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중립선언(2)
평창동. 임계현 SA그룹 회장의 저택.
높게 쌓아 올린 돌담이 무색하리만큼, 집 안에서 시작된 큰 소리는 바깥으로 새어 나가 새벽의 골목길을 깨웠다.
“아버지! 이번에 올린 사업 계획서… 어째서 반려하신 겁니까!”
답답한 듯 제 주먹으로 가슴팍을 쳐대는 임재호 SA그룹 부회장.
붉게 충혈된 두 눈에는 탄식에서 솟아오른 눈물마저 맺히려 하고 있었다.
“최종 심의에서 아버지가 물리신 것이라 알고 있습니다. 제가, 제가… 얼마나 뼈를 깎는 심정으로 기획했던 건데…!”
피가래가 끓는 목으로 호소하는 아들. 그리고 휠체어에 앉은 채 그런 외아들을 가련한 눈으로 바라보는 늙은 아버지.
주체할 수 없는 억울함에 어린아이처럼 분기를 토해내는 자식 앞에서, 임계현 회장이 입을 연 것은 몇 번의 잔기침이 있는 후였다.
“쿨럭, 쿨럭. 재호 네가 제안한 그 안은 실현 불가능한 것이다. 스마트폰에 들어갈 모바일 OS를 독자적으로 만들겠다 했었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그룹 전체가 그 어떤 대가를 치른다 하더라도!”
왕관의 무게를 고스란히 떠안기엔 턱없이 부족하고 모자란 후계자. 아니, 그것을 넘어 하나뿐인 핏줄.
그렇기에 한숨과 함께 내뱉은 임계현 회장의 말 한마디에는 그 어떤 노여움도 타박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저 가여움. 오로지 부족한 아들에 대한 가여움만이 담겨 있었을 뿐.
“어떻게 말이냐?”
“그건….”
“내 그 사업계획서를 수십 번을 다시 넘겨 가며 침침한 눈으로 찾아보았다. 국내를 넘어 전 세계 사람들을 어떻게 끌어모을 것인가를.”
벽난로 앞으로 손을 뻗은 임계현 회장. 세월 앞에 앙상해진 그의 팔에 조금씩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온기가 돌아야만 했다. 적어도 이 불민한 아들을 위해서 SA 그룹을 반석 위에 올려두고 떠나야 했기에.
“그래서 내 직접 자른 것이야. 재호 너를 무시해서도, 네가 미워서도 아니다. 나는 그저… 쿨럭! 쿨럭!”
“아버지…? 아버지!”
핏물과 함께 다시 터져 나오는 거친 기침 소리.
점점 꺼져갈 것만 같은 생명의 불씨가 눈에 아른거려서였을까?
초점을 잃고 흔들리는 임재호 부회장의 눈동자.
결국, 급히 주치의를 부르고 나서야 이 소동은 일단락되었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어서 바로 병원에 입원하심이….”
“후우… 난 괜찮네.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는데, 벌써 떠날 수는 없지. 이봐, 임자.”
간신히 고른 숨.
그 순간, 무언가 생각이라도 난 듯, 임계현 회장이 비서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그거, 이리 가지고 오게.”
“청와대 건… 말씀이십니까?”
“그래. 시간이 없으니 하루라도 서둘러야겠지.”
눈을 감고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임계현 회장.
비서로부터 청와대 인장이 찍힌 종이봉투 하나를 받아 든 그는, 왕관의 무게에 힘겨워하는 아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쩌면, 이것이… 이 애비가 네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 것이 되겠구나.”
“아버지, 이건…?”
한 장, 한 장, 손가락 끝으로 서류를 넘기며 눈을 빛내는 임재호 부회장.
실패로 점철된 아들의 눈에 다시 생기가 돌아오는 것을 본 아버지는, 얼마 남지 않은 힘을 끌어내어 그 손을 잡았다.
“네가 탄약그룹의 한서준이를 이긴다면, 네가 거머쥘 SA그룹은… 필시 전 세계를 향해 도약하게 될 게다. 반드시.”
* * * *
“출발해. 바로 본사로 간다.”
“예, 부회장님.”
창가에 댄 오른손으로 턱을 괸 채, 점점 멀어져가는 평창동 저택을 바라보는 임재호 부회장.
오늘따라 유독 저 철옹성 같은 저택의 그림자가 그 자신을 삼킬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호부견자(虎父犬子). 아버지만도 못한 아들이라는 그 말… 너무나도 벗기 힘든 굴레로군.”
