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장님의 핵몽둥이-163화 (163/300)

163화 호랑이가 되고 싶은 개(4)

미국, 실리콘밸리.

J-Coco 본사를 찾은 임재호 부회장의 얼굴에는 짙은 수심이 드리워져 있었다.

얼마 전, 의식을 되찾은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다시 쓰러진 제 아버지.

악화될 대로 악화된 건강 상태야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문제는, 잠시 일어나 있던 그 짧은 시간, 가장 먼저 찾은 이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호부견자(虎父犬子) 소리나 듣는 임재호 부회장 자신과 달리, 스스로 제 영역을 일궈나가는 젊은 산군 한 마리를.

“한서준… 어쩌면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내 모습일지도 모르겠군. 그래서 혈육보다 먼저 눈에 담고자 하셨던 것인가?”

좀처럼 와닿지 않는 이해. 그리고 점점 구부러짐이 심해져 가는 곡해.

소용돌이치는 복잡한 감정은 임재호 부회장의 머릿속을 혼탁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 스스로 지금 처한 상황을 똑바로 직시하지 못할 만큼.

“하지만, 이번 건만 성공한다면 이야기는 다를 것이다. 후계자로서, 그리고… 아들로서 내 가치를 입증하기에 충분할 테니.”

이를 앙다문 임재호 부회장. 한껏 힘을 준 그의 턱에서 거친 파열음이 들려왔다.

자신보다 월등히 빼어난, 그렇기에 모방하고 싶은 그 상대는 열등감이라는 촉매에 불을 지피기에 더없이 충분했다.

측근들에게 <상하이 캐피탈>로부터 받은 투자 내역을 회장에게 숨기라는 지시를 내릴 정도로.

‘재무본부장. 병석에 누우신 아버지께서 이번 일에 과하게 심력을 쏟으신다면, 우리 SA그룹이 어찌 되겠나?’

‘…….’

임재호 부회장의 눈치를 보며 말을 아끼던 SA그룹의 재무본부장.

저물어가는 늙은 호랑이의 시대와 떠오르려 하는 젊은 개의 시대 사이에서, 그는 조심스레 외줄 위에 발을 올렸다.

‘그리하신다면 회장님 지시사항을 정면으로 어기게 됩니다만. 거기에 재무 리스크 관리 측면에서도 문제가….’

‘이봐! 당신 지금 내 말을 이해 못 하는 건가, 이해를 안 하려고 하는 건가!’

그리고, 그 모습에 역정을 내던 임재호 부회장. 평소보다 한층 더 날카로운 눈을 한 그는, 재무본부장에게 다가와 협박 섞인 말 한마디를 내뱉었다.

‘때때로 경영을 하다 보면 무리수라 여겨지는 수도 둘 때가 있는 법이야. 당장은 과해 보이더라도 긴 호흡으로 생각하자고. 그룹이나 당신 커리어나, 둘 다.’

‘…알겠습니다. 지시하신 대로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조심스레 진행된 <상하이 캐피탈>의 투자 건.

무리수임을 알면서도 내지른 패. 그렇기에… 임재호 부회장은 반드시 성공시켜야만 했다.

아들로서 제 아버지가 영원히 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인정받을 유일무이한 기회였기에.

“오우, 오셨습니까. 임 부회장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리고 지금, 임재호 부회장의 앞에 선 채 악수를 청하는 흑인 남성.

J-Coco의 재무 쪽 총책임자를 맡은 그는, 제 상사만큼이나 탐욕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임재호 부회장을 반겼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저희 보스께서 애타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 * * *

“개발자들이 특허에 일절 권리 행사 따위 못 하게끔 조치해 두라고 했을 텐데! 왜 일을 이딴 식으로 처리하나!”

-짝!

사무실 안쪽 가득 울려 퍼지는 파공음.

잔뜩 성이 난 것인지 콧김을 내뿜으며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딕 존슨. 그의 앞에는 한국계 아시아인 직원이 붉게 물든 뺨을 매만지며 서 있었다.

“지시하신 부분이 현행법에 저촉되는 부분이 있는지라….”

“변명이나 싸지르는 쓸모없는 놈! 네놈 아가리에 들어가는 월급이 아까울 지경이다!”

숨도 쉬지 못할 만큼 폭우처럼 쏟아져 내리는 모욕적인 언사.

가뜩이나 회사 매각 탓에 신경이 날카롭게 솟아 있는 상황에서, 한국계 직원이 곤란함을 표한 내용은 딕 존슨의 평정심을 잃게 했다.

