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호랑이가 되고 싶은 개(3)
아직 겨울에서 봄으로 접어들기에는 조금 이른 계절. 매섭게도 서늘한 강바람이 부는 이곳 양평에서, 나는 낚싯대를 만지작거리며 수면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김원철 아저씨의 손에 이끌려서가 아니라, 순전히 내 의지만으로.
“머리가 복잡해 보이십니다, 회장님.”
“아, 유세나 보좌관.”
낚시터에서 라면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끓이는 대머리 아저씨는 오늘 이 자리엔 없다. 조금 벌어진 외투 틈새를 여미며, 내 옆으로 다가와 앉은 유세나 보좌관.
그녀는 내게 보온병에 든 커피를 내밀며 입을 열었다.
“사실 조금 놀랐습니다. 김 비서실장님과 같이 가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혼자 양평을 가신다고 하셔서요.”
“머리 식히러 가는데, 바쁜 양반 괜히 끌고 갈 필요는 없겠죠. 어차피 시킨 일도 산더미인데.”
“실장님이 아무리 바쁘신들, 양평 낚시터라면 꼭 가셨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없는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물론 일부러 안 데리고 간 게 맞긴 하다. 지금 같은 상황에 양쪽 모두 본사에서 자리를 비우면 곤란하니까.
그리고… 뭔가 좀 차분하게 생각할 거리가 있기도 하고.
씁쓸한 커피를 홀짝이며, 나는 약간의 흔들림조차 없는 호숫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며칠 전, SA 의료원 VIP 병실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아버지라는 타이틀을 단 남자들은 다 그러는 걸까요?”
“회장님…?”
“제 아버지도, 유세나 보좌관의 아버님 되시는 분도, 그리고… 제가 그때 만났던 그 양반도.”
그날, 창밖의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슬프게도 웃음 지었던 임계현 회장.
앙상하게 말라버린 손을 내게 뻗은 그는,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며 내게 거래를 제안했다.
일평생 누군가를 압도하던 위압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조금은 슬프기까지 한 얼굴을 하고서.
“임계현 회장. 그날의 제 눈에 보인 모습은, 거대 기업의 회장이라기보다는… 그냥 아버지였거든요.”
“그냥 아버지… 말입니까?”
“네, 하나뿐인 못난 아들을 어떻게든 감싸려던. 그런 모습의.”
오늘따라 유독 미동도 하지 않는 낚싯대는, 마치 내게 임계현 회장이 내어준 숙제를 풀어내라며 재촉하는 것만 같아 보였다.
그의 마지막 생명을 잉크 삼아 써 내려간 문제지가 눈앞에 아른거림과 함께.
* * * *
‘재호 그 아이도… 이제는 나이가 쉰이 넘었건만, 여전히 내게는 어린아이나 다름없다네. 꼭 무슨 물가에라도 내놓은 것처럼.’
우수에 잠긴, 슬픈 눈.
유독 깊은 노인의 눈망울에는 서리가 낀 듯 뿌연 안개가 끼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안개가 이슬로 맺히려 고 할 때쯤, 숙인 고개를 치켜든 임계현 회장. 그는 턱 끝으로 나를 가리키며 하던 말을 마저 이어나갔다.
‘한 회장, 자네와는 상당히 다르지.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
‘제가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뭐라고 해야 할까, 사람이 타고난… 그릇의 크기가 다르다는 걸세. 그건 이제 뒤늦게라도 바꿀 도리가 없는 것이지.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냉정한 판단이 내려지는, 이 자리에는 없는 임재호 부회장.
나와는 마냥 악연으로만 엮인 사이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우호적이지도 않은 자. 나는 유독 이 남자에 대해 특출난 적개심을 가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가 가진, 너무나도 명백한 한계가 나와 탄약그룹의 생존에 일정 이상의 위협이 되거나 하지 않았기에.
물론… 임계현 회장에게 있어서는 그런 사실 자체가 더 슬픈 사실이었지만.
‘말씀하시지요.’
‘후우… 재호 그 아이가 타고난 그릇은 SA그룹의 영토를 넓히기엔 지나치게 작다네. 물론 한 회장 자네도 그쯤은 이미 알고 있을 터.’
