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장님의 핵몽둥이-160화 (160/300)

160화 호랑이가 되고 싶은 개(1)

-삐, 삐, 삐, 삐.

무심하게 단조로운 음만을 내뱉는 의료용 기기. 바로 옆에서는 가습기 하나가 뿌연 수증기를 내뱉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개 같은 수증기 너머 보이는 임재호 부회장의 굳은 표정.

“아버지….”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말라붙은 임계현 회장의 손.

그러나 그 손은 꼭 무언가를 꼭 잡는 것처럼, 구부러진 채로 이불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가여운 눈을 하고, 늘 말없이 자신의 손을 잡던 예전 그 모습 그대로.

“일단 큰 고비는 넘겼습니다, 부회장님. 입원해 계신 동안만큼은 큰 문제는 없으리라 확신합니다. 하지만.”

은테 안경을 고쳐 쓰고는 천천히 입을 연 병원장. 평소보다 한층 침울한 표정을 지은 그는 조심스레 입술을 떼었다.

“워낙 선천적으로 건강이 나쁘신 데다가 노환까지 심히 겹치시니, 내부 장기가 제 역할을 다 못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건가?”

“당장은 무어라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만, 아무래도 중환자실로 가시게 된다면 최악의 경우는 생각하시는 편이….”

말끝을 흐리는 병원장에게 한쪽 손을 가볍게 흔드는 임재호 부회장.

그는 피곤한 듯 엄지와 검지로 찌푸린 미간을 움켜쥐고는 곧바로 짧은 명령을 내렸다.

“알겠네. 이봐, 병원장. 당신 포함해서 여기 의료진은 전부 나가 있게.”

“예, 부회장님.”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비서실장을 바라보는 임재호 부회장. 다소 껄끄러운 관계임에도, 그는 차분하게 해야 할 질문을 던졌다.

“아버지께서는… 마지막으로 무슨 말씀을 하시던가?”

“…….”

“그룹 승계니 뭐니 하는 것들 상관없이. 있는 그대로만.”

잠깐의 고민 끝에, 짤막한 한숨 소리와 함께 비서실장이 입을 열었다.

“후우, 회장님께서는… 마지막 쓰러지시는 순간에도 부회장님을 걱정하셨습니다.”

“영원히 미덥지 못한 아들이었던 건가. 단 한 번의 인정조차 받지 못할 정도로.”

“아닙니다, 부회장님. 회장님이 하신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라….”

“그만. 무슨 말인지는 나도 알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 그 두 사람의 어긋난 관계가 불러온 어긋난 속뜻.

임재호 부회장은 제 아버지의 그 구부러진 손을 잡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비서실장에게 통보하듯 말했다.

“그만 되었네. 잊어버려. 자네도 잠시 나가 있게나. 여긴 아무도 들이지 말고.”

“…알겠습니다.”

거친 나무껍질처럼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노인의 손등.

한참을 말이 없던 임재호 부회장. 단조롭게 울려 퍼지는 기계음만이 방 안을 가득 메울 때쯤, 그는 천천히 자신만의 넋두리를 시작했다.

“실패한 두 번의 결혼, 실패한 신사업 추진, 실패한 후계자에 실패한 아들 노릇까지.”

붉게 충혈된 눈에는 신기하리만치 눈물 한 방울조차 맺히지 않았다.

그저 한숨. 메마른 한숨만 토해내듯 내뱉을 뿐.

“가시기 전, 단 한 번이라도 저를 알아봐 주셨으면 했습니다. 개가 아니라 호랑이 새끼였다는 말을 들으면서.”

SA그룹이라는 봉우리의 산군(山君)인 임계현 회장. 그리고, 그 아들로서의 가치 증명을 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인, IT 사업 선두 기업 선정.

갑작스러운 사우디 측의. 아니, 탄약그룹 측의 견제로 부족해진 인수 자금.

임재호 부회장의 손에 떨림이 일기 시작했다.

미화 20억 달러, 덜도 말고 더도 말고 20억 달러만 더 있다면… 아버지 앞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아들로서의 모습을 보일 수 있을 텐데, 하는.

“단 한 번만이라도….”

임계현 회장이 덮고 있는, 병원 이불 위에 이마를 박고 눈을 감은 임재호 부회장.

