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장님의 핵몽둥이-156화 (156/300)

156화 천조국(1)

“Daddy!”

미국 동부에 위치한 모 기숙학교.

속칭 현대판 귀족학교라고도 불리는 이곳에서는, 전 세계의 명문가 자식들이 한데 모여 그들만의 세상을 그려내고 있었다.

아랍의 석유 재벌부터 유럽의 정치가, 심지어는 소국의 독재자들까지.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SA그룹 임재호 회장의 외아들, 임성빈 역시 그들의 일원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정말로 오실 줄은 몰랐어요. 일 때문에 워낙 바쁘신데 어떻게….”

“다행히 일정이 잘 맞아떨어졌다. 그리고 이런 행사에 성빈이 너 혼자 있게 할 수는 없지.”

고즈넉한 중세풍 건물에 붙은, ‘부모 초청 행사’라고 적힌 현수막.

학생들이 직접 만들었는지 소박하다 못해 어설프기까지 한 현수막이었지만, 그 아래 모인 부모들의 면면은 그런 어설픔과는 궤를 달리했다.

전 세계의 최상류층이 모인 만큼, 그곳에서 오가는 정보는 차원이 다른 셈.

물론… 미국의 IT 업계 거물들 또한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고.

“자, 성빈이 너는 잠깐 친구들하고 놀고 있거라. 저기서 아빠를 부르는 아저씨들이 있어서 말이다.”

“Umm… okay. 그럼 이따가 봐요.”

멀어져가는 아들을 바라보며, 넥타이를 고쳐 매는 임재호 부회장.

시선이 연회장의 학부모들을 향해 옮겨지자, 한층 깊어진 그의 눈빛.

“이번 일, 반드시 성공해야만 한다. 반드시…!”

스스로 다짐하며 한 발짝 한 발짝 발걸음을 옮기는 임재호 부회장.

여기저기 말을 걸며 반기는 이들. 그는 그저 겉치레에 지나지 않는 미소를 지어주며, 가장 바깥쪽 그룹의 앞에 섰다.

편한 복장에 안경을 낀, 전형적인 개발자 출신 경영진으로 보이는 이들 앞에.

“한국의 SA 그룹 부회장, 임재호입니다.”

그리고, 그런 임재호 부회장을 멀뚱멀뚱 쳐다만 보는 그들.

악수를 위해 내민 손이 민망할 때가 되어서야, 무리의 우두머리 격 되는 이가 임재호 부회장의 손을 잡았다.

“J-Coco의 CEO, 딕 존슨입니다.”

* * * *

정전식 터치스크린, 화면 전환, GPS 기술과 최적화 노하우까지. 스마트폰에 들어갈 핵심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J-Coco.

다른 거물급 IT 기업들보다야 그 규모는 작지만, 알짜 중의 알짜 회사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만큼 가격 또한 다른 쭉정이들과는 궤를 달리했지만.

“지분 매각 의사는 가지고 있습니다. SA와는 좋은 파트너가 될 것 같군요. 하지만.”

때문에, 어쩌면 약간의 무시가 섞여 단호하리만큼 내뱉은 딕 CEO의 덧붙인 말 한마디.

“자금 조달. 최소 미화 50억 달러를 과연 SA 측에서 끌어오는 것이 가능할지는 의문입니다만?”

“…….”

미화 50억 달러. 한국 돈으로 6조 원에 조금 못 미치는 거액.

예상했던 범위를 아득히 초월한 금액에 흔들리는 임재호 부회장의 눈동자.

조금씩 흐려지는 초점 속에서, 그는 한국을 떠나기 전, 그의 아버지 임계현 회장과 나누었던 대화를 머릿속에서 상기했다.

‘무조건 인수 쪽으로 가야 합니다. 확실한 통제력을 가져야 저희 SA그룹의 공고한 지배력이….’

‘3조 원. 극한 상황이라도 5조 원.’

‘아버지?’

‘일단은 그룹 내부 보유금 3조 원이다. 거기에 은행 컨소시엄을 구성해도 5조가 넘으면 안 돼. 그 이상의 투자는 그룹의 뿌리마저 흔들리게 한다.’

벽난로 불빛에 비쳐 깊게 그늘져 보이던 노인의 얼굴.

그것은 한낱 재무제표 따위로 환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관록, 그리고 경륜. 일평생을 사업을 일구며 살아온, 그리고 죽음 앞에 마지막 불꽃을 지피는 늙은 사내의 지혜.

