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고(4)
-다음 소식입니다. 태국 방콕에서 불법 사설 도박 사이트를 운영하던 일정파 조직원 10여 명이 검찰에 검거되었습니다.
-이들은 사이트를 구축한 후, 프로그래머 3명을 살해한 혐의까지 함께 받고 있는데요, 검찰은 현지 태국 경찰과 협조하여….
쾅! 갑자기 찾아온, 귀를 찢는 듯한 거센 굉음.
지지직 소리를 내던 낡은 브라운관 TV에서는 더 이상 그 어떤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화면을 향해 유리 재떨이를 집어던진 주괘율이 붉게 상기된 얼굴을 한 채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었기에.
“…어찌 된 일인 게야! 지금 이 상황이 대관절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냐고!”
당혹감과 두려움으로 흔들리는, 주괘율의 꽉 쥔 두 주먹. 그의 오른팔인 처남 또한 반쯤 망연자실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태국 조직이… 꼬리를 잡힌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왜 그걸 사전에 못 막았냐는 것이다! 경찰, 검찰, 국세청에 국정원 놈들까지. 내 그렇게 윗선에 돈을 뿌렸거늘!”
“맨 아래 실무급 검사 하나가 독단적으로 행동했다는 것이… 끄나풀들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거기다가.”
식은땀 탓에 콧잔등에서 내려가려는 안경을 손가락으로 올린 주괘율의 처남.
물증이 부족한, 그러나 심증만으로도 확신이 든다는 듯, 그가 천천히 두 입술을 떼었다.
“무언가… 그 검사 계집년 하나를 뒤에서 지원해준 유력가가 있다, 라는 설이 있습니다.”
“뒷배가 있다…?”
박은지 검사를 지원해준 뒷배.
그것은 분명, 같은 검찰 내부의 사람은 아닐 것이었다.
외부에서 검사를 움직일 수 있을 만큼의 힘이 있고, 주괘율 자신과 직·간접적으로 엮인 이.
“설마….”
언제 가까이 다가온 것인지, 안개처럼 다가와 주괘율 자신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린 묘한 기시감.
그 기시감은 한 남자의 얼굴을 꼭 닮아 있었다.
몇 주 전, 분당 외곽의 오피스텔 단지에서 보란 듯이 연단 위에 올라 비수를 꽂은 탄약그룹 회장의 얼굴을.
“그 핏덩이 놈이? 분명… 손익을 따지자면 애매모호한 위치에 있는 자인데….”
“형님? 혹시 무슨 문제라도…?”
“아니다, 신경 쓰지 마라. 우선, 벌어진 상황부터 정리하는 것이 먼저이니.”
고개를 거칠게 가로젓고는 품속에서 담뱃갑을 꺼내는 주괘율.
연거푸 세 개비를 줄지어 피운 담배꽁초는, 이제는 산산이 조각난 유리 재떨이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졌다.
마지막 연기를 깊이 내뱉은 후, 조금은 진정이 된 주괘율이 그의 처남에게 물었다.
“자금줄은, 아예 찾을 방법이 없는 것인가?”
“태국에 있는 것은 막혔다고 보시면 됩니다. 현재 한국에 들여온 자금은 아직 안전하지만, 세탁이 덜 끝났는지라….”
“그래, 애당초 모든 일이 꼬이게 된 시작점이 그 찢어 죽일 공사판 돈세탁이 실패하고서부터였지.”
다시금 주괘율의 눈가에 아른거리는 탄약그룹 회장이라는 남자의 얼굴.
환영처럼 드리워진 그 이미지는 좀처럼 뇌리에서 씻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송구합니다, 형님.”
“되었다. 자네 문제가 아니다. 여하간, 이번 일은 낙구 그 개 같은 놈이 도망가면서 여기저기 나팔을 불어 재낀 것일 터. 그렇다면.”
툭, 툭. 뽑아 든 회칼의 칼등으로 나무 탁자의 가장자리를 두들기는 주괘율.
피비린내 나는 음지에서 일평생을 살아온 그의 촉이 그 자신에게 외치고 있었다. 죽음이라는 그림자가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으니, 어서 몸을 피하라고.
“올가미가 모가지를 조여 올 날이 얼마 남지 않았겠군.”
“최대한 빠르게 정리하고 한국을 떠야 할 성싶습니다만, 문제는 두 가지입니다. 최대한 빠른 자금 세탁, 그리고… 총알받이로 쓸 그럴듯한 미끼.”
