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고(2)
어두운 밤. 아니, 외려 새벽에 가까운 시간.
차갑게 내려앉은 암흑 속, 꺼진 불로 어두컴컴하던 사무실 유리창에 반짝, 작은 불빛 하나가 바깥으로 새어 나갔다가 이내 사라졌다.
“시벌… 깜짝이야. 뭐 이렇게 빛이 밝아.”
촤르륵, 천으로 만든 커튼이 쳐지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진 땀방울.
손전등을 입에 문 낙구는 주괘율의 사무실 안에서 무언가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렇지… 큰형님이. 아니, 아니. 주괘율, 그 뱀 같은 인간이라면 비밀 금고 하나쯤은 안 갖고 있는 게 이상하니까.”
송나라 시대에 그려진 산수화.
그 큰 그림을 액자째로 벽에서 떼어내니, 낙구의 눈에 들어온 희미한 틈새.
끼이이익, 플라스틱판을 그 틈으로 넣어 힘껏 당기자 둔탁한 소리와 함께 비밀 금고의 겉 문이 열렸다.
“찾았수다. 얼른 작업해 주십쇼. 수사관 나으리.”
“어디 보자… 아아, 구형 기계식 금고구먼. 보안장치도 표준 형식이니 딱히 어렵지는 않겠네. 한 20분이면 되니까 망이나 잘 보고 있으라고.”
“후딱 부탁 좀 할게요. 이거, 수사관 나으리도 공식으로 영장 때려서 하는 것 아니잖수. 빨리빨리 하고 나갑시다.”
“달건이 놈이 쓸데없는 소리는… 시끄럽고, 방해되니까 저만치 떨어져나 있어라.”
박은지 검사의 명을 받고 비공식적으로 파견 나온, 아이 넷 딸린 검찰 수사관.
낙구는 청진기를 귀에 꽂은 그가 연신 딸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는 모습을 지켜보며 팔짱을 끼었다.
그러고는, 팔뚝 어딘가에 닿았는지 시큰하게 아려오기 시작한, 새끼손가락의 잘려 나간 단면.
시릴 정도로 아픈 그 손가락 끄트머리를 거머쥐며, 낙구는 멍하니 며칠 전 있었던 일을 상기하기 시작했다.
인천항, 짠 내 섞인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그 횟집에서 있었던 일을.
* * * *
‘낙구라고 했던가? 직접 얼굴 보고 이야기하니 좋네요, 이렇게… 정신이 번쩍 들게 바닷바람도 맞으면서.’
그날, 인천항 횟집에서 낙구의 귓가에 들린 목소리.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젊은 탄약그룹의 회장이라는 자.
그러나, 그의 목소리에는 흔히 그 나이대의 남자들이 갖는 호기나 치기 어림 따위는 들어가 있지 않았다.
오히려, 마치 바둑 대국을 두듯 하나하나 신중하게 돌을 두어가며 자신을 서서히 압박하듯 말을 하던 모습.
그런 압박감 때문일까?
인내심이 바닥난 낙구는 문맥과 상관없이 곧바로 자신이 준비해온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공사 도중 음주라니. 확실히 저희가 잘못 관리를 한 것이 맞습니다. 그렇기에 저희 쪽에서 다른 방안을 가지고 온 것이 있으니….’
‘아니, 아니. 죄송한데 말 좀 끊을게요. 지금 낙구 씨가 착각을 하고 계시는데.’
무언가 잘못 꿰인 듯한 첫 단추.
스산하게 손가락 끝에 내려앉은 불길한 기운 탓에, 천천히 고개를 든 낙구는 그만 긴장이 턱 하고 풀리고 말았다.
뒤이은 그의 말 한마디가… 모든 상황을 꿰뚫어 보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기에.
‘흑룡건설.’
‘……!’
‘그게 조폭 돈세탁 회사라는 걸, 지금 내가 모르고 당신을 부른 것 같습니까?’
‘그걸 어떻게….’
‘다 아는 수가 있습니다. 경기 남부에서 자리 잡은 일정파라든가 불법 사설 도박 사이트라든가.’
조폭. 그리고 돈세탁.
낙구 자신이 그토록 장막 아래 꽁꽁 감추어 두었다 여긴 모든 것들이… 단 한 순간에 수면 위로 올라온 상황.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이 떨리는 낙구. 그의 눈에 물컵에 든 액체를 들이켜고는 미간을 찌푸리는 탄약그룹의 회장이 들어왔다.
