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천조국(4)
서울 강남, SA그룹 빌딩.
다른 모든 업무를 뒤로 미룬 채, 극소수의 핵심 인력들과 함께 마라톤 회의를 이어나가는 임재호 부회장.
잔뜩 충혈된 눈을 손가락으로 비빈 그는, 탁자에 놓인 은테 안경을 다시 쓰고는 실무진에게 물음을 던졌다.
“그래서, 이 최종 산출 금액이 합당하다는 건가?”
“저희 SA 재무팀 직원들과 외부 컨설팅 업체 의견까지 전부 이 범주 안쪽에 있었습니다. 확실합니다.”
톡톡, 최종 결과물이 담긴 서류를 손가락으로 두들기는 임재호 부회장.
그의 손끝에는 복잡한 계산식에 의해 산출된 숫자 하나가 여러 의미를 나타내고 있었다.
-적정 인수가액: 최소 미화 41억 달러, 최대 미화 47억 달러.
“…결국, 아버지가 제시한 기준점이 옳았던 것인가.”
중간값으로 미화 44억 달러, 한화로 약 5조 원이 조금 못 미치는 금액이 나온 적정 인수 예상가액.
잠시 눈을 감고 작게 한숨을 토해내는 임재호 부회장. 조금 괴로운 듯 아랫입술을 베어 문 그의 귓가에는, 이 자리에 없는 임계현 회장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3조 원. 극한 상황이라도 5조 원.’
일평생 사업보국을 위해 살아왔던 나이 든 거인의 통찰력.
처음에 그 말을 들었을 때, 그 근거를 이해하지 못했던 임재호 부회장은 뒤늦게나마 제 아버지의 통찰력에 어깨를 움츠렸다.
‘일단은 그룹 내부 보유금 3조 원이다. 거기에 은행 컨소시엄을 구성해도 5조가 넘으면 안 돼. 그 이상의 투자는 그룹의 뿌리마저 흔들리게 한다.’
그러나, 그 벽난로 앞에서 보였던 아버지의 혜안은, 지금 누구에게도 말 못 할 아들의 역린 하나를 찌르고 있었다.
호부견자(虎父犬子)라는, 너무나도 아픈 역린을.
“이마저도 아버지가 옳았던 것인가. 사업을 보는 눈부터 예상되는 숫자 하나하나마저 전부….”
“부회장님? 무슨 문제라도?”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이 금액 선에서 협상단 꾸려서 추진토록 하고, 이후는 보고서나 제때 올리도록.”
소리 없이 찾아온 허탈함이라는 감정. 임재호 부회장의 손끝에 담겨 있던 힘은, 무기력함이 온몸을 휘감자 맥없이 빠져버리고 말았다.
아예 실무진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는 그의 모습.
“내가 설 수 있는 유일한 곳은 아버지의 품뿐이란 말인가….”
고개를 떨군 채 작게 한탄을 읊조리는 임재호 부회장.
그러나, 더는 올라가지 못할 것만 같던 그 고개는 뒤이은 누군가의 다급함 외침에 서서히 위를 향하기 시작했다.
“부… 부회장님! 급보, 급보입니다!”
얼굴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사색이 된 재무 담당 임원.
어지간히 급한 일이 있는 건지, 살짝 풀린 그의 황갈색 넥타이는 오늘따라 유독 사형수 목에 거는 밧줄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봐, 무슨 일이길래 그러나?”
“사우디!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에서… 갑자기 J-Coco 인수에 참여한다는 소식입니다!”
“뭐라고…!”
갑작스러운 비보.
분명… 사우디아라비아는 얼마 전 터진 유전 화재 사고 탓에 참가할 여력이 없으리라 판단했건만, 너무나도 어처구니없게 뒤집힌 판국.
“현재 확인된 정보 중, 금액 관련한 것도 있습니다!”
그리고, 뒤이은 재무 담당 임원의 입에서 나온 말 한마디.
그것은 분명, SA그룹 전체에는 악재 중의 악재였지만, 임재호 부회장 개인에게는 양면성을 지닌 동전과도 같은 것이었다.
아버지의 품 바깥에서, 무언가를 결정할 수 있는 키가 주어진 것이기에.
“입찰 희망가는 미화 70억 달러! 한화로 대략… 8조 원 가까이 되는 금액입니다!”
* * * *
미국 일정의 마지막 날.
