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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의 핵몽둥이-151화 (151/300)

151화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고(5)

‘아마 곧 옛 고향 생각이 나실 일이 있을 겁니다.’

옛 고향 생각.

노회한 명동의 늑대는 그 말만으로도 속에 담긴 뜻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어느덧 허옇게 서리가 내린 눈썹 한쪽을 위로 추켜세우며 입을 열던 유태촌.

‘한 회장님 말씀은, 꼭 주괘율 그놈이 내게 손을 뻗기라도 한다는 것처럼 들리는구려.’

‘왜 아니겠습니까. 사냥감은 결국 몰이꾼들이 내모는 곳으로 내달리는 법인데.’

‘사냥감이라.’

방석에 앉은 채, 따뜻한 녹차를 입 안에 머금는 탄약그룹의 회장.

무언가 생각해 둔 바가 있는 걸까? 유태촌의 말 없는 추궁에도 그는 점잖게 작은 미소만을 짓고 있었다.

‘이미 손발을 잘라 두었습니다.’

‘……!’

‘태국 내의 조직부터 국내 건설업계에 이르기까지 전부. 그렇다면 주괘율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일 테니까요.’

첫 만남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어느덧 훌쩍 큰 산처럼 변한 모습.

사냥감을 구석에 몰아넣고 서서히 압박하는 그 노련함에, 유태촌은 자기도 모르게 회백색 턱수염을 쓸어 올렸다.

그리고는, 무언가 골똘히 궁리라도 한 듯 눈썹을 씰룩거린 후, 제 여식에게 시선을 돌리는 유태촌.

‘쯧쯧, 시간이 더 지나면 이제 잡지도 못할 터인데.’

‘아버지…?’

‘되었다. 모자란 년 같으니.’

자신의 딸에게 이유 모를 핀잔을 주고는 다시 정면을 바라본 유태촌이 입을 열었다.

‘그래, 내 회장님을 돕는다고 치면, 어찌하면 되겠소? 주괘율 그놈은 워낙 의심이 많아 쉬이 상대하지 못하는 자인데.’

의심, 이제껏 반평생을 어둠 속에서 지내던 주괘율의 가장 큰 무기.

제반 사정에 대해 상세히 알지 못하는 유태촌. 때문에, 그가 모든 것을 일임해 진행하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는 상황이었다.

조금이라도 자신을 함정에 빠트리려는 티가 나는 순간, 주괘율은 그 즉시 다른 곳으로 잠적할 것이니까.

그러나.

‘그건 간단합니다. 미리 생각해 온 것이 있으니까요.’

시선을 돌려 옆을 바라본 탄약그룹의 회장. 제 여식을 향해 눈웃음 짓는 그 모습에 유태촌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회장님…?’

그리고, 무언가 재미있는 것이 떠오르기라도 한 듯 장난기 서린 웃음 짓는 얼굴.

뒤이어 그의 입에서 내뱉어진 말은, 참 희한하기 그지없었다. 듣는 유태촌의 입장에서 전혀 가늠조차 되지 않는 말이었기에.

‘두 분, 혹시… 아바타 게임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 * * *

-삐비빅!

손에 든 무전기에 빨간 불빛이 들어옴과 동시에, 특유의 기계음이 내 귓가를 울렸다.

내가 있는 이곳은 유태촌의 자택 2층. 유태촌·유세나 부녀가 있는 사랑방 바로 위였다.

장식물 뒤편에 숨겨둔 휴대전화에 연결된 영상 통화와 무전기 대화로 1층 모습은 알 수 있는 상황.

“아, 아, 두 분 다 잘 들리십니까?”

-잘 들립니다, 회장님.

유세나 보좌관의 즉각적인 응답.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유태촌에게 재차 물음을 던졌다.

“아버님은요?”

-…듣고 있소. 그리고 그 아버님 어쩌고 하는 호칭보다는, 유 대표라 불리는 게 낫겠군.

나름 친밀감을 더하기 위해 부른 호칭이었건만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1층 상황을 영상 통화를 통해 볼 수 있지만, 그 앵글은 손님 자리에 앉을 주괘율을 향해 있었다.

유태촌의 표정도 볼 수 없으니, 더 뭐라 말하기는 민망할 듯하다. 나는 입가에 무전기를 대고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뭐, 좋습니다. 혹시 몰라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주괘율이 바라는 건 두 가지일 겁니다. 하나는 자금 세탁, 다른 하나는 안전한 도주.”

이미 사전에 포섭했던 낙구의 진술. 그리고 주괘율의 비밀 금고에 있었던 기밀문서에 적힌 내용들.

이 모든 것들을 조합해 보았을 때, 주괘율이 선택할 방법은 뻔한 것이었다.