물을 꼭 술을 마시는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크흐, 뭐, 논할 것이 산더미긴 한데, 일단 지금 낙구 당신한테 급한 것은 이거 아닌가 싶네요.’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허공 위 손가락 두 개를 펼치는 탄약그룹의 회장.
방금 전. 조폭과 돈세탁이라는, 낙구의 그림자 속 치부를 들춘 그였다. 그리고… 지금, 그 치부 아래 깊이 숨겨둔, 감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심연이 물속에서 끌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주괘율, 그리고 훈이.’
‘……!’
‘두 사람이 당신을 솥단지에 집어넣으려는 문제. 내 말에 틀린 부분이 있습니까?’
틀린 부분이… 없었다.
너무나도 명징하게, 말이라는 단도로 후벼 파인 낙구 자신의 가슴팍.
그렇기에 한참을 말없이 늘어뜨린 고개. 낙구가 다시 고개를 든 것은, 탄약그룹 회장 옆에 앉아 이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한 여자의 말이 있고 난 후였다.
‘흐흐흐. 낙지 이 새끼야, 딱 걸렸어. 여기선 암만 옷을 꽁꽁 싸 입어도 싹 다 발가벗겨지는 것이여.’
‘저기, 낙지가 아니라 낙구, 낙구.’
‘낙지든 낙구든. 이목구비 관상이 꼭 꼴뚜기처럼 생겼으니 낙지면 뭐 어떻수? 아무튼, 읏차.’
낙구의 귀에 들려오는 당황스러운 대화.
물론 더 당황스러운 것은 뒤이은 상황이었다.
가슴팍에 달린 명찰 목걸이에서 플라스틱 명찰을 빼 낙구에게 내던지는 박은지 검사.
‘크흐, 아가야. 누나는 대충 이런 분이셔. 분위기 파악 좀 하자. 오케이?’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검사!’
‘에헤이, 거, 사내놈이 쫄지는 말고. 요거 봤으니 대충 판때기 돌아가는 건 잘 알 테고. 그럼 우리 낙지는 용역 하나만 뛰어주면 될 것이여.’
운만 띄운 것으로 만족한 걸까?
사전에 합의가 된 건지 턱 끝으로 옆에 앉은 탄약그룹 회장을 가리키는 박은지 검사.
‘뭐, 여기 검사님이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정말 쉬운 일 하나만 하면 되니까요.’
자그마한 술잔을 잠시 기울인 탄약그룹의 회장.
충분히 뜸을 들인 그는 낙구에게 무언가를 내던지며 입을 열었다.
‘주괘율의 사설 도박 사이트에 관한 모든 정보. 정확히 태국 어디서 무얼 하는지, 돈세탁은 어찌하는지, 조직 구성은 어떻게 되는지 등등.’
‘…….’
말 그대로 발가벗겨진 듯한 느낌에 사로잡힌 낙구.
한서준과 박은지. 두 사람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조직의 자금줄이 어딘지, 그리고 그 자금을 어떻게 끌어올려 깨끗한 돈으로 세탁하는지까지를.
‘그것을 여기 박은지 검사님과 내게 예쁘게 정리된 물증과 함께 넘기면.’
그리고, 그제야 낙구의 눈에 들어온 초록색 여권 하나.
모든 것을 하얗게 잊고 새 출발 하라는 듯, 도장 한 점 없이 깨끗한 여권 사이에는 티켓 한 장이 끼어 있었다.
‘인천항에서 중국 가는 배편입니다. 이거면 다른 쪽 손가락이 잘려 나갈 일은 아마 더 없지 않겠습니까?’
* * * *
성남 구시가지, 오피스텔 건물.
창문을 시커멓게 칠한 봉고차에 탄 훈이. 평소와 다른 모습의 그는 입에 담배 한 개비를 물고 있었다.
푹 눌러쓴 야구모자와 목 끝까지 지퍼를 올린 저지. 붉은색 페인트가 칠해진 목장갑과 천으로 된 마스크까지.
-똑똑똑!
매캐한 담배 연기로 차 안이 뿌옇게 가득 찰 때쯤, 차창을 가볍게 두들기는 소리.
“훈이 행님, 확인 끝났십니더.”
“어떻게, 진입이 되겠드나? 퇴로도 확인했제?”
창문 틈 사이로 훈이의 후배로 보이는 조폭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경비 영감 하나 빼고 다 퇴근했심더. 그마저도 노인네가 힘에 부치는지 고마 자빠져 자고 있네예.”