한국 재계의 신화라 할 수 있는 임계현 회장에 비해, 부족한 경영 능력으로 뒷말이 많은 임재호 부회장.
IT 산업을 이끌어갈 선두 주자를 지명하겠다는 대통령의 제안이 담긴 문서. 그는 그 새하얀 종잇조각을 가만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쩌면, 아버지 생전에 내 가치를 입증할 마지막 기회일 것인가. 그리고….”
그의 시선에 화살촉처럼 꽂힌 단 한 개의 단어, 탄약그룹.
그리고, 국방부 신무기 사업을 둘러싸고, 임재호 부회장 자신의 입지를 벼랑 끝으로 몰았던 한서준이라는 남자.
반평생을 호부견자로 살아온 그였지만, 국방부 신무기 사업 건은 유독 가슴 속에 비수처럼 박혀 있었다.
일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실패한 남자임을 여실히 입증하는 것이었기에.
“한서준… 이놈에게는 절대 질 수 없다. 절대로!”
구깃구깃 구겨지는 흰 종이.
동시에, 콧잔등에 고쳐 쓴 안경 안쪽에 비친 빛은 결의를 내비치고 있었다. 꽉 쥔 그의 두 주먹만큼이나.
그리고, 그 순간. 걸려 온 전화 한 통.
-Daddy? 전화 통화 괜찮아요?
영어와 한국어가 자연스레 반반씩 섞인 언어를 구사하는 앳된 목소리.
서윤지 이전, 한번 결혼했다 갈라선 전처소생의 아들. 그는 미국의 기숙학교에서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소년이었다.
그리고, 그 구김 없는 목소리에 임재호 부회장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럼.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나뿐인 성빈이 전화인데, 당연히 괜찮지. 학교는 잘 다니고 있고?”
-Always the same. 항상 똑같죠. 그런데… 학교에서 부모 초청 행사가 있다던데, 올해도 못 오시는 거예요?
“흠, 글쎄다 일단 회사 일정부터 좀 확인해야 할 것 같다만….”
흐린 말끝에 담긴 미안함과 책임감. 제아무리 애지중지하는 외아들의 부탁이지만, 닥친 현실의 벽이 더 높았기에 그는 쉬이 확답을 주지 못했다.
“…잠깐만.”
그러나.
임재호 부회장의 머릿속에서 섬광처럼 솟아난 생각 하나.
IT 산업 선두 기업 선정이라는 퍼즐을 풀어낼 방법. 아들로부터 걸려 온 전화 한 통은 그에게 우연찮게 활로를 열어주고 있었다.
미국, 그 기회의 땅에서 기술력을 가진 스타트업 기업을 인수하겠다는 활로를.
-Daddy?
“아마 갈 수 있겠구나. 조만간 미국으로 출장 일정이 있을 듯하니.”
-Really? 정말로?
“그래, 아빠가… 꼭 가서 해야 할 일이 있거든. 할아버지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 성빈이를 위해서.”
* * * *
-위이이이잉!
냉각팬 소리가 시끄럽게 돌아가는 인천 공단 지대의 자그마한 공장. 이 기묘한 곳에서는 그 흔한 공작기계 하나 없이 오로지 전자기기만이 미친 듯이 열풍을 내뿜고 있었다.
“어! 왔어? 얼렁 들어와, 들어와.”
작업복 비슷한 편한 복장을 한 채, 공장 문간에서 내게 손짓하는 서희 누나.
일련의 후계 투쟁으로 그룹 내에서 축출된 숙부의 딸이었지만, 그 누구도 서희 누나에게 무어라 타박하는 이는 없었다.
금융 쪽에 대한 독보적인 능력, 사업 운영에 관한 센스. 거기에 회장직에 오른 내가 힘을 더해주었기에 더더욱 그럴 수밖에.
“누나, <코코아>에 더해서 비트코인 채굴 회사까지 맡기에 힘들지는 않고?”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을. 우리 한씨 집안 핏줄은 죄 일 중독자 핏줄인데. 일단 어서 안으로 들어와서 이것부터 봐봐.”
문 안쪽으로 들어가니 눈이 부실 정도로 번쩍거리는 환한 불빛의 향연.
그 안에서 보이지 않는 곡괭이들은 가상 세계의 황금을 캐내고 있었다.
