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장님의 핵몽둥이-161화 (161/300)

161화 호랑이가 되고 싶은 개(2)

미국, 실리콘밸리.

J-Coco의 CEO 딕 존슨. 심각한 표정의 그는 오늘따라 시종일관 차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평소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삼던 한국계 직원을 괴롭히지도, 엘리베이터에 함께 탄 노인 청소부에게 마시던 주스를 집어 던지지도 않을 정도로.

“보스. 들어갑니다.”

노크 소리와 함께 방 안으로 들어온 흑인 남성.

재무 쪽 임원 역할과 딕 존슨의 참모 노릇까지 겸하는 그는, 손에 든 태블릿 PC 화면을 넘기며 보고를 시작했다.

“아무래도 그 사우디아라비아 쪽은 탄약그룹과 연관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럴 것 같더군. 아마 그 대머리 남자 작품이겠지. 이름이 원철 킴이라고 했던가?”

뭔가 사실이 반쯤 섞인, 그러나 도출된 결론만큼은 이상한 오해가 되어버린 순간.

‘FUCK YOU’라는 글씨를 휘갈긴 쪽지. 그로 인한 강렬했던 첫인상.

그리고 그럴듯하게 돌아가는 현 상황은 그들에게 있어 오해의 불씨를 댕기기 충분했다.

“쥐방울만 한 어린 주인 놈이 여기서 사고 친 것을, 그 대머리 남자가 이런 식으로라도 푸는 것일 터. 앞에 세운 사우디는 그저 대리인에 불과할 것이고.”

“동시에 버뮤다 비밀계좌로의 거래는 리스크가 크다는 판단도 있을 겁니다. 뭐, 그것까지 되는 것은 일절 기대하지 않았지만.”

“다른 주머니는 못 챙기겠군. 그래서, 총 금액이 얼마라고?”

톡, 톡.

화면 여기저기를 두드리며 데이터를 불러오는 흑인 남성. 곧바로 잘 정리된 엑셀 파일이 구동되었다. 딕 존슨이 그렇게 좋아해 마지않는 거액의 숫자가 적힌.

“일단은 70억 달러. 저쪽에서 사우디를 끼고 부른 값이 SA그룹보다 20억 달러나 더 높습니다.”

“70억, 70억 달러라… 나쁘지는 않지만, 내 배가 부르기엔 아직도 부족하겠군.”

생각했던 것보다 살짝 아쉬웠던 걸까?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턱을 매만지는 딕 존슨. 혹시나 하는 목소리로 그는 흑인 남성에게 물음을 던졌다.

“SA그룹 측에서 연락 온 것은 없나? 그놈들이 그리 쉽게 포기하지는 않을 텐데?”

“추가 자금 투입은 문제가 있을 겁니다. 그때 만나신 얼치기 부회장이야 일단 지르고 보겠습니다만, 그 위에 있는 영감님은 제법 칼 같다고 하니까요.”

“아아, 그 휠체어 탄 노인.”

SA그룹이라는 피라미드 맨 꼭대기 옥좌에 앉은 임계현 회장.

태평양을 건너 여기 실리콘밸리 내에서도 그의 이름은 경영진들 사이에서 제법 유명했다. 특히나 자로 잰 듯한 의사결정은.

“그 노인네가 갑자기 주님 곁으로 가거나 하시지 않으면, 결국 맥시멈이 70억 달러겠군. 사우디 낀 탄약그룹에서 나올 돈이 말이지.”

“워낙 숫자가 크니, 저희 몫으로 오는 것도 제법 될 겁니다. 버뮤다 계좌 못 쓰는 건 아쉽지만.”

“흠….”

복잡해진 딕 존슨의 머릿속.

그는 습관처럼 리모컨을 들어 사무실 한쪽에 걸린 TV를 켰다.

자동차 레이싱 경기인 F1 그랑프리 채널이 고정된 TV. 때마침 한창 경기가 진행 중이었는지, 화면에 보이는 트랙에는 거친 타이어 자국이 선명하게 칠해져 있었다.

“좀 더, 가열찬 경쟁이 붙었으면 했거든. 타이어에 붙은 불길이 본체에 옮겨붙어도, 막상 결승선 앞에서는 멈추는 법이 없잖나.”

관중들의 환호성이 묻힐 정도의 폭발적인 굉음을 내며 달리는 경주용 자동차.

점점 마지막을 향하는 경기에서, 그 많던 자동차들은 하나둘씩 뒤처져 서서히 앵글 바깥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애매해. 중간에 전부 나가떨어지면, 달아오르던 경기도 영 재미가 없다고.”

