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장님의 핵몽둥이-144화 (144/300)

144화세탁기의 전원을 끊는다면(2)

판은 도드라지게 벌여야 했다.

이곳 공사판에서 벌일 일련의 연극이 다소 작위적인 티가 나더라도 말이다.

“바로 올라갑시다.”

아니, 어쩌면 그 작위적인 티에 더 열광할지도 모른다. 박은지 검사라는 사람의 캐릭터를 보았을 때, 그녀는 자신의 검사 프라이드에 오점이 가는 것을 극히 꺼릴 터.

그렇기에 이번 주괘율의 돈세탁에 탄약그룹의 그림자조차 얽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과하다 싶을 연기가 필요할 것이다. 마치 지금처럼.

“오케이… 아니지, 예압! 회장님!”

아직 공사가 채 마무리되지 않아 날것 그대로의 콘크리트 상태인 투박한 계단.

그 계단을 하나하나 올라가며, 김원철 아저씨는 내게 말을 높여 대답했다.

그저 지금 이곳이 업무와 관련한 공적인 자리여서만이 아니다.

나와 김원철 아저씨의 바로 뒤에서, 대포만 한 카메라를 어깨에 짊어진 경제신문 기자까지 있었기 때문에.

“회장! 한서준 회장인가 하는 놈아가 직접 하이바 쓰고 이리로 왔다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기라도 하는 양, 다급함이 그대로 묻어나오는 공사 현장소장의 목소리.

그 목소리와 함께 쿰쿰한 소주 냄새가 나는 쪽으로 발걸음을 향하니, 그곳에는… 참 뭐라고 해야 할까?

개판, 딱 명분의 방아쇠로 삼기 좋은, 술판인 현장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어어… 그러니까 형님, 탄약그룹의 그 한서준 회장이라는 사람이 설마 여기….”

“그래! 바로 여기! 그 뺀질뺀질한 기생오래비같이 허연 얼굴을 해가…!”

하던 말의 허리를 자르고는 곧바로 뒤 목에 난 솜털을 쭈뼛 세운 현장소장.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등 뒤로 느낀 모양이었다.

그는 고장 난 목각 인형처럼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기생오래비… 아니, 아니. 회장님?”

“회장은 맞는데, 기생오래비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일단은.”

주위를 둘러보니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검은색 비닐봉지에 들어간 소주병. 뒤집힌 종이 박스 위에 아무렇게나 차려진 새참.

널브러진 공사 자재는 정리된 모습 따위 일절 보이지 않았다. 마치 작금의 탄약 인프라 국내 건설 부문의 관리 능력처럼.

등 뒤에서 경제신문 기자의 카메라 플래시가 몇 차례 터지고, 탄약그룹 홍보팀 직원이 무언가를 충분히 기록하고 난 후, 나는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이번 일의 신호탄이 될 발언을 하며.

“탄약 인프라 건설 부문. 본부장급부터 시작해서 아래 임원들까지, 전부 여기로 집합시키세요. 지금, 당장.”

* * * *

“뭐여, 무슨 일인데 이 난리여. 안 그래도 바빠 죽겠구만.”

황량한 콘크리트 색의 짓다 만 건물 안.

골프를 치다가 부랴부랴 온 것인지, 다채로운 빛깔의 옷차림으로 현장을 찾은 탄약 인프라 건설 부문의 김 전무.

그는 입이 댓 발로 나온 채로 옆에 박 상무에게 푸념을 늘어놓았다.

“거, 노가다 뛰는 양반들이 일하다 반주 한 사발 마시는 거, 그 뭐 큰 문제라고 이렇게 액션을 까는 건지.”

“그러게 말입니다. 아주 해외에서 연타석 홈런 몇 개 터트리더니만, 회장 본인이 무슨 하느님인 줄 아나 봐요.”

“끄응, 하청 업체 책임자도 오게 했다지?”

“흑룡건설 쪽 사람들은 무조건 온답니다.”

목소리를 낮추라는 듯 입술 위에 길게 편 검지를 댄 김 전무.

주변에 경제신문 기자와 탄약그룹 본사 홍보팀이 그들 가까이 다가왔기에, 그들은 최대한 말조심을 해야만 했다.

그들이 다른 쪽으로 지나가고 나서야 김 전무는 작게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옘병. 거, 밑에 인간들 앞에서 가오 하나는 제대로 상하게 생겼네.”