“일단 네 지시대로 하루에 1만 코인씩만 채굴하고 있어. 일정 부분은 조금씩 시장에 풀면서 간을 보고 있고.”
지금까지 채굴한 비트코인의 수량은 50만 코인.
과거 개당 8,000만 원 가까이 육박하던 때를 기준으로 했을 때, 이미 40조 원에 육박하는 금액이다. 물론 실제 매도 시에는 그 가격으로는 거래가 불가능할 테지만.
“잘하고 있네. 저번에도 말했지만, 절대적인 개수보다 중요한 건 뭐라고?”
워낙 누누이 강조해왔기에, 이제는 귀에 딱지가 앉은 듯한 표정을 짓는 서희 누나.
나와 쏙 닮은 미소를 입에 건 그녀는 마치 짜릿한 사냥을 즐기는 사냥꾼의 표정을 하고는 내게 대답했다.
“시장 자체를 지배하는 것. 그래서 서준이 네가 거래소 설립도 같이 진행하겠다는 거잖아.”
“역시 내 뜻 알아주는 사람은 서희 누나뿐이야.”
“어울리지도 않게 립서비스는. 아, 그리고 저번에 네가 말했던 그거.”
가슴팍에 달린 주머니에서 자그마한 USB 하나를 꺼내든 서희 누나.
“일단 하라는 대로 명단은 뽑아두었거든. 도대체 네가 뭘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USB 안에 적힌 명단은 서희 누나가 미국 생활을 하며 만든 인맥 전부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비단 금융권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IT, 소위 테크 기업의 의사결정자들을 중심으로 한.
“땡큐. 앞으로 좀 바빠질 거야. 아무래도… 청와대 안방 주인이 악취미가 좀 있어서 말이지.”
* * * *
시간을 조금 앞으로 돌려 오늘 오전.
서희 누나가 있는 인천에 가기 전, 탄약그룹 본사 회장 집무실에서는 환한 대머리에 전등불이 반사되고 있었다.
김원철 아저씨의 벗겨진 머리에 반사된 불빛이.
‘그러니까, 대통령 그 양반이 인간 경마를 보고 싶다는 거 아니여.’
IT 산업 선두 기업 선정이라는 상금을 건 인간 경마.
대통령의 의중은 뻔했다. 어차피 탄약그룹이나 SA그룹이나 둘 중 하나가 될 테니, 그 중간에서 정치적 이익만 챙기면 된다는 것.
‘뭐, 그래도 제법 해볼 만한 가치는 있는 것 같습니다. 공교롭게도 시기도 딱 적절하고요.’
‘SA그룹하고 스마트폰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이긴 하지. 이런 식이 될 줄은 몰랐지만.’
점점 부푼 풍선처럼 커져가는 스마트폰 시장.
지난 국방부 신무기 사업을 통해, 탄약 전자에서도 스마트폰을 만들 제반 준비는 얼추 마무리된 상황이었다.
IT 쪽으로 확장을 하기에 알맞은 시기라 할 수 있는 상황.
문제는… 그 확장의 방법이 무엇이냐이지만.
‘우선, 미국으로 가야 합니다.’
‘미국? 기업 사냥하게? 뭐, 그룹 내 자금도 여유가 있고, 빈 살만이라는 튼튼한 쩐주가 있으니 돈 걱정은 없긴 하지.’
회귀 전, 2010년대 한창 태동하던 IT 기술의 요람이라 불리던 미국.
현재, 아직 그 가치가 미처 입증되지 못한 상황. 지금이야말로 그곳에서 필요한 원천 기술을 쓸어 담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다.
그것도 매우 세심한 수를 두어가면서.
‘일단 서희 누나가 가진 미국 인맥을 좀 활용할까 합니다. 결정은 직접 눈으로 보고 할 겁니다. 기업을 통째로 인수하든 특허만 사들이든.’
세심한 수를 두어야 할 이유는 다른 곳에 있지 않았다.
다가올 미래에 벌어질 패권 경쟁. IT 산업 기반의 뿌리가 타국으로 넘어가는 것을 그냥 뒷짐 지고 보기만 할 미국 정부가 아니다.
그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적당한 선에서 의사결정이 이루어져야 할 터.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양복 재킷을 입으며 말 한마디를 덧붙였다.
‘천조국이 때리는 매는 일단 피하고 봐야 하는 법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