저 멀리, 황량한 돌산 중턱에 ‘HOLLYWOOD’라고 적힌 큼지막한 흰색 간판을 배경 삼아 셀카를 찍는 김원철 아저씨.
“아, 잠깐만. 다시, 다시.”
“뭘 또 다시 찍습니까, 그냥 얼굴 나오면 그만이지.”
“에이, 다 생각해 둔 것이 있으니까 그렇지.”
정말이지… 참 이해가 가지 않는 모습이다.
굳이 저 간판이 사진에 들어가야 하는지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 건 얼마든지 애교로 볼 수 있으니까.
“오케이…! 그렇지. 흐흐흐, 이게 바로 예술이지.”
내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온 까닭은, 그 간판 옆에 널빤지로 영어 글씨를 추가해 놓았다는 것이다.
‘HOLLYWOONCHUL’이라는 말도 안 되는 콩글리시를.
“할리원철… 진짜 마음만은 영원한 소년이시네요. 어떻게 보면 또 부럽기도 한 마인드입니다.”
“젊게 젊게 사는 것이 제일 좋은 것이여. 마누라랑 이혼 도장 찍기 전에는 이런 재미있는 짓도 못 했걸랑. 그나저나.”
만족스러운 듯,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가방 안에 집어넣는 김원철 아저씨.
작은 손가방 안에는 고무줄로 아무렇게나 묶인 사진 몇 장이 들어가 있었다.
아까 전 찍은, 할리원철인가 하는 괴상한 사진부터 시작해서, J-Coco의 건물 내부 시설을 찍은 사진까지 포함해 전부.
“사우디 투자 건이 블러핑이란 걸 임재호 부회장 그 양반이 알랑가 모르겄어.”
“알든 모르든 어차피 상관없는 문제입니다. 선택지는 두 개이지만, 적힌 내용은 전부 똑같으니까요.”
갑자기 판에 등장해 참가자들의 패를 전부 흐트러트린, 사우디 국부펀드라는 거대한 존재.
비록 허장성세에 불과할지언정, 그 공룡의 움직임은 내가 치밀하게 계산해 던진 하나의 변수였다.
어젯밤, 나는 빈 살만에게 연락을 넣어 작은 부탁 하나를 들어달라고 말을 꺼내었다.
‘뻥카만 날려 주십시오.’
뻥카.
진짜 투자가 아닌, 그저 허울뿐인 몸짓.
비록 그것이 단순한 위협에 불과하다는 것을 세상 모두가 알더라도 상관없었다.
거대한 플레이어가 자리에 앉아 판을 주시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모든 전략이 원점에서부터 재시작되기에.
‘분위기에 불만 붙여 주신다면 됩니다. 어차피 저는 이 회사를 통째로 인수할 마음 따위 일절 없으니까요.’
‘재미있군. 한 회장, 자네가 노리는 게 따로 있나 본데?’
투자금이 들어가지도, 복잡한 정치적 위험을 감수하지도 않은 일이었기에, 선뜻 내게 수락의 의사를 밝힌 빈 살만 왕세자.
아니, 오히려 그는 이를 부탁을 들어준다 여기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그저 희한한 기대감으로 가득 찬 목소리를 내게 들려주었을 정도였으니까.
‘나도 여기서 나름 단역 배우 역할은 하는데, 이 연극의 미리보기 정도는 좀 볼 수 있지 않을까?’
‘크게 부풀린 거위의 배에 독을 넣을 겁니다.’
J-Coco라는 거위.
본래의 가치보다 2배 가까이 부풀려진 그 배에는… 중국 자본이라는 독이 묻도록 할 것이다.
과거 회귀 이전, 신문에서 매일같이 논하던 미·중 패권전쟁. 그 도화선에 붙은 불꽃이 얼마나 큰 규모의 폭발을 야기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최종 검수를 맡은 요리사의 화를 돋우어 보겠다?’
‘그런 셈이지요. 전 세계 패권을 거머쥔 천조국의 손에, 불쾌한 따끔함이 오게끔 말입니다.’
‘이런! 미국 정부까지 끌어들일 생각이라니, 역시 기대했던 보람이 있군. 하하하!’
웃음소리와 함께 이어진, 빈 살만 왕세자의 호평.
나는 그때 내가 마지막으로 내뱉었던 말을, 눈앞의 김원철 아저씨에게 그대로 읊기 시작했다.
