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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의 핵몽둥이-152화 (152/300)

152화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고(6)

낙구가 불러일으킨 폭풍이 가신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바닥 위 아무렇게나 떨어진 그림, 휑하니 문이 열린 채 텅 빈 모습을 보이는 비밀 금고, 격한 감정을 토해낸 듯 산산이 조각난 유리 재떨이까지.

난장판이 된 흔적이 아직도 구석구석에 남아 있는 주괘율의 사무실 안. 문을 열고 그곳에 들어선 훈이는 주괘율의 처남을 보며 물음을 던졌다.

“큰행님은… 혹시 어디 가셨십니꺼? 바로 오라 하셔가 급히 왔십니더만.”

“아아, 그 잠시 급한 일이 있으셔서 말이지. 앉아서 조금만 기다리게나. 곧 오실 거야.”

평소와는 다른 묘한 기시감은 단지 사무실 내의 흔적들에만 있지 않았다.

평소와 달리 자신을 다소 어렵게 대하는 주괘율의 처남.

무언가가… 조금 어긋나져 있었다. 꼭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한 느낌과 비슷하게.

“마, 희한한 일이네. 이런 건 또 칼같이 지키던 양반이 무슨 일이고?”

“금방 오신다 하니, 우선 담배나 태우고 있게. 훈이 자네, 예까지 급히 온 것 같으니 마실 것 좀 줄까?”

“예, 뭐… 찬물이면 됩니더.”

탕비실에서 들리는 달그락거리는 소리. 아무래도 직접 마실 것을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늘 주괘율의 심복을 자처하던 처남이 훈이에게 이 정도의 호의를 베푼 적은 없었는데 말이다.

“고마, 느낌이 영 쌔한데….”

자기도 모르게 팔뚝의 솜털이 삐쭉 서버린 훈이. 곧이어 내온 찬물 한 잔을 조금 홀짝거리던 그의 귓가에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리었다.

주괘율이었다.

“빨리 왔구나, 훈아.”

분명 전화로는 분을 주체하지 못해 격한 화를 내던 주괘율. 그러나 지금 그는 평소의 냉철하고 스산한 기운을 띠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생을 끊기 전, 늘 보여왔던 그 모습처럼.

훈이는 급히 화제를 전환할 필요가 있었다. 그 불길한 기운이 자신에게 닿게 하지 않기 위해서.

“큰행님 오셨십니꺼? 낙구 그 새끼는 지가 최대한 빨리 추적해가 모가지를 확 따오겠십니더. 조금만 기다리 주시믄….”

“아아, 그건 되었다. 그리 과하게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

“큰행님…?”

어쩌면 온화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훈이를 보고 차갑고도 환한 미소를 짓는 주괘율.

“낙구 그 버러지 놈이 도망쳐 봤자 어차피 내 손바닥 안이니 말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한 발짝 앞으로 다가간 주괘율은 곧장 한 손으로 훈이의 어깨를 짚었다. 반백의 나이가 의심될 만큼 강한 손아귀 힘으로.

“조직의 안위. 그렇지 않던?”

“…….”

훈이의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식은땀 한 방울.

조직의 안위. 필요하다면… 훈이 자신이 낙구와 관련한 책임을 뒤집어쓸 수도 있다는 암시.

웃음이라는 가면 아래 숨은 흉악한 표정을 눈치챈 훈이의 몸은 어느새 얼음조각처럼 굳어 있었다.

주괘율이 뒤이은 말을 내뱉기 전까지.

“허나, 참 다행이지. 수사기관 윗선에 고여 두었던 돈이 제 역할을 하는 모양이다.”

“그라믄… 지금 한국 검찰에서 손 닿는 곳은 태국에 있던 얼라들까지다, 이 말씀이십니꺼?”

“그런 셈이지. 국내 조직에는 문제가 없을 게다. 그러나.”

거창한 거짓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훈이.

하지만, 주괘율이 주석처럼 덧붙인 말 한마디는 다시 분위기를 냉각시키기에 충분했다.

“모든 일에는 대가가 필요한 법.”

“대가….”

“지금 남은 자금을 최대한 빨리 세탁해야 한다. 3일 이내에.”

주괘율은 훈이를 속이기 위해 그럴듯한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윗선의 윗선에 고이기 위한 수백억 원 규모의 뇌물. 특히나 깨끗하게 세탁된 돈만을 단기간에 조달해야 한다는 거짓말.

그 거짓말에 다소 난감해진 훈이는 곤혹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행님, 3일이라믄 지금 그 비트코인으로는 세탁이 불가능합니더. 아직 거래량도 작고, 또 된다 케도 입출금에 걸리는 시간이….”

“아아, 그 방안 또한 내 직접 마련해 두었다.”