떨리는 어깨와 가라앉은 감정. 그러나… 그 무능력한 아들의 고해성사는 그리 오랜 시간 이어지지 못했다. 황급히 그를 찾으며 병실 문을 연, 비서의 목소리 때문에.

“큰, 큰일입니다. 부회장님…!”

“…분명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 했는데.”

“죄송합니다! 하지만, 워낙 급한 일이라… 중국, 중국 쪽에서 온 연락입니다!”

턱 끝으로 비서를 가리키며 고개를 까딱거리는 임재호 부회장.

곧바로, 긴장한 비서의 입에서 충격적인 말 한마디가 쏟아져 나왔다. 어쩌면… 임재호 부회장에게 있어, 아버지의 임종 전 마지막 소망을 이룰 기회일지도 모르는.

“<상하이 캐피탈>에서 IT 사업 관련 합동 투자 제안이 왔습니다. 지금 담당자가 한국에 찾아왔다고 합니다!”

“……!”

* * * *

“옘병, 그 호랑말코 같은 놈아는 딱 돈 떨어진 타이밍만 귀신같이 알아채서….”

비행기 안에서부터 눈을 감고 엄지손가락을 깨무는 이택규 전 사장.

왕년에 탄약 전자를 호령하던 빨간 명찰의 사나이는, 이제 그저 한량 놈팽이 도박꾼이 된 지 오래였다. 그것도 여기저기 원한 산 적이 많은.

“하필이면 왜 중국이여! 그것도 SA그룹 관련된 업무를!”

“고객님, 좀 조용히 해 주시겠습니까? 앞자리 분께서 불편해하셔서요.”

홧김에 의자를 걷어차다가 승무원에게 제지를 받기까지. 영 모양이 빠진 그는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

그러고는, 중얼거린 한 마디.

“암만 생각해도 <상하이 캐피탈> 쪽 인간들은 느낌이 쌔한디….”

깜빡거리는 공항 불빛을 내려다보며, 이택규 전 사장은 그를 여기까지 오게 한 사람을 회상했다.

도박 빚을 갚기에 충분할 만큼, 두둑한 현찰 다발을 안겨 주면서.

‘거간꾼 노릇을 좀 하셔야겠습니다. 정확히는 정보상 노릇도 같이.’

‘한서준 회장…님, 무슨 말이요, 그건?’

동남아를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카지노란 카지노는 죄다 돌아다니던 이택규 전 사장.

태국 도박판에서 전 재산을 다 잃은 그에게, 자신의 옛 주인이자 살아있는 원수는 달콤한 목소리와 함께 손을 내밀었다.

‘예전에 철화 반도체 건으로 광저우에서 잘나가셨잖습니까. SA그룹 쪽과 <상하이 캐피탈> 양쪽 모두 안면이 있을 만큼.’

그 잘나가던 사람 뒤통수를 후려친 양반이 할 소리냐는 내면의 외침. 그것은 돈다발 앞에 잠시 묻어두고는 고개를 끄덕이던 이택규 전 사장.

그런 그에게, 이제는 너무나도 훌쩍 커버린 옛 회장이 지시를 내렸다.

‘괜히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말고, 그냥 정보만 흘려요. SA그룹을 도와서 탄약그룹을 물 먹일 좋은 소식이 있다. 그러니 뽀찌 좀 달라. 이런 식으로.’

받은 뽀찌는 알아서 쓰라던 그 말. 비행기에서 내리고 곧바로 입국 심사를 마친 이택규 전 사장은, 지금도 귓가에 생생히 들리는 것만 같은 그 목소리를 기억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광저우 공항에서 미리 나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상하이 캐피탈>의 옌룽을 향해.

“만나서 반갑소. 내가 이택규요.”

“인사가 굳이 필요한 사이는 아닐 텐데? 바로 이동합시다, 사안이 급하니.”

검은색 차량에 반쯤은 막무가내로 이택규 전 사장을 태운 옌룽. 그의 표정은 빈말로라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옆자리에서부터 느껴지는 초조함, 다급함, 그리고… 불안함.

‘어따, 이게 뭣이다냐. 짜장 애들이 돈줄 푸는 거라 갑일 줄 알았는디, 이거 어쩌면 일이 쉽게 돌아가겄어잉.’

