은지 검사의 앞에 차렷 자세로 선 김범호.

“뭐… 뭔데 그래요, 뭔데? 으악!”

짝, 소리가 날 정도로 그녀가 강하게 움켜쥔 김범호의 찐빵 같은 두 볼때기.

곧바로 간드러진 소프라노 목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우리 이쁜 범호! 누나가 나중에 피자 사줄까?”

“아, 명색이 재벌 2세한테 무슨 피자야… 아무튼, 둘이 잘해보든가 말든가. 난 잠깐 다른 방 가 있을 거니까.”

박은지 검사는 떠나는 김범호의 엉덩이를 두들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정말이지 캐릭터 하나는 기가 막히게 확실한 그녀.

괜히 이런 사람한테 말리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 쓸데없는 오해가 깊어지기 전에 결론부터 꺼내는 것이 가장 좋을 터.

어디로 튈지 모를 그녀를 잡아두기 위해, 나는 몸을 앞쪽으로 기울여 말을 꺼냈다.

“지금부터 좀 중요한 이야기를 할까 하는데, 목이 타서 말입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쿵, 나는 앞에 놓인 칵테일 한 잔을 단번에 모조리 마셔버리고는, 곧바로 거칠게 탁자 위로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다시 천천히 연, 내 두 입술.

“사실 제가 김범호에게 거짓말을 좀 하라고 시켰습니다. 여기 무슨 남녀 간 화합의 장은 다 검사님을 부르기 위한 낚시이고요.”

* * * *

“뭐라고…?”

잠깐 사고 회로가 정지된 듯한 박은지 검사. 저 하얗고 자그마한 얼굴에는 다채로운 표정이 깃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인상적인 판토마임이 끝날 무렵, 양주를 병째로 들이켠 그녀는 옷소매로 입술을 닦으며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옘병, 어쩐지 어디서 많이 본 세숫대야다 했어. 당신, 탄약그룹 한서준 회장 맞지?”

“맞습니다. 그래도 이젠 언론 몇 번 탔다고 알아봐 주시는 분이 제법 되나 봅니다.”

“됐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박은지 검사. 오른손에 하이힐을 거꾸로 쥔 그녀는 맨발로 복도를 걸어 다니며 큰 목소리로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야! 김범호! 너 이 새끼 지금 어디로 도망갔어…!”

“릴렉스, 릴렉스.”

“릴렉스는 니미럴. 아주, 재벌 회장이란 양반이 뚫린 입이라고.”

나는 머리 위에 뿔이 난 박은지 검사의 두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아직 화가 덜 풀린 모양인지 씩씩거리는 콧김을 내뿜는 것을 멈추지 않는 그녀.

“비록 여자로서는 행복하지 못하더라도, 검사로서는 행복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여기 나온 이유도 그거고요.”

별다른 생각 없이 아무렇게나 내뱉은 사탕발림. 내 설득이 먹힌 것일까? 아니면 허탈함과 어이없음이 밀려온 것일까?

거칠게 뒤통수를 긁던 박은지 검사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의자에 몸을 던졌다.

반쯤 피우다 만, 고급스러운 흑갈색의 쿠바산 시가를 입술에 문 채로.

“하, 씨… 내 팔자가 그럼 그렇지. 그래서, 재벌 회장이 나 같은 땅깨 검사는 왜 보자고 한 건데?”

“네, 그러니까….”

“아, 잠깐! 그 전에 혹시라도, 혹시라도 말이야.”

오른손 검지를 뻗어 내 입술에 가져다 댄 박은지 검사. 매캐한 회색빛 연기를 허공 위에 내뿜으며,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내게 그르렁거리기 시작했다.

“뭐 잘못한 거 있는데 덮어 달라, 힘 좀 써 달라, 이딴 개소리 지껄이면 당신 골로 가는 거고.”

피식,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온 모양이었다.

딱 예상한 그대로의, 꼴통이라 불려도 좋을 강골 검사.

성격은 조금 이상한 축에 속하지만… 오히려 이런 사람일수록 같이 일을 진행하기 편할 것이다.

그녀의 직관에 정확하게 꽂힐, 공동의 목표물 하나만을 던져 줄 수 있다면.

여전히 내 입술에 달라붙은 박은지 검사의 손가락을 천천히 떼어내며, 나는 오늘 만남의 본론을 꺼내었다.

“뭔가를 덮어 달라기보다는, 힘 좀 써 달라 쪽이 맞지 싶습니다만.”

“오늘 시간 낭비했네. 한서준 회장, 그쪽을 위해 쓸 힘은 당신네 회사 탈탈 터는 것 말고는 없거든.”

쿵!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그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자리를 떠나는 뒷모습을 향해 나는 짤막한 단어 두 개를 던졌다.

“일정파. 그리고 주괘율.”

진또배기 검사라면, 그것도… 저 정도 급의 사람이라면 도저히 물지 않을 수 없을 떡밥을.

“요즘 건설 바닥에서 조폭이 장난을 치더군요. 자꾸 음지에서 양지로 기어오르려고 발악을 하는데.”

핑그르르, 내 손목 회전에 맞추어 돌아가는 투명한 유리잔.

전등 빛을 받아, 그 안에 비친 상(相)은 뚜벅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를 향해 다시 다가오고 있었다.

“보니까, 저희 탄약그룹과 연결된 하청 업체에도 꼭 암세포라도 되는 양 진하게 퍼져 있지 뭡니까.”

“자세히 입 털어 봐. 뜸 들이지 말고.”