그렇기에 임재호 부회장은 그 금액에 대해 그 어떤 반론조차 하지 못했다.

지금, J-Coco의 딕 존슨 CEO를 눈앞에 두고서도.

“임 부회장님?”

“아아, 미안합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미화 50억 달러라고 했지요? 차차 실무진을 통해 협상을 진행해보도록 하지요.”

“좋습니다. 헤이, 웨이터!”

철제 쟁반을 들고 지나가는 웨이터를 불러 세운 딕 존슨 CEO.

그는 쟁반 위에 놓인 샴페인 두 잔을 집어 들고는, 하나를 임재호 부회장에게 내밀었다.

“이렇게 좋은 날에 건배나 같이 하시죠.”

황금빛을 띠는 노르스름한 샴페인이 담긴 유리잔.

거기에 비친 임재호 부회장의 얼굴에는 깊은 수심이 드리워져 있었다.

불가능을 가능케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 이번이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는 압박.

당장이라도 그의 목을 조를 것만 같던 그 압박감은, 아이러니하게도 갑자기 들려온 외부 소식에 한순간에 재가 되어 날아갔다.

“아, 참. 그나저나 그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사우디 건.”

“사우디요?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아아, 아마 비행 중이셔서 듣지 못하셨나 봅니다.”

가볍게 샴페인으로 목을 축이는 딕 존슨 CEO. 막 유리잔에서 뗀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SA그룹에는 더할 나위 없는 호재이자, 탄약그룹에는 최악의 악재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쪽 유전 시설 중에 한 군데에서 화재 사고가 났다는군요. 대용량 저장 탱크가 폭발할 정도로 큰 사고가.”

“……!”

“원래 있던 대규모 신도시 개발에 이번 화재 사고까지. 아마 당분간 사우디 돈줄이 꽉 조여질 겁니다. 최소 1년은.”

* * * *

사막 한가운데에서 치솟아 오르는 불길. 갑작스레 난리가 난 재앙의 현장, 매캐한 검은 연기가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모습이 화면에 비쳤다.

-해외 뉴스입니다. 사우디아라비아 최대 유전지대에서 대규모 화재가 발생했다는 소식입니다.

-시설을 관리하던 기술자 중 50여 명이 사망했고, 500명이 넘는 인원이 중상을 입었다는데요. 현장 상황 바로 연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김민지 기자?

곧바로 TV를 꺼버린 나.

내심 믿고 있던 조커 카드 한 장이… 어처구니없는 천재지변 하나에 봉쇄되어 버렸다.

“어째서…? 분명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을 텐데?”

사우디 유전 시설 화재 사고.

아무리 기억 창고 속 시간선을 샅샅이 뒤져 본들 존재하지 않던 사건.

이건… 분명히 원역사에 없던 일이었다.

내가 개입했기에 10년이나 일찍 권력을 잡은 빈 살만 왕세자. 그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이런 태풍을 불러일으켰을 줄이야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일단, 상황을 정리해야 한다. 내가 가진 패가 무엇인지. 그리고, 앞으로 이 부족한 패로 어떻게 게임을 풀어나갈 것인지까지 전부.”

방금 전, 내게 전화를 걸었던 빈 살만 왕세자.

단단히 골치가 아픈 듯, 그는 착 감긴 목소리로 내게 양해 아닌 양해를 구했다.

‘소식은 들었겠지만, 일이 그리 돌아가게 되었다. 여러모로 최악의 상황이군.’

‘…애도를 표하는 바입니다. 왕세자님. 혹여 제가 무슨 도울 일이라도?’

‘애도는 무슨, 아랫것들 몇 죽은 것이야 문제 될 것도 아니지. 하지만, 진짜 문제는.’

얕게 한숨을 내뱉은 후, 침통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는 빈 살만 왕세자.

‘아무래도 자금 순환에는 문제가 생기겠군. 골치 아픈 일이다. 이래저래 저지르고 본 게 워낙 많으니.’

자금 순환.

쿠데타로 인한 빈 살만의 집권 이후, 여기저기 벌여놓은 사업들이 산적한 상황.

가까이는 탄약그룹이 주관하는 90조 원짜리 사우디군 현대화 사업부터, 수백조 원이 들어가고 있는 대규모 신도시 계획까지.