회칼 끄트머리를 탁자에 꽂고는 나무 손잡이를 빙그르르 돌리는 주괘율.
자금 세탁과 총알받이로 쓸 미끼. 두 가지 사안을 한참이나 깊이 생각한 그는 단호히 결정을 내렸다.
“자금 세탁은 우선 그 비트코인이라는 것으로 한다. 부족한 부분은 명동에 죽치고 앉은 유태촌, 그 늙은이를 찾아가면 얼추 해결될 것이고.”
“이미… 냄새를 맡지 않았겠습니까? 그 악랄한 자가 그냥은 해줄 리가 없을 텐데 말입니다.”
“상관없다. 수수료로 8할, 9할을 떼어 주더라도 최대한 빠르게 뜨는 것이 우선이다. 그리고 총알받이로 쓸 미끼는.”
그 순간, 주괘율의 입가에 걸린 비릿한 미소.
그에겐 남은 카드 한 장이 있었다. 이제껏 아래 부하들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언제든 적절한 순간에 쓰고는 가차 없이 버릴 카드 한 장이.
“그래… 딱 적당한 놈이 있지.”
한쪽 벽에 놓인 괘종시계를 향해 옮겨진 시선.
저 묵직한 시곗바늘이 한 칸을 움직이게 될 즈음, 주괘율은 카드를 내던질 준비를 할 것이었다.
머리를 박박 민, 험상궂은 인상의 조커가 그려진 그 피사체는 바로.
“훈이 녀석, 6년으로는 모자랄 운명이었나 보군. 아무래도 쇠창살 안쪽이 평생 제집일지도 모르겠구먼.”
* * * *
탄약그룹 본사, 회장 집무실.
탁자 위, 껍질이 까인 초코바의 잔해를 바라보며, 나는 초코바 살해범 김원철 아저씨에게 물음을 던졌다.
“뭘 또 그렇게 고심하고 계시는 겁니까?”
“으흠, 별 희한한 게 다 있네. 요 비트코인인지 뭐시긴지 하는 거 말이여.”
펄럭, 낙구와 검찰 조사관이 합동으로 금고에서 빼돌린 서류를 넘겨 보던 김원철 아저씨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지금 시점에서는 영 와닿지 않는 가상화폐라는 개념. 그렇기에 아저씨는 이 생소한 것에 대해 우선 의구심부터 갖는 모양이었다. 그것도 다소 부정적이라 할 만한.
“이게 진짜 가치가 있다는 겨? 암만 잘 쳐줘도 데이터 쪼가리 뭉탱이인데… 이래저래 통밥을 굴려 봤는데, 영 말이 안 되어야.”
“일단 게임 머니 비슷한 거라 보시면 됩니다, 가상화폐니까요. 정확한 비유는 아닌데, 아무튼 그래요.”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난 아직도 영 감이 안 와야. 이게 보니까 아직 가치도 낮고 거래량도 적어서 말이지.”
비트코인이 만들어진 지 채 2년이 지나지 않은 현재의 시점.
사실… 주괘율의 금고에 있었다는 이 내용을 본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회귀 전, 이들이 비트코인으로 세를 불렸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벌써부터 여기에 손을 뻗었다는 사실은 예상 밖이었으니까.
‘설마… 미래가 바뀐 건가? 내가 오피스텔 돈세탁을 막으니, 나비효과로 이렇게 변했다든가….’
아마 그럴 가능성이 매우 클 터.
내 개입이 없었던 회귀 이전에는 낙구의 돈세탁 방식은 오래 지속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훈이의 아이디어인 비트코인이 채택되기까지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을 테고.
이런저런 가설을 세우며 고민하는 내게 김원철 아저씨가 말을 걸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겨?”
“그런 게 있습니다. 아무튼, 저는 이 비트코인이라는 데이터 쪼가리가 마음에 듭니다. 첫사랑처럼 첫눈에 반했거든요.”
미래의 황금이나 다름없는 비트코인.
불과 5~6년 후부터는 미친 듯한 상승장을 보이며 상상조차 하기 힘든 막대할 가치를 가진 자산으로 거듭날 것이다.
탄약그룹이라는 기업, 그 규모와 내실을 통틀어 제대로 도약하게 만들 발판으로 삼기 충분할 만큼.
“참… 희한한 데에 꽂히셨어, 우리 회장님.”