팔을 돌려 손목시계를 보니 시간은 새벽 3시.
고개를 끄덕인 훈이는 조수석에 놓인 공구함을 잡고는 차에서 내렸다.
검은색 공업용 테이프로 손잡이 부분을 칭칭 감은 회칼과 대용량 비닐봉지가 담긴 공구함을.
“후우… 시작하자. 5분 내로 처리 끝내고 뒤처리까지 해야 한데이.”
“예, 행님.”
낙구의 집은 4층.
훈이와 그를 따르는 조폭은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끔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가기 시작했다.
“…….”
공구함을 꽉 쥔 손에 점점 맺히기 시작한 땀방울.
며칠 전, 훈이의 새로운 돈세탁 방법인 비트코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주괘율. 그는 훈이에게 조직의 총괄 역할을 맡기며 이렇게 말했다.
‘낙구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지. 앎이 지나치면 곧 무언가를 잉태하는 법이다. 침묵과 폭로라는 쌍둥이 형제를.’
‘…….’
‘그리고 보통의 경우에는, 침묵이라는 놈은 그리 쉬이 태어나질 못하는 법. 낙구 또한 그러할 것이고.’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를 얼굴에 걸고 섬뜩한 살기를 내뿜던 주괘율. 잘린 손가락이 든 나무 상자를 가리키며 그는 말 한마디를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불쌍한 손가락이 밤이면 참 외롭다는구나. 주인도 같이 묻어 달라고 하니, 이를 어쩌겠니. 훈이 네가 소원을 들어줘야겠어.’
그러고는 뒷짐을 진 채 홀로 사라져 버린 주괘율의 모습.
그때의 그 망령 같은 그림자를 따라가듯, 지금 훈이는 한 걸음 한 걸음씩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눈에 들어온 문 앞.
“404호. 여기입니다, 행님.”
“도어락 열리는 소리 안 새어 나가게 헝겊으로 감싸고 시작해라.”
떨리는 손가락으로 비밀번호를 누르기 시작한 후배 조폭.
도어락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은 마치 도깨비불처럼 사람을 홀리는 재주가 있는 모양이었다.
이미 훈이의 손에는 공구함에서 꺼낸 회칼 한 자루가 단단히 쥐어져 있었으니까.
“곱게 곱게 가자… 낙구 이 새끼야.”
신발도 벗지 않고, 구둣발 그대로 집안에 들어간 훈이.
평소 습관대로라면, 분명 낙구는 거실 TV를 틀어놓은 상태로 소파에 반쯤 누운 상태일 터.
그러나.
“훈이 행님… 침실에도 안 보입니더. 화장실 문도 다 열려 있는데예.”
“구석에 처박히가 애새끼마냥 숨어있을 수도 있다 아이가. 니 옷장도 싹 열어 봤나?”
“하모예. 안에 아무것도 없심더. 옷이고 뭐고 싹 비아 있는 것이… 아무래도 낙구 금마, 눈치 까고 튄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예.”
부득이하게 불을 켜자 한눈에 들어온 전경.
너무나도 깔끔히 정리된, 휑하니 빈 집안에 훈이는 허탈한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낙구 이 미꾸라지 같은 새끼가….”
“일단 철수부터 하는 거이 맞지 않나 싶습니더. 바로 큰행님께 보고도 드려야 하지 않겠십니꺼?”
그 말에 차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억누른 훈이.
어차피 낙구가 한국 땅에 있는 한, 쉬이 일정파의 감시망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기에 훈이는 차분하게 후배의 의견을 따랐다.
“음? 뭐고, 이 부재중 찍힌 건수는?”
다시 돌아온 차 안. 조수석에 아무렇게나 놓인 훈이의 휴대전화. 어찌나 전화통에 불이 붙었던 것인지, 수십여 통의 부재중 통화가 찍힌 휴대전화는 배터리가 절반 밑으로 떨어져 있을 정도였다.
-부재중 전화, 주괘율(23통)
“이건… 무신 일이 나도 단단히 난 긴가 본데.”
그리고 그 순간, 번쩍하며 불이 들어온 휴대전화.
불안한 붉은 빛을 내뿜는 화면 속에는 24통째 전화를 건 주괘율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예, 큰행님. 훈이입니더.”
-어디냐! 훈이 너, 지금 뭣 하고 있는 게야!
“낙구… 정리하러 잠깐 구성남 쪽에 왔심더. 안 그래도 전화 드릴라켔는데, 머선 일이십니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