“예?”

“외부 전문가가 있다. 당장 내일 새벽, 성남 지하창고에 둔 현금을 네가 직접 전해주고 오너라.”

성남 지하창고. 그 안에 들어 있다는 막대한 규모의 현찰.

물론 이 현찰은… 맨 윗부분의 현금 일부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흰 종이에 불과했다.

그저 증거 자료와 함께 수사기관에 훈이를 넘기고, 주괘율 자신은 해외로 도망치기 위한 일종의 함정일 뿐.

“…….”

무언가 내키지 않는 훈이.

주괘율의 거짓말을 정면으로 맞이한 그의 직감은 제 몸뚱이에게 외치고 있었다. 당장 이곳에서 발을 빼라고.

그러나….

“시간이 없다, 훈아. 사과 상자로 320개가 넘으니, 지금 바로 작업해야 해!”

긴박함과 위급함이라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의 존재.

대안을 생각할 시간도, 무언가를 준비할 여력도 허용되지 않는 상황. 결국, 훈이가 고를 수 있는 선택의 폭은 그리 넓지 않았다.

“…예, 큰행님. 그리 하겠십니더.”

* * * *

-[입금] 80,000,000,000원 확인되었습니다, 검사님. 바로 작전 진행토록 하겠습니다.

딩동! 경쾌한 소리와 함께 울려 퍼지는 박은지 검사의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 알림.

8백억 원이라는 거액의 숫자를 보며 혓바닥을 다시던 그녀는 반쯤 침을 질질 흘리며 내게 말을 건넸다.

“히야, 800억 원이란다. 800억 원. 이거 내가 검사 짓 1,000년쯤 하면 모을 수 있는 돈인데.”

“저는 한 1년쯤? 뭐, 경영 상황이랑 투자 시황에 따라 좀 다르긴 하겠습니다만.”

살짝 허세 아닌 허세를 섞어 박은지 검사에게 장난을 치는 나.

그녀는 뭔가 김이 좀 샌 모양인지,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새벽녘 부둣가를 바라보았다.

“옘병, 아주 잘나셨수. 보니까 머리통도 좀 쌩쌩하게 돌아가는 것 같고. 이런 생각을 어떻게 하셨데?”

이런 생각.

휴대전화 화면에 적힌 800억 원이라는 거액. 지금 주괘율은 그 송금처가 유태촌의 해외 비밀 계좌인 것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 계좌는 검찰의 수사 전용 계좌지만.

“어쩌다 보니 이렇게 엮여서요. 저도 골치 아픈 일은 빨리 끝내고 싶습니다.”

“뭐, 그렇겠지. 기업 운영하는 회장님 이렇게 잡아두는 것도 좀 그러니까. 아무튼, 범죄수익 확보는 이걸로 끝났고, 남은 건 검거뿐인데….”

그리고, 지금. 인천항 컨테이너 야적장 한복판.

이제 곧 이곳에 돈다발을 가장한 종잇조각과 함께, 훈이가 연루된 증거 자료가 담긴 트럭이 접근해올 것이다.

“올 겁니다. 분명히.”

“와야지. 그래야 독박 쓰고 무기징역 살기 싫은 훈이 놈 입에서 주괘율이 수괴라는 증언이 나올 테니까.”

어스름한 새벽녘의 찬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고, 간간이 들려오는 새들의 울음소리.

스산하기 그지없는 이 어두운 곳에서, 순간 둔탁한 기계음이 들려왔다.

“어어…? 저거 설마?”

“맞는 것 같은데… 망원경 좀 줘 봐요, 박은지 검사님.”

곧바로 철제 펜스 사이로 들어오는 작은 트럭 한 대. 몽롱한 오렌지색 헤드라이트가 깜빡거리다 꺼지자마자, 엔진이 꺼진 차 안에서 누군가가 내렸다.

빡빡 민 머리, 험상궂은 인상, 마스크를 쓴 건장한 체격의 그 남자는 훈이였다.

“왔다! 박 검사님…!”

“회장님은 이제 거기서 꿈쩍도 말고 가만히 계쇼. 김 수사관, 최 수사관! 바로 작전 시작해!”

* * * *

“후우….”

트럭에서 내린 훈이는 곧장 담뱃갑을 꺼내어 장초를 입에 물었다.

어느덧 듬성듬성 난 잡초 이파리에 이슬이 맺힌 시간.

팔을 틀어 본 손목시계에는 이미 약속한 시간에서 10분여가 지난 상황이었다.

“니미, 거 더럽게 늦네. 영감탱이가 빨리빨리 좀 다니지 뭐 하는 기고?”