“경쟁을… 다시 붙이시고 싶으신가 봅니다.”

앞서가는 1등, 파란색 자동차.

그리고, 그 뒤를 바싹 따라붙는 2등, 빨간색 자동차.

한참을 그렇게 서로를 전복시킬 기세로 엎치락뒤치락 신경전을 벌이던 사이, 갑작스레 따라온 빨간색.

불덩이가 달리는 듯한 그 차는 싱겁게도 금방 푸른 물결을 삼키고 결승선을 향해 전진해 나갔다.

관중의 흥이 다소 식을 만큼, 초월적인 격차를 벌려 가며.

“뒤처진 파란 놈이 좀 더 엑셀을 밟았으면 좋겠군. 제 목숨도 엔진하고 같이 타죽을 정도로.”

* * * *

상하이, 푸둥 지구의 고층 건물.

창문 아래 야경을 내려다보는 제임스 왕 이사의 어깨는 오늘따라 유독 무거워 보였다.

마치 당장이라도 창가에서 뛰어내려, 저 밝은 지면으로 떨어질 것 같은 모습.

그 어두운 모습을 본 그의 수하 옌룽은 곧바로 입을 열었다.

“정말 받으실… 생각이십니까? 이택규 그자가 말한 내용은 의심 가는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해서, 받지 않으면 어쩌겠는가? 때로는 독약임을 알면서도 마셔야 할 때가 있는 것을.”

“하지만, 주군…!”

이택규. 전 탄약 전자 사장이자 광저우의 SA-철화 테크윈의 핵심 반도체 설비 업무를 맡았던 자.

배신자 출신에 도박 중독자인 그는, 수고료만 두둑이 쥐여 준다면 얼마든지 이런 거간꾼 노릇은 할 법한 자였다.

의심하기엔 모든 상황이 너무나도 자신들에 딱 맞아떨어질 정도로.

“어쩌면… 저쪽이 파 놓은 함정일 수 있습니다. 그 J-Coco라는 미국 IT 기업, 너무나도 잘 차려진 밥상이잖습니까? 대놓고 먹어 치우라는 것처럼.”

“내 말하지 않았던가. 그 이유를.”

장 대인이 실각한 후, 날 선 칼날 위를 걷는 것만 같은 베이징 정계.

그 살얼음판 위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상하이 캐피탈>의 제임스 왕 이사. 보이지 않는 압박은 그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그들의 뜻에 맞는 무언가를 행동으로 입증하라는 압박이.

“옌룽, 이미 베이징의 뜻은 확고하다. 패권전쟁의 불씨는 내가 아니라도 붙을 것이다. 그저.”

고개를 가로젓는 제임스 왕 이사.

어쩌면, 그는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미국의 IT 기업을 먹어 치울 수 있다는, 이 그럴듯한 미끼가 자신의 윗입술을 꿰어 땅바닥 위에 내팽개칠 것임을.

그러나.

“불쏘시개 값이라도 주어지는 지금이, 그들의 버림 패로 쓰이기에 가장 덜 괴로울 때일 것이다.”

“주군… 이번에 실패하는 순간 모든 것이 파멸로 돌아가게 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파멸로 돌아갈 것이지. 그들은 이미 너와 이택규가 광저우에서 나눈 대화를 알고 있을 것이고.”

정치 지형이 바뀐 후, 올가미처럼 점점 거세게 조여오는 중국 공안의 압박.

출구 없는 선택을 강요받은 제임스 왕 이사. 그는 책상 서랍을 열어 리볼버 권총 한 자루를 꺼내었다.

늘 아무렇게나 보관해 두던 장식품에 불과한 권총을.

“러시안룰렛… 이택규 그 도박쟁이가 고약한 것을 물어왔군. 아니, 어쩌면.”

딸각, 방안을 울리는 둔탁한 쇳소리. 한 발의 총알이 장전된 방아쇠에 손가락을 올린 제임스 왕 이사는, 골치가 아픈 듯 권총을 빙글빙글 회전시키다 이내 멈추었다.

그러고는 시커먼 총구 끝을 바라보며 꺼낸 한마디 말.

“총알 든 권총을 내게 이런 식으로 들이민 자는… 한서준 그놈일지도.”

“주군….”

“진행해라. SA 측에 연락을, 아니, 옌룽 네가 직접 한국으로 가 일을 마무리 짓고 오도록.”