“가오만 상하면 다행이고… 분명 책임을 묻지 않겠습니까?”

“뭔 책임, 반주 먹는 거 못 막은 책임?”

“아니, 아니. 사실 술이야 핑계고… 진짜 개판은 따로 있잖습니까. 이번에 오피스텔 청약, 중간에 인수자들 죄 터진 것.”

“아아.”

그제야 뭔가 이해가 된다는 양, 손바닥으로 자신의 이마를 탁, 하고 치는 김 전무.

그는 골치가 아픈 듯, 호주머니에 든 담뱃갑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하… 갑자기 중도금 없다고 1,000명이 배 째라는데 뭐 어쩌라고.”

“그러니까 더 망했다, 이겁니다. 그거 빵꾸난 분양권 인수는 흑룡건설이 하고, 그쪽 관계자도 여기 부른다는 건. 딱 사이즈가 나오지 않습니까?”

“…그치들 보는 앞에서 우리들한테 책임을 물으시겠다.”

“대충 그런 알고리즘 아니겠습니까. 보면, 회장 그 어린 친구도 참 영악해요.”

나름 자기들만의 그림을 그려가며 이 상황을 바라보는 탄약 인프라 국내 건설 부문의 임원들.

그들이 만지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한낱 코끼리 다리에 불과했다.

그들에게는 크게 느껴지는, 그러나 실상은 자그마한 편린에 불과한 것. 그 전체 눈덩이의 생김새가 어떤지 알고 있는 사람은 이 자리에서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소수의 핵심 인물 가운데, 가장 중앙에 있는 사람이 저 멀리서부터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 온다. 온다. 박 상무, 회장님 오신다.”

“흑룡건설 쪽도 왔네요. 그런데… 저기, 저 중늙은이.”

오른쪽 팔에 마치 문신처럼 검은색 용 로고를 칭칭 감고 온 사람들.

험악한 인상을 한 그들 정중앙, 거기에는 반백의 머리칼을 한 누군가가 느릿한 발걸음으로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 표정만큼은 당장이라도 누군가를 죽일 듯한 얼굴을 한 채로.

“저번에 한 번 봤을 때, 분명 직함이 따로 없었던 것 같은데….”

* * * *

내 앞에 도열한,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의 모습. 탄약 인프라 건설 부문의 본부장부터 이름 모를 말석의 임원까지.

긴장된 모습이 역력한 그들의 얼굴은 내 눈동자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내 시야에 들어온 이는 단 한 사람. 남들 사이에 숨은 채, 부리부리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는 자. 조직폭력단 일정파의 수괴 주괘율 뿐.

‘눈매 한번 매섭군. 실제로 보니 사진보다 더하다.’

이번 오피스텔 공사를 통해 1,000억 원이 넘는 검은돈을 세탁할 예정이었던 주괘율.

그의 매서운 눈에는 일견 불안감이 깃들고 있었다. 이 자리에 선 내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결정을 하느냐에 따라, 그의 향후 행보가 큰 폭으로 바뀌게 될 테니.

“급한 호출에도 이 자리에 참석해주신 임직원 여러분, 그리고 협력 업체 관계자 여러분.”

“…….”

그리고 지금, 나는 살기를 내뿜고 있는 그의 거센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마치 맹수를 사냥하기에 앞서, 기선을 제압하는 것처럼.

“이 현장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개판입니다.”

질책의 탈을 씌운, 선전포고에 가까운 발언.

나는 검은색 비닐봉지에 담긴 소주병을 하늘 높이 들어 세우며 하던 말을 마저 이어나갔다.

“작업 도중 술을 마시는 인부들, 어지럽게 널브러진 공사 자재들… 그렇기에, 발생한 대규모 분양 중도 해지 사건들까지.”

주홍빛에서 붉은빛으로 바뀐 주괘율의 얼굴. 거세게 앙다문 그의 아랫입술에서는 얇은 핏물이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었다.

“따라서, 저희 탄약그룹은 해당 공사의 총책임자로서, 해야 할 모든 책임을 지고자 하는 바입니다.”

순간 현장에 찾아온 정적.

미풍에 흩날리던 흙먼지마저도 가라앉은 상황 속에서, 여기저기 웅성거리던 소리는 잦아들고 오로지 침묵만이 공간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천천히 입술을 뗀 나.

“책임 경영, 반드시 이루어 나가겠습니다. 그렇기에… 중도 해지된 오피스텔 분양, 협력 업체에 떠넘기지 않겠습니다.”