내뱉은 말이야 그렇게 허세가 담겨 있었으나, 실상 속내는 긴장감과 불안감으로 가득 찬 훈이.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쯤이야 그 역시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평소와는 다른 주괘율의 태도. 수렁에 빠진 듯 점점 가라앉는 주변 상황. 그리고 그것들로 칭칭 둘러싸인 훈이 자신의 혼란스러운 내면까지.

그러나… 그런 훈이의 불길함을 덮은 것은 단연 그의 욕망이었다.

“후우, 이번 일만 잘 끝내믄… 낙구 그 새끼가 차지했던 거이 전부 내 끼 되는 기라.”

앞으로 최소 10년간 벌어들일, 어쩌면 수천억 원. 아니, 수조 원에 달할 불법 자금.

그 막대한 자금의 세탁에 선봉장 역할을 맡을 훈이에게 떨어질 떡고물.

아주 조금, 그러나 절대적인 액수는 거대하기 그지없을 그 떡고물은… 훈이의 눈을 멀게 만들었다.

뻔히 보임에도 스스로 눈을 감아 어둠 속으로 빠져들게끔.

“아, 인자 오나 보네. 새끼들, 행동거지는 굼떠서….”

다가오는 여러 대의 검은 승용차.

무언가… 이상했다.

보통 이런 거래는 트럭으로 하지, 작은 승용차 여러 대에 나누어 담지는 않았기에.

“설마… 설마!”

그리고, 그토록 굳게 감아두었던 눈을 뜬 훈이.

황급히 운전석에 올라탄 훈이는, 트렁크에 채 실리지 않아 조수석에 적재한 상자 하나를 커터칼로 뜯어내었다.

귓가에 들려오기 시작한, 붉은 사이렌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서.

“주괘율, 이 개 같은 놈이…!”

상자 안에 든 흰 종잇조각. 그리고… 훈이가 연루되었다는 증거가 적힌 장부 몇 개.

울컥, 폭발할 듯 솟아오른 감정과 함께 붉게 변한 눈앞.

“손들어! 당장 차에서 내려서 바깥으로 나와! 빨리!”

붉은색으로 칠해진 세상은 비단 저격용 총의 조준기 탓을 아닐 것이었다.

함정에 빠진 짐승이 그러하듯, 단말마를 토해내며 바닥에 무릎을 꿇은 그의 모습.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고,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어느새 차가운 수갑을 찬 채, 경찰차 안으로 들어간 훈이.

망연자실. 그리고 허탈함.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그렇기에 넋을 잃고 알 수 없는 소리만을 중얼거리는 훈이.

“이럴 수가… 이럴 수는 없는 건데, 어째서….”

혼이 빠진 사람처럼 행동하는 그는 알아채지 못했다.

어딘가를 향해 출발한 차량. 그리고… 자신의 옆자리에 못 보던 사람 하나가 앉아 있다는 사실을.

“이름이 그러니까 박훈, 이라고 했나요? 그쪽 사람들은 훈이라고 부르는 것 같던데.”

서른이 채 안 되어 보이는 젊은 외모. 그러나, 무언가 알 수 없는 위압감마저 풍기는 듯한 미소.

수갑을 찬 손을 꼼지락거리며 훈이가 입을 열었다.

“뭐고, 당신은…?”

“반갑습니다. 탄약그룹 한서준 회장입니다. 아마… 우리가 분당 외곽에 오피스텔 건으로 엮였었지요? 뭐, 이게 중요한 건 아니고.”

탄약그룹 한서준 회장.

갑자기 재벌가 회장이 왜 나온 것인지에 대해서 물을 시간은 훈이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뒤이은 그의 말이… 훈이에게 있어 나락으로 가는 선고나 다름없었기에.

“일정파 수괴 타이틀. 이대로라면 훈이 씨 당신이 다 뒤집어쓸 텐데, 여기 조수석에 박은지 검사님은 아마 무기징역을 구형할 겁니다.”

“딱 대, 이 깍두기 새끼야. 흐흐흐.”

장난스러운 얼굴로 뒤를 돌아 연신 주먹 감자를 날리는 박은지 검사.

당황한 훈이. 도축장에 끌려간 짐승처럼, 그는 거세게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무기징역…? 어이! 내가 무신 수괴란 말이고! 진짜배기는 따로 있다 아이가!”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순간, 묵직하게 훈이의 어깨를 짓누른 손아귀.

아까 전 미소는 어디로 사라진 건지, 진지한 무표정이 탄약그룹 회장이라는 남자의 얼굴을 먹구름처럼 덮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훈이를 향해 내뱉은 마지막 말 한마디.

“지금부터 묻는 말에 대답이나 잘하자고. 협조하고 10년 살고 나갈지, 아니면 모든 걸 짊어지고 옥사(獄死)할지. 이제부터 당신의 선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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