“차세대 IT 핵심 기술을 가진 기업이 중국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위험성, 절대 미국 상무부 측에서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 회장님이 세운 계획이 참으로다가 완벽하고 좋기는 한디….”
어느새 진지하게 변한 김원철 아저씨의 모습. 아저씨는 잠시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는 내게 물음을 던졌다.
“그래서, 그 중국 쪽 자본을 어떻게 SA에다가 붙이려고? 그게 제일 어렵지 않을라나?”
“그건 또 어려울 것도 없는 문제입니다.”
SA그룹에 중국 자본을 엮어 줄, 가짜 거간꾼.
마침 이 일에 딱 적합한 한 사람이 있다. 뭔가 밉기는 한데, 자주 이렇게 같이 일하다 보니 이제는 미운 정이 들어버린 그 사람.
“지금은 탄약 딱지를 떼고 야인이 되었지만, 중국 하면 딱 떠오르는 그 양반이 있지 않습니까.”
“아, 잠깐만. 설마…?”
과거 탄약 전자의 숨 막히는 군기반장이자, 영 도박에는 소질이 없었던 남자.
중국 광저우에서 현지 업체에 잔뜩 미움을 사고는, 태국에서 내 정보원 노릇까지 했던 그는 바로.
“탄약그룹의 말썽꾸러기. 이택규 전 사장.”
* * * *
복잡한 의료용 기기가 주렁주렁 매달린, 임계현 회장의 노쇠한 몸.
점점 줄어들어만 가는 심박수. 노인의 몸은 서서히 죽음을 향해 한칸 한칸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꺼져가는 불씨의 상태를 나타내는 무심한 기계음. SA그룹 가문의 주치의는 다소 황망한 표정을 지으며 임계현 회장에게 말을 꺼내었다.
“이미 여러 차례 말씀드렸습니다만… 사실 회장님의 현 상태로는 즉시 입원을 권하는 바입니다.”
“자네 반응을 보아하니, 저번보다 더 부실해졌는가 보구먼.”
콧줄에 연결된 산소호흡기의 도움으로, 간신히 날숨을 내뱉은 후 입을 연 임계현 회장.
한 시대를 풍미했던 거인은, 안쪽부터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노화와 함께 여러 질환이 겹친 상태이신지라… 시간이 지날수록 생명 유지 기능의 불이 하나씩 꺼져간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거, 내 마음이 아프게 되었구먼.”
우수에 찬 눈으로 창가에 눈을 돌린 임계현 회장.
그가 마음이 아픈 까닭은, 자신의 육신이 풍화되어서가 아니었다.
자신이 떠나면 자리를 이어받을, 모자라고 부족한 아들이 맞이할 미래가 너무나도 선명하게 눈에 보였기 때문에.
“아직 그 아이는 세상에 맞설 지혜가 부족하거늘, 하늘이 자꾸 나를 보채는구나… 쿨럭! 쿨럭!”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회장님!”
피를 토하며 마른기침을 내뱉는 임계현 회장. 최측근인 비서실장이 재빨리 그의 곁에 다가왔다.
“나는 괜찮네, 괜찮아… 이봐, 임자.”
“예, 회장님. 말씀하십시오.”
“내 이제는 의사 말을 들어야 할 때인가 보다. 이 몸뚱이에 억지로라도 생명을 불어넣어야 하니.”
앙상한 나뭇가지 같은 노인의 손.
임계현 회장은 남은 생명력을 쥐어짜 비서실장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리고는, 비서실장의 귓가에 꾹꾹 적어 내린 당부의 말 한마디.
“그러니, 내 자네만 믿겠네.”
“회장님….”
“재호 그 아이가 다소 그릇된 선택을 하더라도 괜찮아. 그저 돌이킬 수 없는 참사만은 막을 수 있도록… 쿨럭! 쿨럭!”
이불 한쪽을 새빨갛게 적실 만큼 쏟아낸 피. 요란한 경보음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빨리! 지금 당장 병원으로 이송하셔야 합니다! 지금 바로!”
점점 까맣게 흐려져 가는 거인의 눈앞. 세월이라는 바람에 풍화된 노인에게는 죽음의 입구에 들어가기 전, 잠깐의 짤막한 휴식만이 간신히 허락될 뿐이었다.
“재호… 불쌍한 내 아들… 그 작은 그릇에 너무나도 큰 것을 담아야 하는 운명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