* * * *

“댕겨 오슈, 회장님.”

소풍 나온 유치원생처럼 양손을 세차게 흔드는 김원철 아저씨.

여기가 병원 문 앞임을 잊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고관대작 눈치도 안 보는 양반이 간호사들 눈치는 보겠냐만.

“같이 가면 참 좋겠는데 말입니다. 이 병문안.”

“그 영감님은 영 정이 안 가. 남아서 할 것들도 산더미고.”

“퍽이나 그러겠습니다. 그럼, 이따가 뵙지요.”

임계현 회장은 내 생각보다 일찍 병석에서 눈을 떴다.

무슨 일인가 싶어 가만히 생각해 보건데, 회귀 이전에도 그에게 죽음이 찾아오기 전 한 번은 마지막 정리의 시간을 가지긴 했던 것 같았다.

물론, 그다음에 그가 두 번째로 눈을 뜨는 일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조금 놀랐습니다. 깨어나시자마자 부른 사람이, 아드님이 아니라 저라고 들었습니다만?”

내가 있는 이곳은 SA 의료원, 최상층 VIP 병실.

눈앞에 보이는 이 노인은 다름 아닌… 당장이라도 생명의 불씨가 꺼질 것만 같은, 그러나 눈가에 비치는 총명함은 예전 그대로인 임계현 회장.

손짓으로 의료진을 부른 그는 입에 문 의료 장비를 벗고서 천천히 내게 말을 꺼내었다.

“한 회장을 먼저 보는 것이, 내 아들놈을 위한 유일한 길이니 말일세.”

속을 알 수 없을 만큼 깊은, 그러나 오늘따라 유독 슬프게 보이는 그의 눈동자.

종이 몇 장이 묶인 서류조차 들기 힘든 듯, 그의 앙상한 팔은 통제에서 벗어난 것처럼 위아래로 떨리고 있었다.

“재호 녀석이… 무리수를 둘 생각인 듯허구먼. 중국 쪽에서 투자를 받는다나?”

코에 매달린 산소호흡기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숨을 내쉬는 그의 모습.

분명 병상에서 눈을 뜨고 몇 시간도 채 안 되었는데도… 돌아가는 상황을 전부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할 텐데.

“…….”

우선은 침묵으로 상황을 지켜보는 것을 선택한 나.

하지만, 임계현 회장은 그 또한 염두에 두었다는 듯, 내 얼굴을 그대로 바라보며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출구 없는 구석에 몰아넣고, 서서히 숨통을 조여가는 사냥법. 한 회장, 전형적인 자네 방식 아니던가.”

“……!”

산 정상에 올라가 발아래를 내려다보듯, 작금의 판국을 명확하게 판단하는 임계현 회장.

그 판단은 일절 틀린 바가 없었다. J-Coco 경영진의 속내. 사우디라는 껍데기를 쓴, 가짜 투자 의향. 탄약그룹이 가진 자본력의 한계치.

그리고… 호랑이가 되고 싶은 개, 임재호 부회장의 쫓기는 듯한 행보까지.

그렇기에, 모든 것을 인정하고 고개를 끄덕인 나.

“물러서기 힘든 전장이라는 것, 회장님 또한 잘 아시리라 생각됩니다만.”

“내 숨통이 붙어 있는 한은, 그 잘 짜인 판을 깰 수 있다는 것을 자네가 모르지는 않을 텐데?”

협박.

가습기가 뿜어내는 수증기 너머, 표정 변화 하나 없이 그르렁거리는 늙은 사자의 목소리.

자신이 당장의 성과에 눈이 먼 아들의 고삐를 당긴다면, 나 역시 곤란해질 것이라는 최후통첩.

“…….”

“…….”

IT 사업 선두 기업 선정이라는 판 자체를 엎어버리겠다는 그의 눈빛.

상당히… 당혹스러운 카드였다. 앞으로 남은 대통령과의 관계, 이번 국책사업에서 올 이익의 재조정을 통째로 해야 할지도 모를 정도로.

“허나, 굳이 그리하진 않겠네.”

“임 회장님?”

갑작스레 바뀐 공기.

창밖의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임계현 회장은 슬프게도 웃음 지었다.

자신이 이루어낸 SA그룹이라는 왕국, 그것이 다소 줄어들고 때로는 비루해졌다는 말을 들을지라도… 그보다 더 귀한 혈육만은 지키고 싶었기에.

“한 가지. 자네가 한 가지만 내게 약속한다면… 먼 길을 돌아가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니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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