아직 절대적인 거래량이 부족한 비트코인. 그렇기에 유태촌을 향해 뻗어야만 하는 구원의 손길.

지금부터, 모든 것은 내게 달렸다. 주괘율이 내민 그 손길이 스스로의 목을 조르게 하기까지.

“자금 세탁을 빌미로 주괘율의 도주로를 사전에 알아내고, 박은지 검사에게 뒤처리를 맡긴다. 이게 제 계획입니다. 이해하고 계시죠?”

-저… 회장님?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인이어에 대고 내 물음에 대답한 유세나 보좌관.

그녀의 목소리에는 무언가 해소되지 못한 의문이 가득 담겨 있는 모양이었다.

“네, 말씀하세요.”

-전체적으로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는데요, 저는 왜 이 자리에 있는 건지….

“아아, 그거요.”

나도 모르게 올라간 내 입꼬리. 지금부터 열정적인 연기를 펼칠 유세나 보좌관의 모습을 기대하니, 퍽 재미있을 것만 같아서인가 보다.

이제까지 함께 일을 해 보니, 유세나 보좌관은 나름 이런 일에 최적화된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뭔가 현장에서 비밀 요원처럼 갖은 고생은 다 하는 식의.

“유세나 보좌관은 그러니까, 일종의 광대 역할을 하시면 됩니다. 주괘율이 의심할 새도 없이 정신없게 만들기 위한.”

-광대 말입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뭐, 자세한 건 그때그때 상황을 보고서 제가 지시할 테니, 연기만 잘해주시면 됩니다. 일단은.”

똑똑, 말을 이어가던 도중 들려오는 노크 소리.

곧바로 집안 사용인 중 한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와 고개를 숙이며 말을 꺼내었다.

-찾아오신 손님께서 오래 기다려야 하냐고 물으십니다. 어찌하면 될까요?

인내심이 바닥이 난 모양이었다.

오히려… 좋다. 이 정도로 초조함을 보인다면, 분명 심신의 상태가 평소만큼 날카롭게 다듬어지지 않았을 터.

나는 다시금 무전기를 입가에 가져다 대고는, 곧바로 첫 번째 연출 지시를 내렸다. 갓 막이 오른 연극의 하나뿐인 감독으로서.

“리허설 할 시간도 안 주나 봅니다. 팔자에도 없는 즉석 연극 연출을 맡게 되네요. 바로 들어오라 하시죠.”

* * * *

-자잘한 것들은 전부 생략하고 본론만 말하겠습니다. 한화 800억 원가량을 싱가포르 계좌로 최대한 빨리 세탁하려 합니다. 가능하겠습니까?

생각보다 훨씬 더 마음이 급한 모양이었다. 대놓고 궁지에 몰린 상황임을 감추지 않는 주괘율.

저화질의 영상 통화로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감추지 못한 식은땀이 홍수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수수료로 절반까지 가져가셔도 좋으니, 3일 안에 해결을 봤으면 합니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즉답을 듣고자 하고요.

-크흠….

가만히 앉아 점잔을 빼는 유태촌.

그는 내가 내린 지시대로 적당히 무게를 잡고는 고심하는 척 시간을 끌고 있었다. 최대한 주괘율의 애를 바싹바싹 태우게끔.

그리고, 그 메마른 지푸라기 같은 주괘율의 가슴팍에는 쉬이 불이 붙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조종하는 유세나라는 광대가 입을 열기 시작했기에.

“나가라고 하세요.”

-……?

“당장 나가라고 호통을 치고. 아버님께, 아니, 유 대표님께 막 따지세요. 저런 깡패 돈놀이 이제 취급 안 하기로 했다지 않았냐며.”

사실 호통까지는 바라지는 않았다. 적당히 압박만 주는 것으로도 내 기대치는 충족시키고도 남았으니까.

그러나….

-내 집에서 꺼지세요, 이 개떡 같은 아저씨야.

-뭐, 뭐라…?

무언가… 이상한 스위치 비슷한 것이 켜진 유세나 보좌관.

-꺼지라고, 확 똥물에 콧구녕을 처박아 버리기 전에. 당신 같은 깡패들이랑 더 엮일 생각 없어! 아버지도 그쪽이랑은 손 떼기로 한 지 오래고.

-허어, 따님이 입이 상당히 거치시네? 안 그렇습니까, 유 대표님?

평소 칼 밥 먹으며 사는 이들, 그리고 그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부친에 쌓인 불만감이 터져 나오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뭔가 입력한 명령어 이상으로 제멋대로 자가발전 하는 유세나 아바타.