저번 서윤지 때에 겪었던 임재호 부회장이라는 인물.
그때나 지금이나, 그의 그릇은 여전히 작고 볼품없었다. 수만 명의 임직원을 이끌고 자본주의라는 정글에서 길을 제시하기에는 부족하기 그지없는 자.
담담하게 그런 사실을 읊어가는 임계현 회장에게 거짓된 부정 따위를 말하는 것은 더 마음 아플 일일 터였다.
‘괜찮으신지요? 회장님께서 상당히…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든 말씀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그도 그렇지. 자기 아들놈이 못난 사실을 다른 이 앞에서 인정하는 것은 퍽 가슴 아픈 일일세. 그것도 내가 죽거든 내 아들에게 발톱을 들이밀지도 모르는 이 앞에서.’
담담한, 그러나 날카로운 뼈가 담긴 말. 하지만, 일체의 사감이 섞여서는 안 될 일.
값싼 동정심 따위의 감정은 이곳에 낄 자리조차 없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다. 그렇기에… 나는 다소 불편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대답했다.
‘오히려 발톱을 들이밀지 않는 것이 더 잔인한 일 아니겠습니까?’
‘…….’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임계현 회장. 그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해야 할 말을 마저 이어나가는 것뿐.
‘잔인해져야 할 때가 온다면, 저는 마땅히 그리할 것입니다. 임 회장님께서 제게 어떤 액운을 묻히실지는 모르겠지만.’
‘허허, 한 회장 이 사람. 벌써 죽은 놈 취급하는 겐가? 그리고 자네 같은 냉혈한한테는 액운도 안 묻네. 굳이 묻혀야 한다면.’
변한 눈빛.
잔뜩 수그러든 임계현 회장의 어깨가 펴지고, 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리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내게 내뱉은 예상치 못한 말 한마디.
‘내 SA그룹이라는 고깃덩어리에 미리 누린내를 좀 입힐까 하네. 자네 같은 포식자가 굳이 입맛을 다시지 않게끔, 쿨럭! 쿨럭!’
‘임 회장님…!’
-삐! 삐! 삐! 삐!
호스 달린 입가에서 뿜어져 나오는 핏물. 요란하게 경적을 울리는 의료 장비의 전원을 꺼버린 임계현 회장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양 내게 손을 휘저었다.
‘쿨럭! 쿨럭! 아아… 나는 괜찮네. 괜찮아. 일단… 저 탁자 위에 올라간 것부터 좀 보아 주거든 좋겠구먼.’
메마른 국화꽃 한 송이 외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꽃병, 그리고 그 아래의 서류뭉치.
꽃잎처럼 새하얀 그 종이 안에는… 내가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 경영의 용어로 적혀 있었다.
‘임 회장님, 이 계획은 설마….’
‘자네가 생각하는 것이 맞네.’
물론 단지 사업에 관한 것뿐만이 아닌, 못난 아들을 남겨두고 곧 떠나야 할, 아버지로서의 마음가짐 또한 적어둔 채로.
‘백색가전만이라면 재호 그 녀석이라도 지킬 수 있을 게야. 무리할 것도 없고, 무리할 수도 없는 사업이니.’
스마트폰을 필두로 한 첨단 IT 사업과 전통의 캐시카우 백색가전 사업.
임계현 회장은… 내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탄약그룹에 모든 고부가가치 사업 부문을 넘길 테니, 백색가전 부문을 전부 자신의 못난 아들에게 맞교환해 달라고.
그리고, 참 얄궂게도 끊어버린 계약서의 마지막 줄.
-탄약그룹과 SA그룹의 각 사업부를 교환하는 것에 더해, SA그룹은 탄약그룹의 다음의 계열사를 추가로 매각한다….
‘다음 장이 궁금한가 보구먼.’
손가락 끝에 닿는 빳빳한 종이의 질감. 긴장감과 함께 넘어간 그다음 장에는… 그저 아무것도 없는 백지 위에 밑줄 하나만이 그어져 있었다. 수기로 무엇이든 써넣으라는 것처럼.
‘무슨 뜻입니까, 이 조항은?’
‘저울에 무선사업부만 올려서는 한 회장 자네가 이 거래를 할 리가 없으니. 쿨럭! 쿨럭!’