이제는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힌 이택규 전 사장. 오래간만에 그의 머릿속 계산기가 기름칠을 한 것처럼 빠릿빠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입으로 내뱉는 말과는 정반대의, 자신의 어린 의뢰인의 요청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그… 한서준이 머리통을 후려갈길 계획을 팔러 왔수다. 혹시 SA 놈들하고 손잡으실 생각이 있을라나 모르겄소.”

* * * *

-후루룩! 후루룩!

탄약그룹 본사 근처 오피스텔.

주로 머리가 복잡한 일이 있을 때면 찾아오는 이곳.

야식으로 중국 요리를 강력하게 추천한 김원철 아저씨는, 화려한 면치기 소리와 함께 짜장면 곱빼기를 흡입하고 있었다.

“어우, 이 집 짜장 잘하네. 그나저나 다른 쪽 짜장 애들은 우리 회장님 생각대로 속아 넘어갈라나?”

빈말이 아닌지, 제법 내 입맛에도 맞는 짜장면.

노란색 단무지 한 조각을 집어 올린 나는, 나무젓가락을 든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그 물음에 대답했다.

“짜인 판이 그럴듯하니까요. 그리고 그쪽도 반쯤은 휘말리듯 빨려 들어갈 겁니다. 자의보다는 타의에 의해서.”

미-중 패권전쟁이라는 이름의,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타의.

정말 대놓고 말하자면… 그토록 나를 괴롭게 했던 <상하이 캐피탈>이라는 존재는, 더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렸다.

그저 거대한 장기판의 말 하나. 언제든지 베이징 쪽 권력자의 의중에 따라 교체할 수 있는 패가 되었을 뿐.

“추가로 들어갈 투자금 미화 20억 달러. 뭐, 좀 더 들어간다 쳐도 베이징의 높으신 분들에게 이 정도야 푼돈이겠지요.”

“흐흐흐, 막상 실행 맡을 <상하이 캐피탈> 애들은 팬티에 오줌이 질질 흐르겠지만.”

그렇기에, 어쩌면 다소 쉽게 생각해낼 수 있었던 계책.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거실에 놓인 포켓볼 당구대 앞에 섰다. 그리고, 초크 바른 큐대로 흰색 공을 앞에 둔 채, 천천히 움직이는 내 오른팔.

“이래저래 타이밍이 좋습니다. IT 사업 선두 기업 선정으로 한큐에 넣는 공이 몇 개인데요.”

-딱!

정면 붉은색 공에 맞은 흰색 공. 속력을 받고 질주하는 붉은색 공은,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당구대 위에서 거칠게 다른 색의 공들을 여기저기 구멍을 향해 밀어 넣기 시작했다.

정확히 자신과 같은, 띠 없는 공들만을.

“대통령, <상하이 캐피탈>, 그리고… SA그룹까지 전부. 공이 벌써 세 개나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이야, 오늘 무슨 큐대에 꿀이라도 발라 놓은 겨? 무슨 공이 이렇게 나온다냐.”

기깔나다는 말이 적당할 만큼 신기하게 잘 맞은 공.

본 실력에 약간의 운이 더해진 이 결과물을 바라보며, 김원철 아저씨는 내게 질문을 던졌다.

과연 이 약간의 운이 당구대 바깥의 세상에도 계속 이어질지에 대해서.

“그런데… SA 쪽은 좀 아리까리하단 말이지. 임재호 그 양반이 받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받을 겁니다. 무조건.”

다시 큐대에 맞고 당구대 위를 가로지르는 하얀색 공. 애먼 코너에 튕겨 에둘러 맞은 푸른색 공은 아슬아슬하게 당구대의 구멍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꼭 SA그룹의 상징과도 같은 푸른색을 띤 채로.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다른 타이밍도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어서요.”

“다른 타이밍?”

다른 타이밍.

아마… 회귀 전에도 이맘때였었지.

산업화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 재계의 살아있는 신화나 다름없는 임계현 회장.

세기와 더불어 굴곡지던 그의 삶이 여든을 목전에 두고 마침표를 찍게 된 순간이… 곧 다가온다는 것을.

“남의 집안 사정까지 고려해야 하니, 마음이 좀 그렇네요.”

“꼭 임계현 회장이 조만간 가신다는 말처럼 들리네.”

“뭐, 지금 당장 생각할 일은 아니고… 영감님 깨어나시면, SA 의료원에 한 번 찾아가야 하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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