-안 그래요, 아버지? 이제 그 개떡 같은 사채놀이 그만하고 깔깔한 제도권 금융사로 새 출발 하시겠다며. 왜 또 조폭하고 엮이는 건데!

-이, 이 계집애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람….

진심으로 당황하는 기색이 서린 유태촌의 목소리.

오히려 좋다. 어색한 발 연기보다는 이게 더 낫다.

나는 재빨리 무전기에 대고 지시를 내렸다.

“적당히 맞장구치세요. 유 대표님.”

-크, 크흠…!

다행히 고집 없이 내 지시를 들어주는 유태촌.

평생 본 적 없었던 딸의 모습에 퍽 당황했는지, 그는 몇 차례 목청을 가다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뭐… 사실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 주괘율이 자네도 알겠지만, 이미 난 어두운 일 쪽은 안 건든 지 제법 되었다네.

-태촌 형님이 제도권 바깥의 일은 안 하시겠다라.

그 순간, 의심의 눈초리를 밝히기 시작한 주괘율. 자세를 바로 한 그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조용히 입을 닫고는 사색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야생에서 한평생 살아온 그의 직감이… 무언가 경보음을 울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타당성! 왜 그러는 건지 당위를 말해주세요. 뭔가… 낌새가 좋지 않습니다.”

-…….

일단 급한 대로 지시를 내렸지만, 너무나도 추상적인 말. 좀 더 구체적인 지시가 필요하다.

주괘율이 의심을 거둘 만큼. 아니, 의심이 든다 한들 받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현 상황과 맞물려 떨어지는 지시를.

“혹시 모를 책임을 뒤집어쓸 위험은 감수하기 싫다는 느낌으로 갑시다. 과격하게 해도 괜찮습니다.”

-칼밥 처먹는 인간들하고 엮이는 것, 진짜 피비린내 나서 못 해 먹겠어! 아버지, 또 내가 변호사 손 잡고 경찰, 검찰 왔다 갔다 하는 건 안 한다고 했죠!

아버지에게 바락바락 대드는 딸의 모습을 최선을 다해 연기하는. 아니, 어쩌면 평소 하고 싶던 말을 다 쏟아내는 중인 유세나 보좌관.

다행히… 주괘율은 그 모습을 진심이라 여긴 모양이었다. 다소 풀린 의심과 함께 찾아온 약간의 틈.

그리고 나는, 이 벌어진 틈새를 결코 놓칠 생각일랑 없었다.

“유 대표님은 망설이는 연기를, 유세나 보좌관은… 문장에 훈이와 관련된 내용을 넣어서 말해주세요. 최대한 자연스럽게.”

주괘율이 원하는 두 가지.

자금 세탁과 도주로 확보.

모든 것을 종합해 판단한 결과, 주괘율이 자신의 혐의를 덮어씌울 미끼는 단 한 사람뿐이다.

훈이.

그 험상궂은 빡빡머리 남자에게 수괴 타이틀을 씌운 후 빠져나갈 수 있자면… 분명 주괘율은 그리할 터.

-크흠. 그, 그랬긴 했지. 그런데 얘야. 일단 수수료 절반이면 400억 원인데, 이건 좀 크긴 하다만….

-절반이고 뭐고! 딱 보니까 내세울 총알받이도 없이 도망갈 기세인데, 뭐 하러 그 돈 먹자고 위험을 뒤집어써요!

총알받이.

잔잔한 수면 위에 내던져진 그럴듯한 낚싯바늘 하나.

톱니 같은 이빨을 가진, 중년의 사내는 그 주위를 빙빙 돌고 있었다.

“물어라, 물어라… 한 번만 물어라.”

주괘율이 도주하지 않은 상태에서 훈이만 잡으면, 그리고 돈세탁의 증거가 유태촌에게 있으면… 모든 일이 단 한 번에 해결될 터.

칙칙한 화면 속에서도 보이는, 날카롭기 그지없는 주괘율의 모습.

목구멍 너머로 긴장감을 몇 차례 밀어 넣은 후에야,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총알받이만 있다면… 자금 세탁이 가능하다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겁니까?

아래층에서 피어오른 담배 연기가 코를 찌른다.

그 매캐한 연기에는 무어라 형용하기 힘든, 주괘율 자신의 고뇌가 담겨 있었다.

궁지에 몰리는 것을 직감하면서도, 미끼를 물지 않을 수 없는 고뇌가.

그리고 연이은 그의 말 한마디.

-경찰·검찰에… 미끼로 딱 좋은 놈이 있습니다. 책임을 전부 뒤집어씌우고 저나 유 대표님, 그리고 따님분까지 전부 깨끗하게 손을 뗄 수 있을 총알받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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