물론 사우디가 망할 정도의 타격은 아니긴 하다. 잠깐 돈줄만 꽉 조이면 될 뿐.

문제는… 그 꽉 조인 돈줄에 목마른 자가 나일 거라는 게 문제지만.

‘그렇다면…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일전에 말씀드렸던 미국 IT 기업 투자 건은 어찌 되겠습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간신히 내뱉은 물음 하나.

행여나 있을 희망적인 퇴로를 바라며 던진 질문이었으나… 절망이라는 날갯짓에 막힌 퇴로는 도무지 뚫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을 재확인이라도 하듯 확정 지은 빈 살만 왕세자의 대답.

‘힘들 것이다. 아무리 희망적으로 판단해도 올해 연말까지는.’

* * * *

“살다 살다 빈 살만 그 양반 지갑에 돈다발 마를 날이 올 줄은 누가 알았겄어.”

“그러게 말입니다. 그것도 하필이면 이런 중차대한 때에.”

탄약그룹 본사 빌딩 근처의 오피스텔.

이제는 내가 사는 집을 새로 옮겨서 조금 발길이 뜸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김원철 아저씨와 둘이서 술을 마실 때면 이만한 곳도 없다.

답답함에 술잔 가득 채운 소주를 한 번에 들이켠 나는, 옷소매로 입가를 닦으며 말을 꺼냈다.

“여간 당혹스러운 것이 아니거든요. 이래저래 마련할 실탄으로 6조 원 언저리를 생각했으니까요.”

늘 내부적으로 재투자가 일상인 탄약그룹의 재무 상태.

그렇기에, 가진 현찰 1조 원에 빈 살만 왕세자에게 5조 원가량을 투자받을 생각이었으나… 갑자기 상황이 붕 떠버렸다.

“은행 컨소시엄에서 대출을 받는 방법도 있어야. 한… 이것저것 다 끌어모으면 대출까지 합쳐서 2조 원은 만들어 볼 것 같은데.”

“2조, 2조 원이라.”

내부적으로 평가한 SA 그룹의 자금 동원력은 최소 3조 원에서 최대 5조 원 사이.

아마 저쪽에서도 대출을 포함해 할 수 있는 것은 다 끌어온다고 봐야겠지.

그렇다면 2조 원 대 5조 원의 싸움이다. 절대적인 총알로는 내 쪽이 밀리는 상황.

“흐음.”

아무렇게나 소파에 몸을 기대고는 눈을 감은 나.

어쩌면, 잘된 일일 수도 있겠다 싶다. 앞으로의 IT 산업 패권 경쟁 시대에서, 대놓고 미국 핵심 기업의 지분을 인수하는 것은 어쩌면 위험할 수 있으니까.

그렇기에 내릴 수 있는, 내려야만 하는 결론.

“미국 IT 기업. 일단 지분 인수는 포기합니다.”

“응? 그건 또 무슨 소리여? 잠깐만, 잠깐만 회장님아. 내 말 좀 들어보라니까?”

있지도 않은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올리고는, 벌겋게 취한 얼굴로 열변을 토하기 시작하는 김원철 아저씨.

잘 삶은 주꾸미 안주와 먹으며, 나는 이 스마트한 고명대신의 이야기를 귀에 담았다.

“아무리 대통령이랑 관계가 괜찮다지만, 바로 쌩을 까면 빠따를 맞는다는 건 알고 있지?”

“그렇겠죠.”

“거기다가 이거 IT 산업 선두 주자 기업, 하는 게 무조건 이득이여. 각종 세제 혜택에 산업 부지 염가 제공, 규제 완화까지 싸그리.”

“그것도 그렇겠죠.”

“그럼 왜 IT 산업 선두 주자 기업 선정 사업을 안 하겠다는 겨?”

이런, 아저씨가 조금 취한 모양이다.

약간 어긋난 듯한 핀트. 젓가락으로 주꾸미를 하나 더 집어 먹은 나는, 술로 입을 헹구고는 곧바로 대답했다.

“아아, 오해가 있었네요. 그걸 안 한다고는 한 적 없습니다. 지분 인수를 안 한다는 거지.”

“응? 그 말이 그 말인 거 같은디.”

“아니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입니다. 지금부터 탄약그룹이 나아갈 길은 그러니까.”

자금이 부족한 상황에서 어차피 대규모 인수는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조금 품은 많이 들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그것은 바로.

“특허, 특허 괴물이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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