내가 던진 낚싯바늘을 문 박은지 검사.

그녀와의 힘겨루기는 재떨이에 수북하게 꽁초가 쌓일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 끝이 보였다.

주괘율과 일정파.

불법 사설 인터넷 도박으로 번 검은돈과 그 자금의 세탁기 역할에 코가 꿰인 탄약 인프라 건설 부문.

모든 제반 상황을 전해 들은 그녀는, 습관처럼 금속제 지포 라이터를 딸깍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쩐지, 요새 동네 성인 오락실 점포 수가 좀 줄어들었다 했더니만, 죄 인터넷 판으로 가셨다 이거구만.”

“한 2년 조금 넘은 것 같습니다. 태국에 서버 두고 운영한 지가.”

“참, 나. 이런 거 보면 떼돈 벌기 더럽게도 쉽네. 꼴랑 2년 만에 세탁기 돌리는 자금이 1,000억 원대가 넘는다는 것 아니여. 그래서.”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박은지 검사. 저쪽이나 내 쪽이나 검찰 고위층의 비호를 받으며 주괘율을 상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임을, 그녀 또한 알고 있는 눈치였다.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우리 잘나 빠진 회장님은.”

그리고 나는, 박은지 검사 그녀가 듣고 싶은, 그리고 내 쪽에서도 말하고 싶은 제안 하나를 던질 뿐이었고.

“돈세탁에 억울하게 코 꿰인 건 좀 빼주신다면, 조폭 때려잡는 일에 든든한 조력자로 탄약그룹만 한 게 또 없지 않겠습니까?”

“하여간 입 터는 재주 하나는 아주 그냥….”

딸깍, 소리와 함께 휘갈겨지기 시작한 싸구려 볼펜. 나를 향해 내민, 박은지 검사의 거친 손에는 네모난 종잇조각 하나가 들려 있었다.

서로의 이해가 합치된, 어떤 상징과도 같은 종잇조각이.

“내 명함. 거기 정식으로 적힌 번호 말고, 방금 내가 볼펜으로 써준 번호로만 연락하쇼.”

* * * *

“대장 늑대는 밑에 부하 늑대들을 믿을 수가 없었데요. 동굴의 고기를 언제 훔쳐 가도 이상할 게 없었거든요,”

사람을 수도 없이 죽인 손.

도무지 씻겨지지 않을 피비린내가 진하게 묻은 주괘율의 두 손에는, 천으로 만든 인형이 들려 있었다.

조직폭력배에 대한 수사기관의 감시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간혹 보육원을 방문해 봉사활동을 하는 주괘율.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들 앞에서, 그는 피 묻은 양손을 움직여 어설픈 인형극을 계속해나갔다.

“그래서… 대장 늑대는 부하 늑대들을 싸움 붙이려고 했답니다. 서로서로 감시하고 서로서로 힘을 합치지 못하게.”

대장 늑대 아래 있는 두 부하 늑대, 훈이와 낙구.

주괘율은 알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의 보이지 않는 미묘한 갈등을.

불법으로 만든 검은돈. 두 사람은 그 세탁 과정에 있어 핵심 그 자체였다. 그들이 마음만 합치된다면, 주괘율에게 위협이 될 수도 있을 정도로.

“그러면 두 부하 늑대가 싸우는 동안, 동굴 안의 맛있는 고기는… 전부 대장 늑대가 먹게 되었답니다.”

살벌함으로 점철된 인형극의 막이 내리고, 보육원을 떠나 차에 올라탄 주괘율.

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한 그는 아직도 인형의 감촉이 손에 남은 모양이었다.

훈이와 낙구, 두 부하 늑대의 감촉이.

“이봐, 처남. 태국은 어찌 돌아가고 있나?”

주괘율 자신의 제일 중요한 심복인 처남. 유일하게 전체 그림을 공유하는 그는 운전대에서 손을 떼고는 잠시 차량을 멈추어 세웠다.

“미친 듯이 성장 중입니다. 몇 년 안에 어지간한 중견기업 매출액 수준까지도 나올 정도로요.”

“앞으로 돈세탁이 더 힘들어지겠군.”

“낙구가 낸 건설 쪽 아이디어로는 조만간 한계가 오지 싶습니다. 물론 그것도 지금은 상당히 훌륭한 성과를 내고 있지만 말입니다.”

인형극의 잔향이 손에 진하게 밴 모양이었다. 낙구라는 이름이 나오자 생각거리가 주어진 것처럼 미간에 주름이 잡힌 주괘율.

“낙구 그놈은 아이디어는 잘 내는데, 실행력이 달리지. 이번 일도 훈이가 총알받이들 동원한 게 크고.”

“그 또한 맞는 말씀이십니다.”

다소 불편하고 꼬리가 길게 잡힐 위험이 있는 건설이라는 포장지. 주괘율은 좀 더 발전된 돈세탁 방식을 바라고 있었다.

번거로움 따위 없이, 단 한 번에 큰 금액을 합법적으로 털어낼 수 있는, 가급적이면 전산화된 형태로의 방식을.

“음?”

그리고, 주괘율에게 있어 그 방식을 찾아야 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는 순간이 다가왔다.

그의 귓가에 가까이 다가와 울리는 불길한 문자 메시지 알림음. 화면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쓰여 있었다.

더는 건설 분야에서 손장난을 칠 수 없음을 알리는, 긴박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문구가.

-큰형님, 지금 탄약 인프라 측에서 미친 짓을 하려고 합니다! 저희 측 돈세탁 프로세스가 아예 먹히지 않을 만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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