내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남기고는, 곧바로 피 섞인 기침을 토해내는 임계현 회장.
아까완 달리 이번에는… 상황이 심각해 보였다.
‘회장님!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이런… 어쩐지, 신호가 이상하더니만! 김 간호사, 장치 다시 연결해!’
의료기기가 계속 반응이 없자 바깥에서는 난리가 났던 모양이었다. 급히 방문을 열고 들이닥치는 의료진의 모습.
그 정신없는 병실 속, 중환자실로 이송되는 임계현 회장은 내 손을 잡으며 마지막 말 한마디를 덧붙였다.
‘정말 얼마 남지 않았나 보구먼… 서두르게나. 내 먼 길을 떠나기 전에 매듭을 맺는 것이 나을 테니.’
* * * *
상하이 푸둥 지구, <상하이 캐피탈> 본사 건물 로비.
짐도 채 풀지 못하고 공항에서 곧바로 온 것일까?
옌룽의 뒷짐 진 손에 들린 여행용 가방 바퀴에서 연신 드르륵 소리가 나고 있었다.
그리고 늘 같은 자리에서 기다린 채, 그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수하를 반기는 제임스 왕 이사.
“왔구나, 옌룽. 임재호 부회장과의 일은 잘 풀렸다지?”
“…지시하신 대로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투자금은 사흘 후에 지급하기로 했고.”
굳은 얼굴의 옌룽.
내키지 않는 일을 억지로 진행하는 데다가, 그 협상마저 자신이 맡았기에, 그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버뮤다 비밀계좌 건 역시 저희 쪽에서 해결하기로 했습니다. 물론 그만큼 SA그룹으로부터 추가 지분을 당겨 왔습니다.”
“그래, 수고 많았다.”
“주군?”
진지한 모습과는 정반대의 무성의한 대답. 의아함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옌룽의 눈에 비친 것은, 한쪽 검지를 입술에 댄 채 다른 방으로 손짓하는 제 주군의 모습이었다.
“집무실에는 도청 장치가 있다. 일단 이것부터 보도록.”
-툭
안주머니에서 꺼낸 폴라로이드 사진 몇 장.
익숙한 공안 직원의 모습과 함께 찍힌 옌룽의 뒷모습. 그의 한국에서의 일정은 이미 윗선에 직보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것은…!”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베이징에서는 이미 눈여겨보고 있더군.”
피곤한 듯, 관자놀이를 매만지는 제임스 왕 이사.
그는 사무실 한쪽 유리장에 장식된 위스키 가운데, 가장 정중앙의 것을 꺼내 들며 말했다.
“같이 한잔하지 않겠나? 오래간만에.”
회의실 한켠에 조촐하게 마련된 축하 파티.
황금빛 위스키를 잔에 가득 따르며, 제임스 왕 이사가 입을 열었다.
“J-Coco, 참으로 매력적인 사냥감이다. 잡생각은 차치하고 그것만 집중하도록.”
“하지만, 여전히 위험성은 남아 있습니다. 탄약그룹과 사우디아라비아의 반응이…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발을 빼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나 또한 놀고만 있던 것이 아니다.”
“주군?”
굴곡진 유리잔에 비친 제임스 왕 이사의 눈동자.
평소와 달리 조금 일찍 취기가 돌기라도 한 것인지, 그는 눈웃음을 지으며 잔에서 입을 뗐다.
“참으로 다행이더구나. 미국 상무부 내에 우리 쪽 입김이 닿은 사람이 없지는 않으니.”
“그 말씀은…?”
이미 미국 정부 부처마다 자국에 우호적인 인물을 하나둘씩 포섭하기 시작한 제임스 왕 이사.
그 노력은 생각보다 일찍 빛을 발한 모양이었다. 곧바로, 옌룽의 눈에 누군가를 쏙 빼닮은 남자의 사진 한 장이 비쳤다.
“심사위원으로 들어갈 자다. 마침 저쪽 J-Coco의 딕 존슨과도 연관이 있더군. 같은 존슨 집안사람이라지?”
“……!”
“어쩌면, 함정이라 할지라도 충분히 원하는 것을 낚아챌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한서준… 그자를 발아래에 내려다보며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