바깥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보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잠시만 기다리도록!”

생각보다 일찍 나타난 흑인 부하직원. 임재호 부회장과의 만남이 일찍 이루어졌던 모양이었다.

딕 존슨은 한국계 직원의 양어깨를 꽉 잡아 쥐고는 당부의 말을 꾹꾹 눌러 적었다.

“무조건 숨겨! 회사 매각 전까지! 어차피 개발자 놈들은 법에 어두우니, 제 권리가 어찌 되든 알아채지도 못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보스.”

J-Coco라는 회사가 가진, 방대한 양의 IT 기술 특허. 그러나 스타트업이라는 회사 특성상, 그 특허의 권리관계는 너무나도 복잡했다.

모든 특허가 일괄적으로 회사에 귀속된다 보기 어려운 상황. 그렇기에… 딕 존슨이 내민 손에는 검은 유혹이 깃들어 있었다.

“이번 일만 해결되면, 쓰레기 같은 네놈 옐로우 몽키에게도 스톡옵션과 영주권 스폰서를 서 주겠다. 네놈 여동생까지도.”

“…….”

“그러니, 아까 말한 일은 조용히 처리하도록.”

한참을 망설이다 간신히 고개를 끄덕인 한국계 직원.

그간의 기나긴 가스라이팅 때문일까? 그는 일절 반항의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딕 존슨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축 처진 어깨로 점점 멀어져가는 그의 모습. 그리고 그에 대비되는 연출이라도 되는 양, 문을 연 딕 존슨은 환한 미소와 함께 임재호 부회장을 반겼다.

“언제 봐도 반가운 내 친구, 임 부회장님. 어서 오십시오!”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딕 존슨 대표님.”

* * * *

“해서… 버뮤다 계좌로 가는 자금은 중국에서 직접 송금된다는 것이로군요.”

“아무래도 SA그룹에서는 그런 비공식적 금융거래가 조금 껄끄러워서 말입니다.”

“뭐, 좋습니다. 어차피 <상하이 캐피탈> 쪽 지분은 임 부회장님이 알아서 조율하실 테니까요.”

임재호 부회장은 마치 도깨비불에 홀리기라도 한 듯한 모습이었다.

아버지로부터의 인정. 그 실체 없는 도깨비불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낭떠러지 위를 아슬아슬한 발걸음으로 걷고 있는 그의 모습.

J-Coco라는 아찔한 절벽 아래에 떨어질 자신의 미래를 상상조차 하지 못한 임재호 부회장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만년필 하나를 꺼내 들며 말했다.

“특허 부분만 신경 써 주시면 됩니다. 중국 당국에도 특허 등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쪽 요구조건이니.”

“…일단 알겠습니다. 문제없이 처리하도록 하지요.”

멈칫, 서명란에 만년필 펜촉을 가져다 대던 임재호 부회장의 팔이 순간적으로 고정되었다.

그 모습에 목울대를 꿀렁거리는 딕 존슨.

‘빌어먹을…! 설마 특허 이슈를 꺼내 드는 건가? 외부인이 눈치채기는 힘든 문제일 텐데.’

은테 안경 너머로 비치는 죽은 눈동자. 묘한 눈빛과 함께 들려온 임재호 부회장의 말 한마디는… 딕 존슨에게 있어서는 천만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그, 상무부 심사 말입니다. 보통은 상당히 오래 걸린다고 들었습니다만?”

“아아, 어차피 상무부 쪽 심사는 걱정하실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안도감을 티 나지 않게 꾹꾹 눌러 넣으며 웃음 짓는 딕 존슨.

그는 탁자 위에 명함 한 개를 꺼내 올려놓았다.

범선과 등대가 그려진 방패 위에 독수리 한 마리가 올라탄 로고. 미국 상무부 고위 직원의 명함을.

-존 존슨, 미국 상무부 전략물자 수출통제 심사위원장.

“저희 사촌 형님입니다.”

“아…! 어쩐지.”

감탄사를 내뱉는 임재호 부회장. 먹잇감을 바라보는 딕 존슨은 계약서가 동봉된 결재판을 그의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이제 이곳, 서명란에 사인만 하신다면 염려하실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임 부회장님께서 바라시던 모든 것들이.”

눈을 감고 귀를 막을 채, 홀린 듯이 자신의 입속으로 다가오는 그 모습에, 이제는 감출 것도 없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이번 서명 하나로 마법처럼 전부 이루어질 테니까요.”