내 입에서 내뱉은, 한 자 한 자의 발언을 들은 모두의 표정은… 각기의 사정에 따라 다채롭게도 일그러져갔다.

“지금 회장님이… 무슨 말을 하신 거지? 그럼 그 빵꾸 터진 걸 누가 메꿔?”

아직도 상황 판단을 제대로 못 하는 임원부터.

“한서준 이 개 같은 놈이…!”

허리춤에 찬 칼자루를 만지작거리며 나를 죽일 듯이 바라보는 주괘율의 모습까지.

모두가 눈을 감고 어렴풋하게 만지던 코끼리 다리. 나는 연이은 말 한마디로 안대를 쓴 그들의 눈을 뜨게 해 주었다.

내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그리고 그 그림에서 보일… 앞으로의 풍경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모두.

그리고 그 그림이 가리키는 것은… 돈세탁은, 그것도 감히 탄약그룹의 지붕 아래에서 벌어지는 외부의 돈세탁은 절대 좌시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제 어설픈 장난질은 전부 끝입니다! 모든 미분양 건은, 오롯이 탄약그룹 본사가 자체적으로 해결할 것을 이 자리에서 밝히는 바입니다!”

* * * *

쾅! 아스팔트 도로 위에 내던져진 하얀색 안전모.

안전모의 수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는 분을 삭이지 못한 주괘율의 거센 발길질이 연달아 이어졌으니까.

“후우… 낙구, 이리 가까이 오너라.”

거센 숨을 들이쉬며 달아오른 흥분을 삭이는 주괘율.

담배 석 개비를 연달아 태우고 나서야, 그는 분노로 떨리는 손을 잠재우는 데에 성공했다.

“큰형님….”

절대 흥분하는 일이 없던, 평소와 정반대인 제 주인의 모습.

겁먹은 아이처럼 쭈뼛대며 다가간 낙구. 순간, 주괘율의 허리춤에 찬 칼은 낙구의 목젖 바로 앞을 향했다.

“네놈은 알고 있었던 건가?”

“아… 아닙니다, 큰형님! 어찌 제가 그런…!”

“탄약그룹 회장이라는 놈이 고작 1,000억짜리 공사판에 직접 나타났다! 그리고 그놈이 하는 모든 말이 나를 향해 날을 세웠고!”

칼날 끝에 이슬처럼 맺힌 핏방울.

의지와 관계없이 꿀렁거리는 목젖에 아릿한 통증이 깃듦과 함께, 주괘율은 낮은 목소리로 낙구에게 물음을 던졌다.

“막대한 시간을 들인 돈세탁 계획. 그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이 모든 것이 정말 우연의 일치일까?”

“…정황이 수상하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다만.”

어느덧 초겨울로 접어든 계절. 하얀 김이 나온 만큼 거친 숨을 토해낸 낙구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쭉 편 손바닥을 내밀었다.

“적어도 결백을 입증할 기회만은 주셨으면 합니다.”

“결백? 네깟 놈이 무슨 수로 결백을 입증하려는가!”

무릎을 꿇은 채 한쪽 손은 쭉 뻗은 낙구. 새끼손가락 하나만을 내민 손은 사시나무 떨리듯 마구 떨리고 있었다.

“…건달의 방식은 이것 외에는 없지 않겠습니까.”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는 주괘율의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만을 바라보는 낙구.

댕그렁, 그 순간, 바닥에 칼이 떨어진 듯한 둔탁한 쇳소리가 그의 귓가를 울렸다. 극도로 냉엄해진 주괘율의 목소리와 함께.

“어디, 직접 잘라 보거라. 그 정도 각오는 되어 있을 터.”

떨리는 오른손으로 간신히 칼을 집어 들고는 제 손가락을 향하는 낙구.

곧이어, 앙다문 입에서 참아왔던 신음이 비릿한 피 맛과 함께 서서히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끄윽…!”

고통스러움 속에서 마무리된 의식. 가까스로 결백을 입증한. 아니, 어쩌면 그저 닥친 위기를 넘겼음에 불과한 낙구의 왼쪽 손이 조금 가벼워졌다.

그리고 그 가벼워진 손에 올라간 주괘율의 말 한마디.

“이번 일의 총책임자는 낙구 네놈이다. 엎어진 것에 더하여 새로운 돈세탁 방식까지 생각해 오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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