“이참에 비트코인 전문 채굴 업장도 하나 운영하려고 합니다. 그룹과 분리된 제 사비를 써서요.”
“뭐, 또래 나이대 재벌가 도련님들처럼 애먼 데 꽂히는 것보다는 낫긴 하지. 그건 나중에 회장님 맘대로 하시고, 일단 중요한 건.”
펄럭, 보고 있던 종잇장을 덮고는 나를 바라보는 김원철 아저씨.
맨 첫 페이지에 박힌, 섬뜩하게 생긴 주괘율의 눈매가 나를 향했다.
“그래서, 이 인간들이 가진 코인을 우리 회장님 호주머니에 넣고 싶으시다?”
“범죄 수익 환수하면 그거 국가에서 공매 붙이지 않습니까. 주괘율과 일정파, 아예 뿌리째 뽑아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생긴 거죠.”
국내 기업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비트코인의 가치. 분명 나 이외에는 공매에 참여할 그 어떤 이도 없을 것이다.
미래에 어떤 결과로 되돌아올지 감조차 잡지 못할 테니.
“근데, 암만 생각해도 주괘율을 엮는 건 상당히 빡셀 것 같어야. 이거 혐의 걸기가 쉽지 않아 보이는데?”
행복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도중, 명확하게 제기된 현실적인 문제.
주괘율. 일정파라는 조직폭력단의 수괴이자 <흑룡건설>의 실소유주.
그러나, 그는 이제껏 그러했듯 자신의 존재를 철저히 감추고 있었다. 증거 하나 남지 않게, 그 어디에도 자신의 이름을 올려놓지 않았기에.
“그래서 낚시가 필요한 겁니다. 물고기 낚시가 아닌, 사람 낚시가요.”
그는 마치 진흙 뻘밭에 숨은 미꾸라지 같았다. 그리고 그 미꾸라지를 잡는 방법은… 아주 특별히 고안된 낚싯바늘로 입가를 꿰는 것이고.
“무슨 예수님이여? 베드로한테 좋은 말씀 전해주는 것도 아니고.”
“비슷합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탄약그룹의 베드로는 유세나 보좌관이 될 것 같거든요.”
흠칫, 파티션 너머로 무언가 흔들리는 파동이 눈에 들어왔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사바나의 미어캣처럼 고개를 빼꼼히 드는 유세나 보좌관의 모습.
“저, 저… 말입니까?”
“아, 자리에 있었어요? 외근 나간 줄로 알았는데.”
“하아, 아까 돌아와 있었습니다. 그나저나, 또 저한테 무슨 이상한 걸 시키시려고 그러시는 거예요, 회장님.”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에 양손을 올리고는 나를 바라보는 그녀.
순간, 입고 있는 복장이 묘하게 광저우 카지노에서의 모습과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제부터 유세나 보좌관이 해야 할 일이 그때와 비슷해 보이기 때문에 더더욱.
“일단 가면서 이야기하죠. 마침 잘되었네요.”
“회장님…?”
“제가 이번 일을 처음 맞이했을 때, 유세나 보좌관 아버님부터 괜히 만나러 간 게 아닙니다.”
* * * *
명동, 유태촌의 집.
늙은 회색 늑대를 연상케 하는 유태촌의 외양. 쌀쌀한 늦겨울의 날씨에도 그는 대청마루 위에 선 채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 있었다. 집안 사용인 한 사람이 가까이 다가와 고개를 숙이기 전까지.
“말씀하셨던 손님께서 곧 도착하신다고 합니다. 식사도 함께 준비하면 되겠습니까?”
“되었다. 차에 어울리는 다과나 준비하면 될 것이다. 이야기가 그리 길지 않을 터이니.”
조금씩 내리기 시작하는 흰 눈. 손바닥 위에서 녹아 없어지는 눈꽃 알갱이를 쥐며 유태촌은 생각했다.
이제 곧 자신의 집에 찾아올 한 남자. 그를 기다리고 있는 운명은 어쩌면 녹아내린 눈처럼 밑바닥을 향해 흐를 것임을.
“한서준 회장 말이 맞았군. 주괘율이 그놈이 급하긴 한 모양이야.”
며칠 전, 자신의 집에 또다시 찾아왔던 탄약그룹의 회장.
밤늦은 시각, 자신의 딸과 함께 이곳에 온 그는 불필요한 서론은 생략하고 대뜸 이런 말부터 던졌었다.
‘아마 곧 옛 고향 생각이 나실 일이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