서걱거리는 만년필 소리.

그때까지도 임재호 부회장은 알지 못했다.

거친 종이 위로 춤을 추는 검은 잉크가, 사실은 자신의 목에서 흐르는 핏물이었다는 사실을.

* * * *

“아이고, 임계현 회장. 그 영감님 불쌍해서 어쩌나.”

“아니, 여긴 또 어떻게 알고 오신 겁니까.”

“나름 우리 회장님 껌딱지인디, 내가 그것도 모르면 쓰나.”

양평 낚시터에서 조용한 사색의 시간을 보내려는 희망찬 계획은 그야말로 산산이 조각나고 말았다.

유세나 보좌관과 함께 라면을 끓이려고 버너에 물을 올린 그 순간, 갑자기 나타나 자기 몫의 라면 하나를 더 꺼내 든 김원철 아저씨.

“우리 아들놈이 임재호 부회장 같았어 봐. 죽어서도 눈 감기 어려울 것이여.”

“평소에 아드님 일은 신경도 안 쓰시면서, 무슨.”

“흐흐흐. 걘 회사 물려받을 거 아니잖어. 그러니까 나처럼 한량으로 살아도 되지. 끼고 사는 박자옥 씨는 생각이 좀 다른 것 같지만. 그나저나.”

그 와중에도 문맥을 찾아 훅하고 들어온 이혼한 전 부인 뒷담화.

충분히 익은 라면을 젓가락으로 흡입하며, 김원철 아저씨가 내게 물음을 던졌다.

“임계현 회장. 쓰러지기 전에 뭔가 딜이 있었을 것인디.”

“귀신이네요, 진짜.”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여. 이런 건 빨리빨리 커뮤니케이션이 되어야 하는 거니까. 물론… 선대 생각이 안 날 수는 없겠지만.”

내가 이곳 양평 낚시터에 조용히 찾아온, 아버지라는 이유마저 알고 있는 김원철 아저씨.

측근 하나는 아무래도 기가 막히게 잘 둔 모양이었다. 나는 종이컵에 담긴 라면 국물을 조금 마시고는, 그때 병원에서 있었던 일들을 하나씩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렇게 된 겁니다. IT와 백색가전의 맞교환, 그리고 제 쪽에서 원하는 계열사 하나 추가.”

“히야, 임계현 회장. 그 영감님도 참… 가시기 전까지 대단하시네.”

“그룹과 아들, 양쪽 모두를 살릴 방법이라면 이것 말고는 선택지가 없었겠지요.”

“그래서, SA그룹 자체는 존속시키는 방향으로 간다? 못난 탕아도 먹고는 살게끔?”

원래 내가 가지고 있었던 다양한 옵션들 가운데에는 SA그룹에 치명타를 가할 방법도 포함되어 있었다.

단적으로 말해서, 임계현 회장 없는 임재호 부회장은 몇 번의 마사지만으로도 쉽게 몰락할 상대이니까.

그러나.

“임 회장님이 백지수표 비슷한 걸 써 주지 않았습니까. 받아먹고 입만 씻어대면 절대 소화 안 됩니다.”

아직 백지에 적어내지 못한 SA그룹의 핵심 계열사 하나.

조만간 다가올 미래를 위해 꼭 갖고 싶었던 그 회사는, 임계현 회장의 아버지로서의 모습과 함께 내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하긴, 그것도 그렇지. 그러면… 저번에 말했던 수순으로 가겠네. 상무부 전략물자 수출통제 심사부터.”

“천지가 뒤집히는 일이 없는 한, 허가가 나올 일은 없습니다. 뭣하면 술 내기하셔도 좋고요. 비싼 양주로.”

조금씩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 미-중 패권전쟁의 전조.

분명 이맘때부터 미국은 중국에 대한 견제구를 티 나지 않게 날리고 있었다. 특히나 이런 핵심 기술의 유출은 더더욱 그렇고.

그러나.

“회장님…! 본사에서 긴급 연락입니다!”

천지가 뒤집히는 일은 내 생각보다 쉽게 일어나는 모양이었다.

다급함이 가득 담긴 유세나 보좌관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조만간… 이 억세게 운 좋은 대머리 아저씨에게 비싼 양주를 사야만 하겠다는 것을.

“미국 상무부 전략물자 수출통제 위원회에서… J-Coco 매각이 허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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